'벗'과 '우정'에 대하여
묘하게 나랑 잘 맞을 것 같은 느낌. 대화의 방식이나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 나이가 점점 들면서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더 찾게 되는 것 같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금 주춤거려도 좋으니 사소한 배려가 엿보이는 사람에게 더 끌리게 된다. 내향적인 성격인지라 그런 사람들의 태도가 더 공감되기도 한다. 상대를 대하는 조심성에서 오히려 사려 깊은 태도가 느껴진달까.
한 사람이 가진 느낌, 성향, 감정, 취향, 스타일, 분위기...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곁에 있으면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결'이라고 부른다. 사전적 의미로 '성품의 바탕이나 상태'라는 뜻보다 조금 더 넓게는 굳이 긴 말을 하지 않아도 '뭔지 알 것 같은 것'에 상응하는 의미로 '결'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우린 결이 비슷한 것 같아요."
결은 사람의 무늬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향도 있겠지만 오랜 경험으로 생긴 태도, 쌓아 올린 감성 혹은 일상에 배인 사소한 습관들이 만든 무늬. 보통의 무늬처럼 겉으로 쉽게 확인할 수 없고 천천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어떤 이는 아름답고, 어떤 이는 깊고 짙으며, 또 어떤 이는 화려한 겉모습 그게 전부다. 나는 보통 의식하지 않은 순간에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무심코 나오는 말, 그리고 그가 좋아하거나 지향하는 것들이 그 사람의 진정한 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순간을 마주하게 되거나 혹은 그가 애정을 쏟는 것들을 보고 비슷하다고 느끼거나 그 반대로 느끼곤 한다. 최근엔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길을 헤매다 온 나에게 먹음직스러운 상을 차려주고 자전거가 익숙지 않은 나를 위해 속도를 늦춰주는 그 친구의 결의 참 좋았다. 그런 사람들을 오래오래 만나며 살고 싶다.
띵동. 나는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한 오피스텔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그 몇 초간 나는 설렘반 기대반으로 잠시 두근두근했다. 우린 거의 5개월 만에 만났다. 작년 12월 초 내가 이사한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고 그 사이 K도 생애 첫 독립을 했다. 내가 독립 후 집에 온 첫 손님이라고 했다. 문이 열리고 K는 반갑게 나를 맞았다.
"00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오랜만이죠~ 우와 집 너무 예쁘다!"
종종 연락만 주고받다 친구의 얼굴을 보니 반가움이 앞섰다. 그녀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아늑한 복층 오피스텔이었는데 고층인 데다 층고가 높아 실제 크기보다 더 넓어 보였다. 짐을 한쪽에다 놓고 나는 오는 길의 험난함과 그간의 근황을 이야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좋은 소식은 없는지 서로에게 물었고 번갈아가며 답했다. K는 전과 같이 직장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 오랜만에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거라 했고 나는 전과 달리 일하는 환경이 바뀌면서 조금은 여유를 찾았다고 했다.
K와 나는 작년 가을, 한 클래스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첫 수업에서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았고 매주 만나 수업을 들으며 조금씩 친해졌다. 알고 보니 우린 동갑이었다. 같은 세대를 지나와서인지 '그때 우리 그랬잖아요!' 라든가 '요즘 이렇지 않아요?'라고 하면 많은 부분에서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야기를 나눌수록 편안함이 느껴졌다. 마치 예전에 알고 있던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대체로 K와 나는 성향이나 결이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수업시간에도 자꾸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나마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더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인데도 스스럼없이, 또 솔직한 이야기가 술술 잘도 나왔다. 원래의 나라면 낯을 가리는 성향인 데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도 내면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닌데 신기했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 적당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비슷한 결의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이렇게 편하고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종강이 다가왔을 때쯤엔 우린 좀 더 가까워졌다. 나는 K에게 제안했다.
"수업 끝나고 시간 되는 날 같이 밥 먹어요!"
K는 흔쾌히 내 제안에 오케이 했고 몇 주 뒤 토요일에 우린 만났다. 카페와 펍을 겸한 가게에서 하이볼을 시켰다. 둘 다 낮술도 상관없는 타입이었고 '저녁엔 또 따로지'를 외치며 또 한 바탕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저녁엔 근처 별점이 높은 횟집을 찾아 방어회를 먹었다. 그때 우리는 지난 학창 시절, 예전 회사생활과 지금, 앞으로의 커리어, 연애나 결혼과 같은 다양한 주제로 맥락도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얘길 할수록 비슷한 점이 많았다. K는 솔직하고 털털했다. 그래선지 자꾸만 쓸데없는 얘길 하고 싶었다. 밤 10시가 되어 헤어졌고 그날이 서울에서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이사를 했고 자주 보자고 했던 우리는 약속만큼 자주 보지 못했다. 거리가 멀어지기도 했고 K는 회사 일이 계속해서 바쁘다고 했다. 일로 바쁜 일상이 어떤 형태로 굴러갈지 꽤나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기에 한편으론 안타까웠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는 대신 종종 통화를 하며 서로의 일상과 고민을 나눴다. 가끔은 랜선으로 통화하며 술을 마셨다. 얘기를 하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우리는 동갑이었지만 말을 놓지는 않았다. 외부 모임에서 만나기도 했고 누군가가 말을 놓자고 얘기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게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단적인 예지만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의 결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K에 집에 도착하고 숨을 돌리자 K는 나에게 물었다.
"점심 먹었어요?"
"아, 출발하기 전에 아점 먹었는데 배고파졌어요."
"그럼 밥 먹어요! 00님 오면 밥 먹으려고 했거든요."
그러고는 뚝딱뚝딱 주방에서 뭔가를 만들더니 단숨에 월남쌈 한상이 차려졌다. 오리고기도 함께. 독립한 지 오래된 나는 누군가가 차려준 밥상을 먹는 게 매우 오랜만이었다. 감동과 고마움이 밀려왔다. K가 재료를 손질하고 상을 차릴동안 내가 한 거라곤 프라이팬에 오리고기를 굽는 것뿐이었다. 알고 보니 K는 요리며 청소, 여러 집안일에 능숙했다. 무엇보다 손이 빠르고 부지런했다. 냉장고에는 갖가지 재료나 음식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고 음식을 먹거나 뭔가를 하고 나면 바로바로 정리하는 습관이 배어 있었다. 나는 자취한 지 오래되었지만 요리보다는 생식이나 간편식을 선호했고, 최대한 일을 벌이지 않음으로써 일거리를 최소화하는 타입이었다. 나도 청소나 정리를 잘하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K를 보니 나는 집안일을 잘하는 축에도 못 낀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오리고기와 월남쌈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맛있었다. 마음이 담겨있어선지 더 그렇게 느껴졌다. 한껏 배를 채운 우리는 나란히 창가를 보고 앉아 내가 성심당에서 산 빵과 K가 내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잔잔한 로파이 음악을 틀었다. 창밖으로 환히 보이는 하늘은 높았고 날씨는 맑았다. 템포가 비슷한 사람과 보내는 시간은 그 자체로 편안했고 즐거웠다. K는 이렇게 집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게 처음이라고 했다. 그간 얼마나 바쁘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들을 보냈을지 짐작되었다.
나는 K의 집에서 두 밤을 잤다. 2박 3일을 꼬박 누군가와 함께 보내면서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여행을 가더라도 하루 이상을 같이 지내다 보면 서로의 다른 생활습관, 성향을 발견하며 실망하거나 다투는 경우도 간혹 생긴다. 하지만 이번엔 오히려 너무 편안하게 지내다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이렇게 느낄 수 있었던 건 물론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 써준 K의 배려 덕분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이틀 동안 우리는 근처 CGV에서 범죄도시4를 봤고 골뱅이소면무침을 메인 안주로 와인을 마셨다. 그녀의 요리 솜씨는 언제나 최고였다. 하루에 한 번씩 이런 요리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말했다.
"나중에 우리 집에서 한 달 살기 하는 거 어때요? 00님이 요리하고 제가 청소하고. 집세는 안 받아요."
"네?ㅋㅋㅋㅋ 제가 요리랑 청소 다 할 것 같은데요."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소리 내 웃기만 했다. 한 달을 같이 지내도 재밌을 것 같았다. 실현 가능성이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미래란 알 수 없기에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음날엔 느지막이 일어나 따릉이를 빌려 한강에서 자전거를 탔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는 나는 방향 전환이 서툴러 자꾸만 속도가 느려졌다. K는 앞서가다가도 주기적으로 뒤를 돌아 나를 봤다. 너무 거리가 떨어졌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가 다시 가곤 했다. 한강을 한참을 달리다 자전거를 세우고 잠시 쉬었다. 우린 진지한 얘기를 하다가도 순식간에 쓸데없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너무 웃어 배가 아팠다. 이런 얘길 할 땐 둘 다 정상인의 범주가 아닌 것 같다며 깔깔댔다.
짧은 시간 함께 지내며 알게 된 사실은 K는 체력이 좋았고 예체능에 모두 소질이 있었다. 체육, 미술, 음악 같은. 그에 비해 나는 체력이 약했지만 호기심이 많아 다양한 정보 습득에 장점이 있었고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길 좋아했다. 우린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적절하게 보완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 날 밤엔 아쉬움에 또 맥주를 한 잔 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있는 동안 와인과 맥주, 민트초코 소주까지 맛봤다(...) 내가 K네 집에 있는 술을 다 축내고 가는 것 같았지만 그 시간들은 근래 있었던 일들 중 손에 꼽을 만큼 즐거웠다. 그리고 자기 직전까지 헛소리를 하며 떠들다 잠에 들었다.
결이 비슷한 친구와 2박 3일을 보내며 고마웠고 편안했으며 따뜻했다. 친구의 세심한 배려와 정성은 오래도록 기억날 것이다. 다음엔 내가 그만큼 베풀어야지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충만했다. 우린 다음번 만남에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지 취향마저 비슷해서 기대가 된다.
학생 때는 어떻게 친해지면 비슷하든 다르든 같이 지내는 게 당연했다. 어느 순간 사회생활을 하고 삶의 현실을 직면해 팍팍함도 느끼다 보니 어느 정도 비슷하지 않으면 관계를 지속하기가 어렵다.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모해야 하는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람을 만날 때 예전부터 이어져 온 관계나 새로 맺게 된 관계일 때 내가 편안함을 느끼고 통한다는 느낌이 들면 '결이 맞다'라고 말하곤 한다. 신기하게도 상대에게도 '우린 결이 비슷한 것 같아요'라고 하면 바로 동의를 한다.
세상은 다양성을 지향하지만 인생은 결국 '끼리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는 사람의 숫자에 비해 친구라 여겨지는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시기가 오면 확실히 알게 된다. 자주 만나고, 자주 못 만나더라도 마음이 가는 사람은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서로 다른 무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삶은 분명 다채롭고 풍성해진다. 하지만 그만큼 피곤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 단조롭더라도 비슷한 감정선을 가진 편안한 사람들을 찾게 된다. 그렇게 점점 세계는 좁아지는데 그 변화가 나쁘지 않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일보다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이 나에겐 더 의미 있다.
사람의 결. 그것은 우리 곁을 끊임없이 흐르는 물결이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통로이며, 오늘을 함께 살아가게 하는 안정감이다. 그러니까 나를 편안하게 하는 비슷한 결의 사람 곁에서 한결같이 함께 하고 싶다.
관계에 있어 편한 사람은 무언가 바라지 않고
있는 그대로 결이 맞는 마음을 나누는 그 순간이다.
그리고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