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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Aug 04. 2024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당신의 삶에 충만한 의미는 무엇인가

초여름 어느 토요일,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관람했다. 반복적인 일상의 수레바퀴에 지친 육신과 정신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공연이나 전시를 종종 봐왔다. 예술과 문화에 큰 관심이 있다거나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나의 방식대로 보고 해석해보곤 했다. 이는 흑백 같은 심심한 삶에 찰나의 생기를 더하는 것이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게 된 것은 배우 신구와 박근형이 각각 주인공역인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맡았기 때문이다. 신구와 박근형은 연기경력 60년 이상의 배우로 한국판 중 최고령 고고와 디디역이기도 하다. 과거 몇몇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두 배우를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던 기억이 났다. 지긋한 나이에도 연기와 삶에 대한 열정, 나이에 걸맞은 연륜, 때로는 소년 같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이 노년의 배우들을 또 언제 직접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데다 두 사람의 협연을 무대에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임에는 틀림없었다. 나는 주저 없이 연극을 예매했다.






부조리극


부조리극의 '부조리(不條理)'라는 낱말은 인간 존재의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부조리극 작품들은 깊은 나락의 염세주의와 기괴한 유머가 뒤섞인 형태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요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40년대 파리의 극작가 그룹은 인생이 명확한 의미나 목적이 없다고 믿었다. 프랑스 극작가이자 알베르 카뮈(1913-1960)가 1942년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썼듯이, 인생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인생에서 유일한 확실한 것은 불확실성이라고 부조리주의자들은 믿었다. 부조리극은 인생을 무의미하고, 불확실하게 묘사하는 연극이다. 예를 들어, 부조리극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시작했던 곳에서 끝난다. 아무것도 성취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등장인물들은 시간과 장소를 확신하지 못할 수 있으며, 연극이 끝날 때와 시작했을 때의 모습은 사실상 동일하다.



부조리극의 대화와 언어


한편 부조리극의 언어는 종종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오해하거나 잘못 해석하며, 종종 진술이나 질문에 비논리적이거나 우스꽝스러운 말로 대응한다.


발이 아픈 에스트라공은 부츠를 벗으려고 한다. 부츠를 세게 잡아당겨도 벗겨지지 않는다. 그는 좌절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블라디미르는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평생 그것을 저에게서 떼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합리적으로 행동하세요. 당신은 아직 모든 것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투쟁을 재개했습니다."라고 하며 2막에서 두 남자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런 다음 에스트라공이 묻는다.


"이제 행복해졌으니, 우리는 뭘 할까?"

"고도를 기다리자."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어제 이후로 여기 상황이 바뀌었어."

"그리고 그가 오지 않는다면?"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어제 이후로 여기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했잖아."

"모든 게 흘러내려."

"나무를 봐."

"순간마다 똑같은 고름이 나오는 건 아니야."


이처럼 대화의 부조리는 작가가 삶의 부조리한 것에 주의를 환기하는 방식이다. 사무엘 베케트에게 세상은 축을 중심으로 흔들리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상논리적으로 생각하거나 현명하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개요


<고도를 기다리며>는 베케트의 대표적인 부조리극으로 희곡의 기본 구성은 2막으로 되어 있다.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시시포스가 신의 형벌을 받아 평생 산 정상을 향해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처럼, 두 부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50년 동안이나 오지도 않는 고도를 계속 기다리고 있다. 이를 통해 베케트는 인간의 삶을 단순한 '기다림'으로 정의 내리고 이런 기다림 속에서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을 보여준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베케트가 2차 대전 당시 겪은 피신 생활의 경험이 밑바탕이 된 것으로, 그가 남프랑스의 보클루주에 숨어 살면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자신의 상황을 인간의 삶 속에 내재된 보편적인 기다림으로 작품화한 것이다.


작품에서 '고도'라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소년을 통해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는 전갈만 받을 뿐이다. '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베케트 조차도 '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관람평


막이 오르자 나무 아래에서 고도라는 수수께끼의 사람을 기다리는 집 없는 빈민인 블라디미르(박근형)와 에스트라공(신구)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주인공 역을 맡은 원로배우 신구는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동료 박근형과 함께 열연을 보였다. 연극 내내 그 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와 생생한 몸짓은 한순간도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여느 젊은 배우 못지않게 건강하고 열정적으로 보였다.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2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 동안 대사 실수 한번 없이 극 중 주인공에 몰입하여 연극을 이끌어가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이었다. 특히 박근형 배우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한 발 서기와 경쾌한 춤 동작이 자유자재로 가능할 정도로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었다.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건강하게 나이 드는 것, '연기'를 통해 관객들에게는 감동을, 후배들에게는 귀감을 전하고 있는 그가 존경스러웠다. 그처럼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커다란 행운이다. 물론 인간의 삶이란 누구나 고독과 힘겨움을 동시에 경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또한 이를 겪었으리라 감히 짐작해 본다. 하지만 누군가는,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사랑받으며,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런 점에서 그의 삶은 퍽 인상적이고도 멋졌다.


줄거리의 기승전결이나 클라이맥스 없이 다소 지루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조리극임에도 불구하고, 좌석은 거의 만석이었다. 연극을 보는 내내 고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막이 내려질 때까지도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 채 나는 관람석 한 구석에서 일어나야 했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와 작은 바위만이 덩그러니 놓인 황량한 거리, 무대는 이러한 소도구로 인해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리는 연극은 두 명의 부랑자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로 시작되어 그들의 대화로 막을 내린다. 두 주인공은 가끔 시간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순서도 없고 이렇다 할 내용도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를 배경으로 한다. 사람들은 전쟁의 상처와 혼란 속에서 내일이 없는 끝없는 기다림과 부조리한 현실 속에 내몰리게 되는데 작품은 이러한 불확실성과 무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고도'라는 변하지 않는 좌표 설정으로 인해, 극은 시간에 따라 사건이 전개되거나 인물이 행동하기보다는 '고도' 그 자체에 모든 것이 매여 있는 듯하다. 극 중 내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고도는 부재의 현존으로 드러난다.


한편, 에스트라공의 발을 아프게 하는 신발이나 블라디미르의 낡아빠진 모자는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대변한다. 그러나 두 주인공은 고도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떤 노력이나 실천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막연히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막상 고도가 도래한다면 또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 권태를 쫓기 위해 실존 자체에 주목하면서도 현재를 살아가기보다 끊임없이 내일과 고도를 기다리는 데만 집중하는 두 주인공의 삶은 영원히 현재의 순간을 놓치게 됨을 보여준다.






'고도'의 의미는 무엇일까


공연이 끝나고 '고도'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았다. 두 주인공은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고도'를 기다린다. 하지만 고도가 누군지, 언제 올지, 왜 기다리는지에 대한 이유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맹목적인 기다림이다. 그저 기다리기 때문에 기다릴 따름이다. 그들의 삶은 '기다림'인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우려 하는데 무언가 머리를 스쳤다. 어제도, 엊그제도, 날마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습관적으로 대충 아침을 먹고 잠깐 멍하니 앉아있는 내 모습이 꼭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과 겹쳐 보인 탓이다.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빨래를 하고, 말리고, 또 그 옷을 입고 나가서 땀 흘리고, 다시 빨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을 차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것, 잠자리를 펴고,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서 다시 잠자리를 정돈하는 것 등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행위는 그저 어제의 반복이요, 매주의 답습이며, 매월의 순환에 불과한 사소하고 시시한 것들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반복되는 수많은 일상의 행위가 가진 무의미성을 폭로하는 것이 사무엘 베케트의 의도는 아니었으리라. 그는 그조차도 알지 못하는 고도를 찾길 진정으로 바랐던 사람이다. 그 심오한 '고도'의 의미에 대해 감히 예상해 보자면 고도는 삶의 목적, 존재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간절히 기다리고 있지만 끝끝내 오지 않는 그것. 실존의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고도'를 삶의 목적, 인간의 존재 이유로 본다면 '무엇 때문에, 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간절히 찾아 헤매었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만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실존의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시간의 굴레에 몸을 맡긴 채 반복하다 보면 목적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아니, 애초에 목적을 가진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기도 하다. 온전히 수많은 하루치를 살아내며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만 '왜 살아가느냐'라는 질문에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주인공들은 고도를 계속 기다리면서 의미를 찾는 것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베케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고도를 애써 기다리지만 말고 스스로 찾아 나서라"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과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며 자유로운 영혼이 되라는 것이다.


당신의 고도는 무엇인가. 사무엘 베케는 삶을 '기다림'으로 정의했다. 과연 당신의 삶에 충만한 의미를 선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기력한 기다림의 생애가 아닌, 충만한 목적이 생동하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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