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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비키 Sep 13. 2015

우리 사회의 앵무새들을 위한 변론

소설 '앵무새 죽이기'



'앵무새 죽이기'. 책을 잘 안 읽는 사람이라도 제목만큼은 한 번이라도 들어봤을 것이다. 


특히 지난 여름, 저자인 '하퍼 리'의 신간이자 이 책의 후속작인 '파수꾼'이 전 세계에 출간되면서, 앵무새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세계 독자들에게 핫한 소설이 되었다. 


초판이 발행된 때가 1960년이니, 무려 55년을 역주행해서 재인기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미국에선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으며, 1960년 출간된 이후 4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고 있는 명작(名作) 소설이다. 


'앵무새 죽이기' 2015년 국내 출간판 표지.


나는 이 소설을 3년 전에 읽었다. 한 해를 막 시작한 1월 한겨울에 말이다. 당시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읽은 것이 부끄러워 평소보다 더욱 정독해서 읽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책의 제목을 매우 중시하는 편이다. 제목은 사람의 이름처럼 그 책의 전체 내용을 포괄할 뿐 아니라 작품의 메시지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나서도 "대체 왜 이런 제목을 붙였지?"하는 책들을 종종 경험했던 터라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작가에 대한 불신이 생긴다. 자신의 생각 없이 '그냥' 쓴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읽는 동안 가장 중점적으로 살펴본 것은은 책의 제목과 작가의 메시지의 연관성이었다.






일단 내용은 재미있다. 1930년대, 그것도 한국이 아닌 미국의 남부 마을이 배경인만큼, 처음엔 살짝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다. 시대와 공간, 심지어 외국식의 주인공들 이름까지 모든 것이 낯선 데 따른 탓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초반 잠깐 뿐이었다. 이야기는 금세 독자를 몰입시킬 만큼 충분히 재미있게 흘러간다.  


'스카웃'이라는 별명을 가진 루이즈는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소설은 성인이 된 스카웃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스카웃이 초등학교 입학 직전부터 초등학교 2학년까지의 3년간을 다루고 있다. 


스카웃과 그녀의 오빠 젬, 그리고 미래의 약혼자를 약속한 친구 딜, 이렇게 3명이 함께 놀던 이야기들은 읽는 내내 짠하고 아련했다.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놀진 않았어도,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던 모든 것들은 나 또한 어렸을 때 느꼈던 것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옆집에 사는 얼굴도 보지 못한 아저씨에 대해 온갖 무서운 상상을 하고, 그 집 벽면에 손대고 돌아오기가 그들만의 담력 테스트가 되고, 그 아저씨에 대한 호기심과 오해 때문에 장난치다가 아버지에게 꾸중 듣고, 등등의 소소한 에피소드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다만 그것이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 시대상황에 맞게 디테일이 변주되었을 뿐이다. 


영화 '앵무새 죽이기'의 한 장면. 1962년 작 


아마도 다른 독자들도 스카웃의 이야기를 읽으동안 자신들의 유년시절이 떠올랐을 것이다. 별 것 아닌 것도 대단해 보이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상상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그것에 자신이 끌려가기도 하던 어린 시절.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지, 하는 마음에  유년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누구나 비슷하다.


'앵무새 죽이기'는 독자들의 유년시절을 추억하게 한다는 점에서 성장소설의 장점을 충분히 갖췄다.  


그러나 '앵무새 죽이기'의 매력은 여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책장을 넘길수록 이야기의 재미에 빠지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 켠은 묵직한 부담감이 쌓여만 갔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아이들이 앵무새를 죽이려고 시도하면서 겪는 경험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앵무새 죽이기'에는 앵무새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아이들의 유년시절의 에피소드들이 나열되는 와중에, '톰 로빈슨' 재판 사건이 소설의 중심 내용으로 등장할 뿐이다. 


톰 로빈슨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썼음에도 구제받지 못한다. 마을 다수의 사람들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톰 로빈슨을 비난하지만, 애티커스는 자신의 신념과 자식들을 위해 기꺼이 톰 로빈슨을 변호한다.


덕분에 '깜둥이 애인'이라는 비난과 멸시를 받고 젬과 스카웃까지 위험에 빠지기도 하지만, 애티커스는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고자, "인간은 평등하다"는 신념을 위해 톰 로빈슨을 기꺼이 돕는다. 그것은 톰 로빈슨이 결국 유죄판결을 받음으로써 당장은 실패로 나타난다. 애티커스도 그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지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재판에 끼어든 애티커스. 그리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 독자는 애티커스를 비난하는 극 중 인물들에게 감정적으로 반대하고, 소신을 지키는 애티커스에게는 감명을 받는다.  


하지만  과연 내가 이야기 속 인물이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사람들의 비난과 멸시를 이겨내고 신념을 따를 용기가 과연 내게 있을까.  


애티커스처럼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내가 극 중 인물이라면 나는 애티커스를 지지할 수 있을까. 


애티커스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참말로 이해할 수 없다." 


영화 '앵무새 죽이기'의 한 장면. 1962년 작


이념, 세대차, 빈부차, 학력차, 지역차, 성격차, 성별차 등등... 수많은 차이 때문에 서로 헐뜯고 비방하기 바쁜 이 사회의 모습은 과연 누가 만든 것일까.  


한 사람, 한 사람. 나를 포함한 우리 자신들이 만든 현재 사회회 앞에, 애티커스의 말 한 마디는 묵직한 무게감을 갖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애티커스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자녀들에게 엽총을 사주면서 스카웃과 젬에게 더 의미 있는 말을 해준다.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

 

다른 새들과 달리 앵무새는 곡식을 먹거나 창고에 둥지를 트는 등의 해를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운 목소리를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 뿐이다.  


아이들이 오해했던 옆집 아저씨 부 래들리나 애티커스가 변호했던 흑인 톰 로빈슨은 앵무새 같은 존재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고통을 받고 외면당한다. 심지어 톰 로빈슨은 목숨까지 잃는다. 


아마도 훨씬 더 많은 앵무새들이 '새'라는 이유만으로,  아무죄도 없이 고통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부 래들리와 톰 로빈슨 외의 스카웃 남매가 미처 보지 못한 메이콤 마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수많은 앵무새들 중 엽총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앵무새는 얼마나 될까. 나아가 미국 전역의 앵무새들은, 한국의 앵무새들은, 전 세계의 앵무새들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내가 죽인 앵무새는 얼마나 될까.  


영화 '앵무새 죽이기'의 한 장면. 1962년 작


우리는 우리의 편견과 아집때문에 아파했던 앵무새들을 기억이나 하고 있었던가. 서로 헐뜯고 싸우기 바쁜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우리의 왜곡된 시선때문에 정죄하고 있지는 않은지. 


'앵무새 죽이기'는 성장소설의 매력 뿐 아니라, 통렬한 자기비판과 자기반성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 책이다.


우리 사회는 연일 시끄럽다. 정치권은 뇌물수수, 이념 대립, 정권창출 등을 위해 여야 모두 난장판이 되어 싸우고, 체감 경제는 언제나 바닥에 머물러 있다. 


가정도, 학교도, 회사도 문제 투성이고, 연령과 성별에 상관없이 저마다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느라 사회는 사분오열 되어 있다. 

 

어딜 가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 사람들은 저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살기 힘들다고 비명을 지른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상대를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란 가뭄에 콩 나듯 쉽지 않다.  


남 탓, 세상 탓, 시대 탓, 탓, 탓, 탓... 


인류 역사상 못된 사람이 없었던 적이 없었고, 살기 어려운 시대가 아닌 적이 없었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살기 힘들다고 저마다 소리쳤고, 이웃과 가정,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다. 


결국은 어떤 '탓'을 하기엔, 삶은, 세상은, 우리에게 원래부터 불친절한 것이었음을 상기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한번 더 헤아려보고, 나의 선입견을 지우려 애써보는 노력이 선행되었으면 좋겠다. 더럽고 치사하고 억울한 것 투성이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래도 세상은 아직은 살만하다. 


단지 '새'라는 이유만으로 앵무새를 죽인다면 우리에게 누가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줄까.



개개인을 편견 없이 '사람' 그 자체로 보는 것은 신(God)만이 가능할 것이다. 인간인 우리가 그런 경지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은 해야 한다. 신은 우리에게 '완벽' 또는 '완벽해지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은 요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다른 이들을 그 자체로 받아주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다양한 개개인이 모여 있는 곳이므로.


애티커스가 했던 위의 두 말을 기억하고 싶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참말로 이해할 수 없"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내 주변의 앵무새. 우리 사회의 앵무새. 


그들이 새라는 이유만으로 더 이상 고통당하지 않으려면, 나부터가 바뀌어야 하겠지. 


어렵다. 재미와 별개로, 3년 전에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다. 아마도 '앵무새 죽이기'가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 것은 스토리의 재미 속에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이런 '어려움'을 녹여낸 덕분이 아닐까 싶다.  


자꾸만 나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당돌한 스카웃 남매에게 지고 싶지 않다고, 독자들이 스스로를 독려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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