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어린 왕자'
어린 왕자를 처음 읽은 때가 언제였더라? 어린 왕자를 지금까지 읽은 게 총 몇 번이었더라?
다들 비슷할 것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많은 이들이 어린 왕자를 읽어보았고, 설령 안 읽어봤다 하더라도 내용은 거의 다 안다. 내용뿐이랴. 그림만 봐도 "어린 왕자구나!"라고 다 알아본다.
대부분의 소설이 일회성으로 읽히기 마련인데 반해, 두세 번 이상 읽고 또 읽는 현상이 반복되는 책. 영화, 드라마는 물론이고 다른 소설책에서도 심심찮게 인용되는 등, 독자뿐 아니라 작가들도 사랑하는 책.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다. 세상의 수많은 명작소설이 많지만, 유독 '어린 왕자'는 그중에서도 유독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43년 출간된 이후 70년이 지났음에도, '어린 왕자'는 문화의 패스트 소비, 디지털 소비가 일반화된 21세기에도 여전히 읽힌다. 아날로그 방식인 종이책으로. 그것도 아주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이유가 뭘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을 만큼 내용이 짧고 문장이 간결해서?
하지만 '어린 왕자'는 짧은 내용이라고 하기에는, 담고 있는 내용이 심오하고 철학적이라, 문장 하나 하나를 곱씹어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요상한 책이다.
소설 속 화자 '나'가 사막 한가운데서 만난 어린 왕자.
그는 지구에 오기 전 6개 별을 여행하면서, 다스리고 싶어 하는 왕,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 술고래, 사업가, 가로등지기, 지리학자를 만났다. 어린 왕자가 만난 그들은 각기 다른 성격, 얼굴, 특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함.
그들이 살고 있던 별에는 다른 이들은 없었다. 오직 그들만이 혼자서 살아가는 '1인 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별에서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안타까운 이유는 단지 그들이 '혼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진짜 이유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조차 제대로 맺기를 거부하는 태도 때문이다.
왕은 아무도 없는 별에서 누군가를 다스리고 싶어 하고,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 또한 아무도 없는 별에서 모두에게 칭송받고 싶어 한다.
술고래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혼자서 술만 마시고, 사업가는 수요공급도 없는 무인도 별에서 별을 소유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한다.
가로등지기는 어떤가. 가로등을 껐다 켰다를 쉼 없이 반복하지만 그 자신은 그 일을 하는데 있어 아무런 소명도 없다. 그저 명령에 따라 일한다지만 정작 명령의 실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는 기계처럼 무의미하게 일만 할 뿐이다.
지리학자도 다르지 않다. 몇 발자국만 걸으면 되는 좁아 터진 별인데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누군가 자료를 전해주기만을 기다리느라 허송세월을 보낸다. 누가 언제, 무슨 자료를 가지고 자신 앞을 지나갈지에 대한 기약은 없다. 그저 '지리학자'라는 직업의 타이틀에만 묶여 있을 뿐, 정작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본분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한다.
어린 왕자는 이들을 보며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지구로 왔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 대해 설명한 내용은 이렇다.
"지구는 그저 그런 행성이 아니다. 숫자를 셀 수 있는데, 거기에는 111명의 왕과 (당연히 흑인 왕들을 포함해서), 7천 명의 지리학자, 90만 명의 사업가, 7백5십만 명의 술고래, 3억 1천1백만 명의 자만심 가득한 사람 등, 말하자면 2십억 명 정도의 어른들이 살고 있다.
지구의 크기에 대해 힌트를 주자면, 전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6개 대륙을 통틀어 46만 1511명이나 되는 가로등지기 부대가 있어야 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구. 내가 살고 있는 나라. 내가 속한 사회. 그리고 나 자신.
저 6명의 사람들은 모두 내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다. 나 뿐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누구도 예외 없이 그들의 모습을 닮았다. 단지 각 사람에 따라 어느 특성이 더 강하냐가 달라질 뿐.
다스리고 싶어 하기보다 먼저 머리를 숙이는 겸손함이 있다면. 남에게 칭송을 듣고 싶어 하기보다 내가 먼저 타인을 높여주는 아량이 있다면.
부끄러움을 잊겠다고 술만 마시며 무기력하게 있는 대신, 그 부끄러움을 발판삼아 더 성장하는 계기로 만든다다면. 돈의 노예가 되어 아등바등거리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베푸는 넉넉한 마음으로 채운다면.
고달픈 현실에 치이는 신세라 해도, 끝까지 꿈과 신념을 잃지 않고 내게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한다면. 남에게만 의존하기보다 자기 스스로 먼저 솔선수범한다면.
그것이 진짜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어린 왕자는 여행에서 만났던 6명을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말했었다.
"어른들은 아무리 봐도 진짜 이상해."
어른들이라는 말에 내 이름을 대입해보았다. 뜨끔했다. 사회가 어수선하고 여기 저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터지는 지금 이 시대. 누가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정치인? 기업인? 학자들? 사장님? 직원들? 아내? 남편? 구세대? 신세대? 선생? 학생? 도시인들? 농촌인들? 외국인들? 당신? 너?
여기 저기서 "네 탓"이라는 함성만 들린다. 자기반성을 하는 사람은 전혀 없는 세상. 서로에 대한 책임은 많이 묻지만 나 자신에게는 더 없이 관대한 우리들.
그래서 어린 왕자에게서 "당신도 다른 어른들과 마찬가지야."라는 말을 듣지 않을 자신이 나는, 없다.
자기반성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사회를 비난하기 바쁜 나 자신이게 더욱 그렇다. 이러한 나의 이중적 모습이 어린 왕자의 모습과 대비되어,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무거웠다.
사람들은 외롭다고 난리다.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인구가 지구에 모여 살고 있는데도, 거리에 치이는 게 사람인데도, 우리는 외롭다. 왜? 단언컨대, 그것은 '관계 문제'에서 기인한다.
세상의 수많은 장미가 있어도 길들인 장미 한 송이보다 못하고, 평범한 수만 개의 장미라도 길들여지는 순간 어느 하나 무가치한 것이 없다.
전화번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연락처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 봤자 그건 숫자에 불과해서 어린 왕자의 지구에 대한 설명문에 한 줄 정도만 더 차지할 뿐이니까.
그보다는 그 사람들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답답한 마음에 누군가 필요하지만 마땅히 전화할 만한 사람이 없다면, 전화번호에 있던 그 수많은 이름들은 수많은 장미 중 하나일 뿐이다.
소셜 네트워크가 판치는 세상의 모습은 어쩌면 수많은 장미 속에 둘러싸였지만 '나만의 장미'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 절규인지도 모른다.
길들이기. 그것은 관계의 본질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길들이고 그 사람이 나를 길들인다.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과정을 통해 나는 '나만의 장미'를 갖게 될 것이고, 나와 나의 장미는 서로를 탓하기 보다 서로를 배려해주게 될 것이다.
아무도 없는 별이라고 외로움에 빠져있기 보다는, 꽃 한송이에도 마음을 담아 관계를 맺었던 어린 왕자처럼. 쓸쓸한 사막에서 여우와 관계를 맺었던 어린 왕자처럼.
읽을 때마다 포근했던 '어린 왕자'가 이번엔 따끔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어린 왕자'가 다양한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소설임을 생각할 때, 한 번쯤은 '자기반성'의 관점으로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 관점으로 읽으면 '어린 왕자'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힐링 소설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책보다도 차갑고 냉철하다.
심지어는 마음 한 켠에 찌릿찌릿 통증이 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