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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비키 Sep 21. 2015

황금빛, 화려한 색채에 담긴 인간의 욕망과 광기

영화 '황후화'



권력과 돈은 인간의 식욕, 수면욕, 성욕 등 생리적 욕구와 맞먹을 정도로 원초적인 욕망이다. 욕망이란 무언가에 대한 결핍이 있을 때 생겨나는데, 항상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습성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되면, 인간은 파멸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비단 권력만의 습성은 아니다. 돈도, 명예도 우리의 원초적이고 추악한 내면을 끄집어내기엔 권력 못지 않다. 즉, '무엇을' 욕망하는가 보다 '얼마나' 욕망하는가에 따라, 인간의 모습과 삶의 방향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황후화>는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다룬 영화다. 세계적인 거장 '장예모'가 감독하고, 주윤발, 공리, 주걸륜 같은 세계적 배우들이 주연을 맡아서 개봉 당시부터 화제를 몰고 왔던 <황후화>는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과 권력의 상관 관계를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화려한 금빛으로 수 놓인 영화,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욕망과 광기  


<황후화>는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장예모가 감독한 영화답게  빼어난 영상미와 색채미가 돋보이는 영화다. 이 중 영화가 집중하는 색은 '금빛' 또는 '금빛'으로 대변되는 '노란색'이다. 


중국 대표 궁궐인 자금성을 비롯해서, 황제가 입는 용포와 금관, 황후의 가운과 왕관, 중앙절에 궁궐 마당을 장식한 노란색의 국화꽃과 둘째 아들 원걸을 필두로 한 10만 대군의 황금옷을 입은 반란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는 '노란 금빛'의 톤으로 화면이 전개되면서 화려함의 극을 보여준다.



<황후화>에서 금빛 혹은 노란색이 상징하는 것은 단연 '권력'이다. 황제(주윤발 분)는 영화에 등장할 때마다 항상 황금빛 용포를 입고 있다. 황제는 천하를 가진 자이다. 영화의 시대 배경이 되는 당나라 후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찬란했던 역사를 자랑하던 시기이다.


하지만 찬란하게 빛났던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도 과연 찬란했을까? 특히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황제와 그 가족들의 삶도 과연? 


영화는 처음부터 이 질문에 대해 비웃고 조롱한다. 화려해 보이는  삶일수록 그 내면이 얼마나 피폐한지. 특히 권력을 다루는 사람일수록, 그 권력의 욕망 앞에서 어떻게 망가져가는지, 영화는 매우 직설적인 화법으로 전한다.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러운 극악의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황제는 거대한 제국의 1인자가 되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 허수아비 왕이 아닌, 누구도 대적 불가한 절대권력을 지닌 자 황제 앞에서 황후(공리 분)와 세 아들 왕자조차 감히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라의 최고 명절이라는 중앙절 (9월 9일)을 앞두고 황제는 변방에 나갔던 둘째 왕자 원걸(주걸륜 분)을 불러온다. 원걸은 세 아들 중 가장 총명하고 똑똑하지만, 흔히 보듯 권력에 야심을 품은 인물은 아니다. 그는 모두가 비정상인 궁궐 내에서 유일하게 정상인 캐릭터며, 뛰어난 자질뿐 아니라 심성 또한 도덕적이고 정직한, 그야말로 최고의 지도자감인 캐릭터다. 


하지만 황제는 아들이 지닌 뛰어난 자질이 거슬린이다. 아들과 오랜만에 재회한 반가움 따위는 없다. 훌륭한 무예와 총명함을 갖춘 둘째 아들은 그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신경 쓰이는 존재다. 


황제는 아들과 재회하는 자리에서 다짜고짜 무예 시합을 겨룬다. 막상막하 속에서 결국 이긴 황제가 아들에게 한 말은 "천하의 주인은 나이며, 내가 주기 전에는 절대 뺏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1.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포장해주는 도구, 옷



영화 <황후화>에서 황제가 둘째 아들과 결투하는 장면에서, 황제는 어둡고 회색빛의 장소에서도 빛나는 금빛 갑옷을 입고 있다. 황제이기에 입는 옷이겠지만, 영화 속에서 황금옷은 황제라서 응당 입는 설정이 아니라 전적으로 '권력'을 상징하는 옷으로 쓰인다. 


반면, "황금옷을 입은" 황제와 겨루는 둘째 아들은 칙칙한 회색갑옷이다. 권력을 입고 있는 황제의 강함과 잔인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황금옷을 입지 않은 둘째 아들의 도덕성과 순종을 대비시켜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둘째 아들 원걸을 빼면 영화에 나오는 황실 가족은 모두가 비정상, 다시 말해 "미친" 인물들이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미쳤어?"라는 대사가 자주 나온다. 


권력에 미친 황제. 황제에게 복수하고자 미친 계획을 실행하는 황후. 탐욕으로 가득 찬 황실을 혐오하지만 동시에 황후(계모)와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온 태자. 권력을 위해 태자를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막내 왕자 원성까지. 이들은 모두 권력의 노예가 되어 이미 미쳐있거나 미쳐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재미있는 건 이런 황실 가족이 모두 금색 혹은 노란 색으로 대변되는 옷들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황제의 아내인 황후 또한 사람들 앞에 나설 때 늘 순금으로 만든 황관과 황금색 가운을 입고 있다. 큰아들인 태자는 아버지보다는 덜 화려하지만 역시 태자의 위치 답게 황금 왕관과 옷을 입고 있으며, 막내 아들 또한 옐로우색의 옷을 입고 있다. 


권력을 이미 가졌거나 혹은 갖고 싶거나, 아니면 벗어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가져야 하거나, 어떤 입장이든 예외 없이. 


영화는 말한다. 인간과 권력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권력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라고. 권력 앞에선 피가 섞인 가족도 소용이 없음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너무 많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황후화>에서 황금색 옷을 입고 있는 인물들. 영화는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을 통해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다룬다.

    

옷은 패션이기 이전에 인간의 몸을 가려주는 도구다. 때문에 인간의 몸이 원초적 욕망을 의미한다면, 몸을 가려주는 옷은 인간의 욕망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주는 도구다


아이러니하게도 옷이  화려할수록, 그 옷이 덮고 있는 몸은 보잘 것 없기 마련이다. 욕망이 강해질수록 인간은 추악해진다. 그러나 그 추악함을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해서 그럴 듯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 또한 인간이 가진 또 다른 본성 중 하나다.


                                                                                                                         

위 장면에 태자는 빠져있지만, 둘째 아들 원걸을 제외한 모두는 황금빛의 옷을 입고 있다. 권력의 노예가 되어 화려한 옷에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감추고 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이들의 욕망은 결국 옷으로도 감춰지지 않는다.                                             


유일하게 황금옷(권력)을 입지 않았던 둘째 원걸도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결국은 황금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가 황금옷을 입은 건 권력을 탐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태자와 비교되지 않는 뛰어난 재목이었음에도 끝까지 정직과 윤리를 져버리지 않는다. 그런 그가 황금옷으로 갈아입게 된 건 어머니인 황후를 위해서였다. 



2. 탐하길 강요하되 탐해서는 안 되는 것, 권력


서서히 미쳐가게 만드는 약재를 넣어 10년간 자신에게 약을 먹인 황제에게 복수하기 위해, 황후는 10만 개의 국화 자수를 손수 수 놓으며 중앙절 축제날 밤의 반란을 도모한다. 


황제가 보낸 약 때문에 나날이 병세가 깊어가는 와중에서도 복수를 꿈꾸는 황후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그것은 황제의 권력에 대한 복수이자 자신의 또 다른 권력욕의 표출이다.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복수를 통해 황제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황후는, 지금도 끊이지 않는 권력다툼을 일삼는 사람들의 모습을 극대화한 것이다.



원걸 왕자는 황후의 반란 계획에 반대한다. 친어머니인 황후와 친아버지인 황제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는, 권력을 도모할 유혹 앞에서 부모 자식 간의 윤리적 관계를 먼저 앞세우는 유일한 자다. 


하지만 때마침 황제가 보낸 약이 황후 앞에 도착하고, 독약인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먹어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원걸은 황후의 반란에 동참하기로 한다. 즉, 그가 반란에 동참하는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 때문이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을 이겨낸 사람조차도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길. 인간 본연의 도리도 통하지 않는 권력이라는 것이 새삼 무서웠다.


영화 <황후화>에서 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이 머물며 권력이 소비되는 공간인 자금성은 온통 금색이다. 눈을 뜨면 보이는 궁궐 내의 모든 벽은 온통 금빛으로 칠해져 있다. 국화를 수 놓는 황후의 자수도 온통 금색이며, 궁의 마당은 노란색의 국화가 가득 채우고 있다. 


궁에서 사는 동안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누구도 예외 없이 권력과 짝해야 한다. 권력을 탐하는 것이 마땅하고, 황금옷을 입어 그 욕망을 가리면서도 동시에 그 욕망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 


권력을 탐하지 않는 원걸에겐 권력을 탐해야 한다고. 권력의 세계가 무서워 도망치고 싶었던 태자에겐 무조건 궁에 있으면서 권력을 탐하라고. 그렇게 왕자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권력을 탐하길 강요당한다. 


권력을 탐하는 것이 당연한 세계에서 권력을 탐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죄다. 그것을 거부하며 인간의 도리를 우선시하는 원걸에게 권력은 오히려 그 도리를 앞세워 원걸을 그 추악한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권력의 무서움은 여기에 있다. 가족 간의 도리를 저버리게 하는 것은 물론, 그 추잡한 욕망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까지도 반드시 끌어들이는 것. 결국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황실 가족 5명은 모두가 권력투쟁의 한 가운데서 만난다. 그것도 축제의 절정인 날 밤에.



반란은 생뚱맞게 셋째 왕자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둘째 왕자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모인 자리. 바깥에서는 이미 축제를 알리는 대규모 합창단의 노래가 시작되었고 황제와 황후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옷을 입고서 축제의 서막을 연다. 


이때 이들이 입은 황금 옷은  더 이상 추악한 욕망을 감추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이들의 옷은 그 자체로 그들의 권력욕을 상징한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내면의 권력욕을 숨기거나 감추려 하지 않는다.   


<황후화>에서 첫 번째 희생양은 태자였다. 황제의 약을 먹고 미쳐가는 황후처럼, 태자 자신도 권력투쟁이 난무하는 궁궐에서 살면서 미쳐가고 있었다. 태자뿐이 아니었다. 황제도, 셋째 왕자도 모두 미쳐가고 있음은 (혹은 이미 미쳤거나) 자명한 사실이었다. (궁에서 오랫동안 떨어져있었던 둘째 원걸만이 제정신인 것도 이런 의미에서 설명이 된다.) 


슬프게도, 태자는 자신이 미쳐가는 것을, 또 계속 있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미쳐버릴 거라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원걸과는 또 다른 이유로 권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허무하게 셋째 왕자의 칼에 찔려 죽고 만다.


셋째 아들인 원성은 황제와 황후 앞에서 태자를 찔러 죽인다. 갑작스러운 행동이었고 아직 어린 셋째였기에 모두가 놀랐음은 당연했다. 처절한 권력싸움 앞에서 어리다고 배척해놓고 있었지만 어리다고 욕망이 없을까. 권력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들이었으면서도, 자신들의 권력욕에 집중한 나머지 셋째 왕자를 어리다는 이유로 잊고 있는 우를 범했다.


태자를 죽인 셋째는 그와 함께 본격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욕망은 황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자리'로 대변되는 최고의 권력 앞에서, 황제 또한 아들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다. 개인 근위대를 이끌고 황제 앞에 선 셋째 왕자는 황제의 개인 군사들에게 대항하지도 못하고 모두 죽는다. 그리고 아버지 황제는 자식인 셋째 왕자를 자신의 허리띠로 때려 죽인다. 


권력 앞에서 부자 간의 도리와 정 따위는, 없었다.


막내 아들의 반란에 대한 황제의 분노는, 단순히 반란 자체에 대한 분노가 아닌,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분노이다.

     

         

3. 욕망, 컨트롤할 수 있는가. 


셋째 아들의 반란은 그렇게 순식간에 끝났다. 상대도 되지 않는 실로 어설픈 반란이었음에도, 황제는 가차 없이 셋째 아들을 죽인다. 죽이고 나서 마음 아파하는 모습 조차 없다. 


오히려 황제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둘째 아들인 원걸의 반란을 맞기까지 한다. 그때는 이미 원걸을 필두로 황후의 지시를 받은 10만 대군이 궐 밖에서부터 쳐들어 오고 있을 때였다.



반란군은 처음에 승승장구한다. 황후가 수놓았던 금색의 국화자수를 목에 건 10만의 대군들은 황제의 권력을 빼앗기 위해 궐 안으로 쳐들어 온다. 이유야 어떻든 권력을 빼앗겠다는 집념은 권력에 대한 원초적인 본능과 만나면서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반란군을 막을 자들은 없어 보였다. 원걸의 뛰어난 무예실력은 일당백도 너끈히 이겨내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그 결과 반란군은 황제의 깃발이 있는 곳까지 손쉽게 쳐들어간다. 그리고 원걸은 황제의 기를 자름으로써 공식적인 반란을 선포한다.


하지만 권력을 빼앗겠다는 집념보다 더 강한 건 '권력을 지키겠다'는 의지이다. 더구나 부모 자식 간이나 부부간의 도리보다도 탐했던 권력이다. 황제의 권력에 대한 의지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게다가 반란의 이유가 부모 자식 간의 도리 때문이었던 (그것을 지시했던 황후마저도 황제에 대한 도리는 끊을지언정, 자식에 대한  도리 앞에선 권력욕보다 앞세우지 않는다) 원걸로서는 아버지를 애초부터 이기기가 불가능했다.



전진하던 반란군은 황제의 군사들에게 저지당한다. 죽기 직전 이미 태자가 황후의 반란을 말했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황제는 둘째 왕자를 견제하고 있었다. 


세상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권력이었기에 황제는 반란군의 경우까지 미리 계산하고 준비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이는 셋째 왕자의 근위대를 죽이는 장면에서, 궐내 천장에 숨어있던 개인호위병들이 등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반란군은 10만이었지만, 황제의 군대는 그 수를 능가했다. 그 많은 수를 미리 준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황제의 권력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황제의 군대가 만든 방어벽 앞에서 10만 대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황금빛 옷을 입음으로써 권력을 빼앗겠다는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지만, 그들 또한 셋째 왕자팀과 마찬가지로 몰살을 피하지 못했다.


즉, 권력이란 탐하지 않는 자 마저도 탐하는 자리로 끌어들이지만, 권력을 탐하는 순간 그 사람은 죽는다. 권력을 탐하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서도 안된다. 그러면서도 권력을 피하려는 사람은 놔주질 않는다. 그래서 권력이라는 것은 무서울  수밖에 없다.



<황후화>에서 황제의 군대는 10만의 대군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인다. 이 전투 장면에서 반란군은 황금 갑옷을, 황제의 군대는 은빛 갑옷을 입고 있다. 권력을 탐하는 편의 사람들은 모두가 황금옷. 


하지만 황제편의 사람들은 황제 이외에 황금옷을 입을 수 없다. 황제의 팀은 그 순간에도 군신관계의 도리보다, 절대권력을 가진 황제의 욕망이  우선시되고 있다. 권력은 오직 황금옷을 입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 황제팀의 권력은 어느 순간에도 분산되지 않는다. 오직 황제만이 탐하고 누릴 수 있다.


반면 반란군은 모두가 황금옷을 입었다. 하지만 이들의 황금옷은 실제가 아니다. 권력을 탐하는 욕망으로서의 수단일 뿐. 


결국 절대권력을 가진 황제 앞에 모두 쓰러지면서 이들의 황금옷은 핏빛의 붉은 색으로 바뀐다. 극 중에서 권력을 탐하는, 혹은 탐해야 함을 강요당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의 황금옷은 모두 피로 물든다. 


당연히 극 중에서 붉은 색은 죽음의 색이다. 하지만 동시에 원색의 붉은 색은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색이다. 궁궐 내부는 황금빛과 더불어 붉은 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결국 이것은 권력을 탐하는 장소인 궁궐은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며, 권력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황후화>에서 전체적으로 쓰인 노란 톤의 화면에 붉은 톤이 공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 속 궐내의 이미지. 화려한 원색톤 중에서도 금색과 함께 붉은 색이 주로 쓰였다.

                                           

반란군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원걸은 마지막까지 황제의 군대와 싸우다 결국 사로잡힌다. 피칠갑이 된 채로 황제의 군대와 마주한 원걸은 그 순간에도 권력을 탐해야만 하는 것에 갈등한다. 


어차피 원하지 않았던 거였고 꿈꿔본 적도 없었다. 모두가 미쳐있는 이 궁궐에서, 그는 끝까지 온전한 정신을 소유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를 위해 반란을 도모해야 했고, 자신이 칼을 겨냥하는 대상이 아버지여야 하는 현실 앞에서, 그는 누구보다 괴롭다. 


사실 그가 보여주는 감정이 정상이지 않은가. 하지만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궁에서, 정상인 그는 비정상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반란을 도모한 자가 받는 형벌은 거열형이었다. 거열형은 사지가 찢겨 죽는 형벌이다. 중앙절 축제를 즐기기로 되어 있는 단상에 남은 가족이 모인다. 


반란을 제압한 황제, 반란에 실패한 황후와 피칠갑이 된 원걸 왕자. 황제는 원걸에게 말한다. "거열형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이제부터 황제가 내리는 황후의 약을 네가 갖다 바치라고." 한마디로 미쳐가는 독약을 탄 약을 제 손으로 어미에게 갖다 주라는 것이다. 그것도 매일, 매 시마다.


참으로 무서운 벌이다. 권력을 탐했던 자에게 이보다 더한 벌이 있을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아비의 명령에 따라, 어미의 목숨을 앗아야 하는 섭리. 반인륜적인 것도 서슴지 않아먀만 하는 세계. 한마디로 미친 사람들의 세계인 그곳에서 살아가려면 방법은 하나. 원걸 자신도 미쳐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황제의 약이 황후에게 도착한다.


황후는 아들에게 "그러라"는 눈빛을 보낸다. 그래도 황후에겐 모정이 남아있었다. 자신은 미쳐갈지언정 자식은 살리고픈 마음. 그 순간 누구보다 갈등하고 괴로워할 아들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황후는 극의 마지막에서 원초적 욕망을 이겨낸다. 


하지만 이미 황후는 오랜 시간 동안 황제가 내린 약을 먹어온 관계로 죽어가고 있었다.  아비의 뜻을 따르자니 어미가 죽고, 아비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은 반역이다. 어차피 자신의 목숨을 아낄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의 자리를 탐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의 반란의 이유가 어미에 대한 사랑과 정이었는데 그것을 버리라는 아버지의 요구는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그는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결한다. 절규하는 황후. 황후는 생애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으로 황제 앞에서 황제의 약을 쏟아버린다. 


그 이후의 황후의 모습을 영화는 보여주지 않기에, 그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던데다 반란은 실패했고 자식마저 잃은 상황에서 그녀가 살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무섭게도, 아들이 자결하고 황후가 약을 엎어버리는 그 순간에도 황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젓가락질을 하던 손가락이 아주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이내 그는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젓가락질을 계속한다.


 

극 중에서 다친 태자를 찾던 황제의 모습. 황금 옷을 입고 태양빛을 받으며 등장하는 모습이 절대권력을 상징한다. 황금빛이던 궐의 내부는 이때 검은 톤으로 잡았는데, 이는 권력의 어두운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황제의 개인병사들이 검은 옷을 입었듯 말이다.                                            


욕망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 해도, 모든 인간이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다. 태자와 원걸은 둘 다 욕망을 거부했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차이가 있었다. 


태자는 욕망 앞에서 겁을 먹었고, 원걸은 그렇지 않았다. 원걸은 욕망에 맞서 싸우는 방법을 선택했다. 부모에 대한 도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포기하는 모습은, 욕망 앞에서 가족을 죽이기를 서슴지 않았던 황제나 셋째 왕자와 정반대에 위치한다. 


결국 영화는 욕망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 다시 말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욕망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느냐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욕망한다고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욕망이 있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한 것이기에. 다만 그 욕망을  컨트롤할 수 있는가는 중요할 것이다. 


나의 욕망은 무엇인가. 우리의 욕망은 무엇인가.  돈? 명예? 권력? 건강? 능력? 외모? 사람?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부디, 욕망을 자유롭게  컨트롤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비극의 결말을 맞지 않기 위해. 삶에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의 요소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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