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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비키 Oct 04. 2015

촉법소년법과 정의에 대한 날 선 질문들을 던지는 책

소설 '고백'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일본 추리소설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은 일본 추리문학에 대한 나의 오해 혹은 선입견 때문이었다. 왠지 잔인하고 잔혹한, 읽기만 해도 구역질 날 것만 같다는 생각. 이런 오해가 당최 어떻게 해서 내 안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나조차 모른다.


<모방범>과 <용의자  X의 헌신>을 읽고서 다행히 나의 이상한 편견은 많이 깨졌다. 잔인하기는커녕, 심리적인 긴장감을 유발함과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상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작가들의 자세가 도리어 매력적으로 느껴진 덕분이다.  


많은 장르소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일본 추리소설 작가들이 단연 돋보이는 건 이러한 작가정신 때문일 것이다. 문학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잃지 않으면서도 재미있게 쓸 수 있는 필력은 의외로 많지 않으니까. 재미와 함께 책장을 덮고 나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힘. 이 느낌이 좋아서 오래 전 친구에게 받은 <고백>을 꺼내 읽었다. (소설을 읽고 글을 쓴 시기는 2014년이지만... 2023년에도 소설이 주는 문제의식과 고민거리는 동일하다는 것이 안타깝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관계자들의 이야기, 거기서 파생되는 또 다른 사건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고백>은 중학교 여교사가 자신의 딸을 죽게 한 제자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S중학교 1학년 B반 담임인 여교사 '유코'는 자신의 반 학생 2명에 의해 4살짜리 딸 마나미를 잃었다. 딸과 제자를 한꺼번에 잃게 된 참담한 비극 앞에서, 유코는 선생의 입장을 내세워 두 학생을 처단하지 않는 대신 봄방학을 앞둔 마지막 종례시간에 범인을 A, B라 부르며 반 아이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공개하고는 학교를 떠난다. 반이 바뀌지 않은 채로 그대로 2학년을 맞이한 B반 아이들에게 유코선생님의 충격고백은 족쇄와 고통으로 돌아오고, 이어 마나미 사건의 전모와 그 이후 벌어진 연관 사건들이 여러 화자들을 통해  하나둘씩 밝혀진다.


<고백>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탐정이나 형사, 또는 경찰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변호사나 검사도 없다. 살인 현장조차 남아있는 자들의 입을 통해 '증언'될 뿐, 살인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살해 수법이 초반에 공개되었고 이어 다음 챕터에서 범인들의 실명도 공개되었음에도, 등장 인물들은 여전히 법적인 처벌에서 계속 벗어나 있다.


그럼에도 <고백>은 독자가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4살짜리 아이를 살해한 13살의 어린 소년들. 이 끔찍한 사건 앞에서, 딸을 잃은 유코는 물론, 가해자 소년들과 그들의 가족 등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된 관계자들, 학급 반 아이들처럼 사건을 간접적으로 들은 관찰자들까지,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유코는 딸을 잃었고, 13살 소년들은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질렀다. 유코는 범인들에게 심리적 족쇄를 채우는 방식으로 복수를 가했고, 그로 인해 가해자 두 학생과 반 아이들은 충격에 빠진다.


살의는 없었지만 직접 살인을 저지른 소년 B와 그의 가족은 유코의 복수로 직접적인 타격을 받으며 무너졌고, 살의는 있었지만 직접 죽이지는 않은 소년 A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 채 오히려 자신의 범죄가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려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꾸민다. 또한 반 아이들은 살인자들을 제재한다는 명목하에 반 친구들에게 집단폭력을 휘두르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즐기는 단계까지 가버린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또 다른 희생자들이 배출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내면의 고통에 치중하는 나머지, 그로 인해 새로이 파생되는 또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 아무런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는 딸을 잃은 유코마저도.


영화 '고백'의 한 장면.


<고백>은 총 6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각 챕터의 제목처럼 챕터별로 내용을 이끄는 화자 또한 달라진다. 당연히 이들 화자들이 마나미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이나 느끼는 감정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느 누구 하나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


성직자, 순교자, 자애자, 구도자, 신봉자, 전도자라는 챕터별 주인공들의 이름이 주로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의미로 쓰이는 단어라는 것은 그 당사자들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오히려 그 반어적인 표현 때문에 섬찟한 공포감을 더 크게 느끼게 만드는 장치로도 작용한다.


성직자는 무서울 정도로 치밀했고, 순교자는 더 큰 비극을 가져오는 어설픈 동정을 보여주었다. 자애자는 성직자를 맹목적으로 불신하고 비난했으며, 구도자는 현실을 부정하고, 신봉자는 완벽한 착각과 그에 따른 실패를, 그리고 전도자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계획하에 주도하면서도 자신은 무죄라고 말한다.


마나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계속 이전처럼 선량한 사람들로 살아갔을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때,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은 그 전에 일어났던 '선행 사건'(앞선 사건)의 피해자였던 셈이 된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보이는 소년 A조차도 미나미 사건이 일어나기  오래전,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이유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어떤 사건을 일으킨 범죄자라도 사회는 그들을 처단할 수 없게 된다. 그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만 계속되는, 사회의 무기력함만이 남게 될 뿐이다.


<고백>을 읽으면서 무서웠던 것은 이 부분이었다.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찬반양론이 일어나는 것이 '미성년자 보호법' 혹은 '촉법소년법'이다. (*2022년 10월,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촉법소년 연령기준을 만 13세로 낮추고 처벌을 강화하는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아직 완료되지 않았지만, 이런 움직임이 공론화되었다는 것을 볼 때 촉법소년 기준을 낮추자는 대전제는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관련 기사 -->  https://www.asiatoday.co.kr/view.php?key=20221102010001311)



복수의 스노우볼이 가져오는 슬픈 파장


<고백>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살인 장면이 잔인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일어난 살인 사건을 바라보며 그것을 자기 입장에서 해석하는 각 관련자들의 이기심과 그로 인해 피해자와 가해자, 관찰자 할 것 없이 모두 내면에 잠재된 잔인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노우볼 효과"라는 말이 있다. 처음엔 주먹만큼 작은 눈덩이도 계속 굴리다 보면 나중에는 바위처럼 거대해져서 커다란 눈사람으로 변한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간에 반드시 불어나기 마련이다. 하나의 사건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사건이 얼마나 더 끔찍한 사건이  될지 알 수 없다고 해서, 아무 조치도 없이 손 놓고 있어야 할 것인가라고 반문해본다면, 우리 모두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비난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2000년대 들어 학교폭력의 문제는 심각한 사회 이슈로 자리잡았다. 학교폭력이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그 수법이 너무도 잔인해지는데다 가해자들이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데도, 법은 그들이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보호수단으로 작용했을 뿐이다. 학교폭력이 발생할 때마다 국민들의 분노는 커져간다. 미성년자고 뭐고, 이렇게 잔인한 폭력을 저질렀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지만, 여론이 법의 개정을 이끈 사례는 아직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갈수록 청소년 관련 범죄가 급증하고 있지만 현재로는 법적으로 이들을 처벌하기가 불가능하다.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교화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법적 취지와, 미성년자라도 저지른 잘못에 대해 처벌을 가해야 한다는 법 적용의 평등성 사이에서 사회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설령 처벌을 한다 해도 과연 몇 세부터 해야 할 것이냐에 대한 결론도 내지 못한 상황이고 말이다.



<고백>의 살인자들도 13살 소년들이었다. 피해자는 4살 유치원생. 그  어린아이를 죽였음에도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못하는 13살 소년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 있을까?


현재의 실정법으로는 이들을 처벌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죄가 될 수 없다. 무죄가 아니라면 법으로 처벌해야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법이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


이 근본적인 모순 앞에서, 피해자 어린이의 엄마이자 가해자의 스승인 여교사는 경찰에 고발하지 않음으로써 가해자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피해자의 엄마로서 가해자에게 스스로 제재를 가한다. 동시에 반 아이들은 살인자들에게 집단 폭력을 가하고 왕따 시킴으로써 나름의 제재를 가한다. 또한 소년 B가 살인을 저질렀음을 알게 된 B의 엄마는 고통스럽지만 대가를 치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다.


개인, 가족, 학급으로 대변되는 사회. 작가는 <고백>에서, 법이 처벌을 포기한 사건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들이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역설적으로 묻고 있다.


법은 정말로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하는가. 

미성년자가 가해자일 경우, 그 아이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만으로 죄를 면제받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범죄에 있어 "미성년자"는 몇 살까지 규정해야 하는가.


반면, 나이가 어린 만큼 바라보는 시야나 생각하는 범위가 미숙하고 어리석은 것은 어쩔 수가 없는데, 그로 인해 파생된 범죄의 경우는 무조건 범죄의 결과만을 적용해서 벌주기도 애매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경우에 범죄의 결과를, 어떤 경우에 범죄의 동기를 적용해야 한단 말인가. 


작가가 제기하는 의문은 끝이 없다. 

이는 분명 우리 사회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씨름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2023년 들어 더욱 복잡한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가해자 그룹에 '학부모'들이, 피해자 그룹에 '교사'들이 추가된 것이다. 학생들간의 학교폭력도 언어적 폭력, 집단 따돌림, 금품갈취, 물리적 폭력, 사이버 불링 등 갈수록 진화하고 있는판에, 2023년 7월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자살' 사건으로 학부모와 교사간의 정신적, 심리적 갈등이 폭발한 상황이다.


여기에 8월에는 유명 웹툰작가 '주호민'씨의 발달장애자녀 사건으로 학교폭력의 문제가 더욱 수면위로 부상했다. 이 사건에서는 학부모의 갑질 여부 뿐 아니라, 장애학생으로 인한 일반학생들의 역차별 이슈, 특수교사의 고충까지 불거지면서, 촉법소년을 넘어, 처벌기준에 대한 형평성 문제로 사회 담론의 범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는 중이다.


우리 사회의 분노, 불안, 그리고 고민도 그만큼 깊어졌다.



작가가 사회 구성원에게 던지는 진중한 문제제기,

그 해답에 대한 고민은 우리 세대의 책임


피해자라는 이유로 심판자가 되기에는 우리 모두 내면에 어둡고 악한 면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 그렇다고 가해자를 방치할 수도 없다. 설령 그들이 다른 사건을 겪으며 불행한 시간을 지나온 과거의 피해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의 가해자가 된 것을 정당화시켜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있을까. 인간이 만들어놓은 사회 규범은 완벽할 수도, 정답이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어렵고 고통스럽다. 결코 합리적인 방법을 도출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한 상황에서, 우리는 "나는 절대적으로 옳고 너는 절대적으로 틀렸다. 그러니 나의 감정과 나의 상처, 나의 확신만이 소중하다. 너의 존재는 나의 이 모든 것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라고 우리 자신도 모르게 행동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겠다. 책속의 인물들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모습일 테니까 말이다.


소년 A의 부모는 A가 어릴 때 이혼했다. 소년 A는 엄마가 그리웠다. 소년 B의 가정은 화목했다. 소년 B는 엄마의 관심과 친절에 부응하지 못함에 화가 났다. 딸을 잃은 유키는 소년 A와 B, 그리고 학급 아이들의 담임이었다.


가정과 학교, 부모와 선생은 우리의 어린 시절 가치관을 책임졌던 작은 사회와 인물들이다. 소년 A와 B의 행동과 가치관은 분명 이들의 영향이 컸다. 거기에 본인들 스스로 왜곡된 자아관에 휘둘리면서 일이 벌어졌다.


이런 점에서 작가가 소설의 배경을 '학교'로 설정하고, 두 소년 내면을 파헤치면서 각자의 '가족'을 보여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과연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책임이냐고, 바로잡기 위해서는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느냐고, 독자인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말이다.


극 중 인물들이 겪은 비극의 직접적 원인은 마나미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이들의 악함이 언젠간 드러났을 것이다. 마나미 사건이 없었더라도, 다른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개인과 집단은 각자의 기준과 판단을 앞세워 범죄자를 처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피해자냐 관찰자냐, 혹은 가해자냐의 입장 차이만 달라질 뿐.


영화 '고백'의 한 장면.


잘못을 저질렀으면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법이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들 대부분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분노하고 법을 대신해서 심적으로 범죄자들을 처단하곤 한다. 나 또한 그런 적이 많았다. 아마도 이러한 심리는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분노하고, 법이 그들을 처단하지 못할 때 더 분노할  수밖에 없음은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갖는 감정일 테니까.


법을 대신한다면, 개인과 사회는 어디까지 직접 그들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을까. <고백> 속 인물들은 자신들이 직접 벌을 내리기를 원했다. 딸을 잃은 여교사가 그랬고, 학급의 반 아이들이 그랬으며, 살인범의 어머니가 그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엉뚱한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것인가. 억울한 오해를 넘어 참극을 맞게 되는 반장이나, K대학 건물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지. 또한 원하지 않았지만 집단의 선택에 떠밀려 반강제적으로 집단폭력에 동참해야 했을 일부 반 아이들의 정신적 타격은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작가가 던지는 날선 질문들은 그렇게 계속 늘어만 갔다.


가독성이 좋고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는 흥미진진함과는 별개로,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마음은 무거워지는 건 이 때문이다. <고백>은 추리소설이지만 사회고발 소설에 가깝다. 그래서 읽고 나서는 많은 고민을 덤으로 안게 된다.




페이지는 쉽게 넘어간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고, 책장을  넘길수록 긴장감의 강도는 높아진다. <모방범>이나 <용의자 X의 헌신>이 살인 현장을 초반에 상세히 보여주면서 이후로는 심리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반해, <고백>은 살인 현장과 수법을 등장 인물들의 입을 빌려 "증언"하는 형태로만 다루기 때문에 현장을 눈으로 보는 느낌까지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백>은 사건이 사건을 낳고,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다른 사건들을 파생시키면서 마치 서양의 추리소설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의 복선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범인은 알고 있지만 또 다른 인물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점은 이 소설을 다른 일본 추리소설과 구별되게 만든다.


<고백>으로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2009년, 추리소설이 발전한 일본 서점가를 휩쓸며 제 6회 서점 대상까지 휩쓸었다고 한다.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는 소설이다. 2010년엔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주제의식과 촘촘하게 짜여진 스토리 구조를 보면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져야만 했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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