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2005년에 출간된 이 소설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매일 같이 새로운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뒤늦은 열풍은 조금 의외일 수 있다.
하지만 '문화 콘텐츠'라는 것. 그 중에서도 텍스트로 이루어진 '책'은 출간 시기보다 한참 뒤늦게서야 빛을 보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텍스트'라는 것이 정적이고 정지된 성질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텍스트가 모여 만든 하나의 스토리는 생명력이 있어 그 자체로 시간이 흘러도 스스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동적인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은 요즘처럼 콘텐츠의 즉각적인 소비와 반응이 일반화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느리게 소비되고 느리게 피드백을 얻는다. 아무리 미디어가 진화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콘텐츠들이 생산된다 하더라도, 소설이 갖는 잠재력은 변함이 없다. 지금 당장은 미미해 보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예상 못한 폭발력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나손 작가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그렇다. 콘텐츠가 갖고 있는 힘이 돋보이는 이 소설은, 많은 소설들이 자칫 범하기 쉬운, 온갖 미사여구와 말랑말랑한 감성적 단어들을 열거하면서 감정의 과잉을 유도하려는 모습을 500페이지 분량의 내용 중 어디에서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소설은 주인공 100세 노인 '알란'의 현재와 과거를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사건사고들을 기-승-전-결이 깔끔하게 떨어지도록 설계했다. 거기에 온 나라와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는 어마 무시한 사건들을 사소하다는 듯 무심하게 풀어가는 어조로 풀어낸 작가의 기발한 선택은 충분히 신선하게 다가온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다. 100번째 생일을 맞은 주인공 '알란'. 하지만 양로원의 무료한 생활을 견딜 수 없는 그는 자신의 100세 생일날 창문을 넘어 양로원을 탈출해 버린다. 무릎 관절이 아프고 힘이 다 빠져 걸음도 느릿느릿 걷는 늙은이지만, 죽을 날만 기다리며 양로원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는 건 너무 서글프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자기가 저 양로원에 웅크리고 앉아 <이제 그만 죽어야지>라고 되뇐 것은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몸뚱이는 늙어서 삭신이 쑤실지라도, 알리스 원자에게서 멀리 벗어나 실컷 돌아다니는 일이 이 친구처럼 여섯 자 땅 밑에 누워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지 않겠는가? (p.10)
슬리퍼를 질질 끌고, 주머니에 1백 크로나가 들어있는 낡은 재킷을 걸치고, 다리를 후들거리며 탈출을 시도한 주인공의 모습은 비주얼만으로도 웃기다. 100세에 모험을 떠난다니! 그것도 창문을 넘고, 버스터미널과 공동묘지 사이의 돌담을 넘어서.
그래서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그 꼬질꼬질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알란의 모험은 이 단어와 그닥 어울리지 않을 100세 노인이라는 설정 덕택에 자연스럽게 독자의 응원을 이끌어낸다. 제발 저 우스꽝스러운 노인의 말도 안 되는 계획이 어떻게든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즉흥적으로 저지른 탈출이었지만 이후 알란에게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가진 전재산은 1백 크로나였고 어디를 갈지 계획한 것도 없는데, 불량배 조직의 단원으로 보이는 험상 궂은 외모의 젊은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그의 트렁크를 맡긴다. 그러나 젊은이기 가자마자 알란이 타려는 버스가 왔고, 아주 잠시 갈등하던 알란은 트렁크를 가지고 그대로 버스를 탄다. 그것이 그의 운명을 바꿀 줄 알란은 예상하지 못했다.
노인은 자기가 왜 트렁크를 훔칠 생각을 했을까 자문해 보았다. 그냥 기회가 왔기 때문에? 아니면 주인이 불한당 같은 녀석이라서? 아니면 트렁크 안에 신발 한 켤레와 심지어 모자까지 하나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그것도 아니면 자신은 잃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정말이지 이 중에서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다. 뭐, 인생이 연장전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따금 변덕을 부릴 수도 있는 일이지...... 그가 좌석에 편안히 자리 잡으며 내릴 결론이었다. (p. 15-16)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알란의 이러한 선택은 앞으로 그의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를 발칵 뒤집는 사건으로 확대되기 시작한다.
이후 소설의 전개는 배꼽을 잡으리만치 황당무계한 사건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허무맹랑하거나 유치하게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사건의 '나비효과'를 유쾌한 톤으로, 충분히 그럴듯하게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신발과 모자를 기대하며 단순히 불한당 청년의 소지품이 담겼을 거라 여겼던 트렁크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고, 트렁크를 뺏긴 불한당 청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알란을 찾아냈지만 어처구니없게 죽고 만다. 마찬가지로 불한당 청년이 속해있던 조직의 또 다른 불한당 녀석도 코끼리 엉덩이에 깔려 사망하는 등의 식이다.
알란이 여행을 떠나고 불한당들이 찾아오는 과정에서 남은 평생을 함께할 유쾌한 친구들을 계속해서 새롭게 사귀는 동안, 100세 노인의 실종과 연속적으로 발견되는 불한당들의 시신들에 온 나라는 발칵 뒤집혔다. 언론은 100세 노인의 납치사건이 건장한 청년들을 힘으로 제압해서 죽였을 100세 노인의 연쇄살인사건을 다루느라 바빠진다. 경찰인 아론손 반장과 검사 라넬리드 또한 마찬가지다.
알란의 한 순간의 선택은 도미노처럼 퍼져서 절도, 살인, 실종, 불법, 사기, 정보 왜곡, 거짓 보도, 신분증 위조, 뇌물 수수 등 심각한 사회범죄를 야기시킨다.
하지만 이처럼 심각한 사회범죄를 다루고 있는데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분위기는 조금도 우울하지 않다. 오히려 키득거리게 만드는 유머와 사회조직의 부조리, 대중의 우매함 등을 거침없이 풍자하면서 오히려 통쾌함을 느끼게 만든다.
언론이 보도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사건은 얼마든지 조작/왜곡될 수 있으며, 정의를 부르짖는 법조인들은 진실보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데 급급하다. 일에 지쳐버린 경찰 반장은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범죄자 집단(!)인 알란 일행에게 오히려 지지를 보내고, 이 모든 것을 감시해야 할 사회의 구성원들은 눈과 귀가 가려진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삶을 살아간다.
사실 알란이 의도치 않게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905년에 태어난 알란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원자핵 개발, 냉전시대 등 세계사에서 격변의 시기였던 20세기를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20세기 세계사에 등장하는 유명인들과 각국의 정치 경제상황을 알란의 개인사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데, 그것이 너무 그럴 듯해서 허구인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혹시 정말 그런 게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다.
1차 대전 당시 부모를 잃고 어릴 때부터 폭약을 만들며 놀았던 것부터 이미 당시의 시대상을 개인의 삶에 녹여내는 설정은 충분히 개연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런 소설의 설정은 알란이 성장하면서 당시의 국제정세에 맞게,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장군을 구한다거나, 프랑코 장군의 추천서로 여권 없이 자유롭게 미국으로 건너가서 핵폭탄을 개발 중이던 국립연구소 웨이터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당시 부통령인 해리 트루먼과 친구가 되거나 하는 식으로 변주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식이다.
트루먼을 만난 후 어찌어찌해서 중극으로 떠나면서 마오쩌뚱의 아내를 구하게 되고, 또 이후 이란 테헤란의 비밀 경찰 감옥에 갇혔다가 윈스턴 처칠 암살 시도를 막기도 하며, 이후 러시아 과학자 포포프를 따라 모스크바에 갔다가 스탈린에게 반동으로 몰려 블라디보스토크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가, 거기서 마침 아인슈타인의 동생 헤른베르트를 만나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수용소를 탈출해서 김일성 부자를 만나 위험에 빠졌다.
하지만 마침 북한 방문 중이던 마오쩌뚱의 도움으로 발리로 갔는데, 거기서 헤른베르트의 부인 아만다를 정치인으로 만들고, 이후 아만다 부부를 따라 파리로 건너가 통역사로 일하던 중 미국 존슨 대통령을 만나면서 미국 스파이가 되었다가, 러시아 과학자 포포프와 재회해 그를 미국 첩자로 포섭해 엉터리 보고서를 미국에 보고한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냉전을 불식시키고 소련을 무너뜨리게 하는 계기가 된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의 공통점은 그때마다 항상 알란이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알란은 단 한 번도 이런 사건을 의도하거나 계획한 적이 없다. 그저 맛있는 음식과 부드러운 알코올만 있으면 충분할 뿐, 어떤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탓에, 알란의 행보는 언제나 예측을 불허했고, 모든 사건은 그에 따라 발생해버렸다. 우연히. 혹은 의도치 않게. 엉뚱하게. 갑자기.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100살 노인의 양로원 탈출기라는 설정인 내포하는 유쾌함과 한순간의 평범한 선택이 의도치 않게 거대 사건으로 확장되는 구성 자체도 물론이거니와, 그보다 이 책을 더욱 반짝이게 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작가의 "예리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은" 풍자에 있다.
시대를 풍미했던 세계 각국의 유명인사들과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는 거대한 사건들이 사실은 세상과 타인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는, 어찌 보면 '사회 부적응자'의 허술한 거짓말에 휘둘려서 벌어진 일이었다니!
20세기는 전쟁과 휴전, 냉전, 사회주의의 패배 등으로 점철된 투쟁과 대결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느 한편에 서서 자신들의 승리를 갈망했고, 그만큼 상대의 패배를 바랐으며, 그에 따라 머리를 짜내고 또 짜내어 상대를 무너뜨리려 애썼다. 그랬는데 이 모든 게 어느 한 사람의 손에 놀아난 형국이었다면 어땠을까.
결국 온 세상이 알란 한 사람에게 당한 셈이었다. 여기엔 20세기 열강이었던 미국, 소련, 중국, 영국, 스페인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이란, 북한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 소위 각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을 보유한 이들 나라에 보내는 시원한 펀치인 셈이다.
특히 후반부에 러시아 과학자 유리 포포츠와 알란이 미국에 보고한 소련의 거짓 군사정보가 오히려 소련을 무너뜨리고 냉전을 종식시키는 역사적 사실로 연결시키는 부분에서, 요나손 작가가 이 소설에서 의도했던 풍자정신은 최고조에 이른다.
이 미팅 뒤, 여전히 파리에 있는 허턴의 중개로 도착한 첩보 보고서는 소련이 충격적인 미사일 방어 체계를 개발하고 있는 사실을 미국에 알렸다. 알란의 상상력이 이번에는 우주 공간으로 날아간 것이다. 거기서 발사된 소련 미사일들이 미국이 발사한 모든 공격 미사일을 중간에서 정확하게 파괴해 버린다는 놀랍고도 신기한 이야기였다.
이렇게 하여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미국 첩보 요원 알란과 역시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련 핵물리학자 유리는 소련 붕괴의 초석을 깔았다. 왜냐하면 성질이 보통 아닌 로널드 레이건은 알란의 보고서를 읽는 순간 뚜껑이 열려버렸고, 당장 <스타워즈 계획>이라고도 불리는 <전략 방위 구상> 프로젝트를 착수했기 때문이다. 적 미사일을 위성에서 발사된 레이저빔으로 요격한다는 프로젝트의 내용은, 몇 달 전 알란과 유리가 모스크바의 한 호텔 방에서 적당량의 보드카를 마신 뒤 킥킥대면서 지어낸 소설의 복사판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미국의 국방 예산은 천문학적으로 치솟았다. 가뜩이나 형편이 어려운 소련도 황새 따라가는 뱁새인 양 미국을 흉내 냈다. 그 결과 온 나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p.471)
국가 정보 중에서도 최고기밀인 국방부 정보가 일개 두 개인의 거짓말에 놀아난다거나 그로 인해 세계 강대국의 서열의 바뀐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게다가 이것 때문에 소련은 무너졌는데 오히려 그런 거짓보고를 일삼은 알란과 포포츠는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은 채 오히려 유유자적하며 평화로운 여생을 보낸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실현 불가능하고 과장스러운 설정은 소설을 읽는 내내 조금도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책장을 넘길수록, 온 세상을 향해 통쾌하게 펀치를 날리는 작가의 패기에 더욱 반해버릴 뿐이다.
프랑스 주재 인도네시아 대사였던 아만다 아인슈타인과의 일화도 마찬가지다. 헤른베르트 아인슈타인(우리가 알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이복동생)과 그의 부인 아만다 아인슈타인은 사실 가상의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은 알란이 과거에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로, 특히 정치인을 바라보는 작가의 풍자적 시선이 아만다라는 인물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극 중 '뉴런이 거의 작용하지 않는 (거의 저능아 수준의) 바보'로 태어났음에도, 알란의 거짓 통역 덕분에 그녀는 인도네시아 본국은 물론 프랑스에서도 우아하고 교양 있는 정치인으로 인정받는다.
우선 드골 대통령은 아만다 아인슈타인 대사의 경력부터 물어보았다. 아만다는 자신은 원래 구제불능의 멍청이였는데, 뇌물을 적절히 사용하여 발리의 도지사로 선출되었고, 그 다음에는 여기저기에 기름칠을 잘한 덕분에 두 차례나 선거에서 성공했다고 대답했다. 또 여러 해 동안 온 일가친척과 함께 자신의 직업이 가진 이점을 십분 이용하면서 잘 살아오고 있던 중, 갑자기 수하르토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와 파리 주재 인도넹시아 대사 자리를 제의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난 사실 파리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잘 몰랐어요. 그게 도시가 아니라 어떤 나라라고 생각했죠. 세상에, 이렇게 웃기는 얘기를 들어보셨나요, 호호호!"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모국어로 얘기했고, 수염이 무성하고 머리칼은 더욱 무성한 통역사(알란)는 이를 영어로 통역했다. 물론 그 내용은 세심하게 걸러서 전달했다.
오찬이 끝났을 때 두 대통령은 마침내 한 가지 점에서 의견 일치를 보았다. 둘 다 아만다 아인슈타인 대사는 매우 유쾌하고 교양 있고 재미있고 총명한 여성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보르네오 섬의 미개인 같은 남자를 통역으로 고른 걸 보면 돔 더 세련된 취향을 가질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p.391-392)
언론에 의해, 미디어에 의해, 거짓 정보에 의해, 그 사람의 본 모습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대중들은 그 왜곡된 이미지를 진짜로 믿고 받아들인다. 때문에 우매한 것은 미국, 소련 같은 강대국뿐이 아니라, 여러 가지 포장된 홍보문구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거짓 이미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대중들도 마찬가지다.
인도네시아 국민들이 그녀에게 보내는 열렬한 지지, 스탈린과 김일성을 절대적인 정치인으로 받아들이는 그 나라의 국민들의 모습이 그렇다. 비단 정치인뿐이랴. 미디어가 발달한 요즘, 사회의 모든 유명인사들은 결국 미디어가 만들어낸 스타, 더 정확히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로 성공한 스타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왜곡되기 쉽다. 진실이 그대로 보도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각색/편집된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복수 전공했는데, 언론학 개론 첫 시간에 배운 내용은 "뉴스의 게이트키핑", 즉 뉴스를 위한 정보의 취사선택과 그 과정에서 얼마든지 사실이 변형, 왜곡될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우리가 접하는 뉴스는 사실을 100%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무엇을 보도할 것인가라는 기준에 따라 취사선택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이미 뉴스는 엄밀히 말해 객관성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란의 과거와 현재는 의도하지 않은 거짓에서 시작해서 의도한 거짓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세상은 속는다. 과거에도 속았고 현재에도 속는다. 과학기술이 급속히 발달하고 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 접어들었음에도 세상은 100살 된 노인에게 또 당하고 만다. 신발과 모자를 기대하며 순간적으로 거액이 든 트렁크를 훔쳤고, 이후 <네버 어게인> 조직원 '볼트'는 실수로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또 다른 조직원 '양동이'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죽였다. 코끼리에 압사당하도록 양동이를 유도했으니까. 모르고 했던 선택 때문에 실수로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 그 다음엔 의도적으로 다른 살인을 추가했으며, 그 다음엔 알란이 만난 친구들까지 모두 합세해서 거짓으로 라넬리드 검사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검사는 이들의 조작된 시나리오에 완전히 넘어간다.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알란을 포함한 10명이 스웨덴을 떠나 여권이 없어도 돈만 내면 받아주는 인도네시아 덕분에 발리에서 훔친 트렁크의 돈으로 호화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으로 맺는 결말은 현실에 적용해보자면 가장 끔찍한 결말이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편안한 삶을 보내고, 세상은 조작된 정보를 믿으며 그 결과 역사 속엔 가짜가 진짜의 자리를 대신한다. 원칙과 신념대로 일을 하면 돌아오는 것은 '엿'과 '똥'일뿐이다. 21세기에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돈'이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작가는 결말 부분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빌어먹을 스웨덴의 관료주의, 엿이나 처먹어라!" (p.478)
"빌어먹을 독일의 관료주의, 똥이나 처먹어라!" (p.479)
"발리는 모든 게 가능한 곳이지." (p.482)
돈이 만능이 된 시대. 하지만 그렇다고 20세기는 괜찮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21세기의 돈의 자리를 20세기에는 사상과 이념이 차지했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우매하게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아니, 역사 속 어느 시대를 대입해보아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신분제가 존재했던 시대에는 대중이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
그래서 사회적 범죄를 일으킨 알란 일행이 현실로 나온다 해도 같은 결말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엔딩은 곱씹을수록 씁쓸하고 아프다.
책을 읽는 내내 10년 전에 읽었던 레너드 위벌리의 <그랜드 펜윅 시리즈>가 생각났다. 세계지도에 나타나지도 않을 정도로 지극히 작은 약소국 그랜드 펜윅이 자금원조를 위해 가짜로 미국에 뉴욕 침공 선전포고를 했는데 정말로 이기게 되면서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그로 인해 미국과 소련 같은 열강들이 그랜드 펜윅을 중심으로 한 중립국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는 황당무계한 내용들이 역사적 사실과 잘 버무러 진 통쾌한 풍자소설이었다.
하지만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그랜드 펜윅 시리즈>보다 풍자의 정도나 범위가 더 강하다. 단지 강대국들만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랜드 펜윅 시리즈>에 비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국가(강대국, 약소국 할 것 없이), 개인(유명인, 일반인 할 것 없이), 대중과 사회, 미디어,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가리지 않고 모두 싸잡아 비판한다.
심지어 주인공인 '알란'마저도 작가에게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말의 윤리의식도 없는 100살 노인이 "지극히 평범하고 힘없는 보통사람 중 한 명"이라는 설정부터가, 대중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대변한다. 여기에는 작가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기 반성도 깔려있다.
결국 흔히 생각하는 강대국, 정부, 국가의 체제원리나 사상 이념 등에 대해 우리는 핏대를 세우며 비판을 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 자신 또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모르고 있는 상황. 타인을 향한 비난과 비판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왜곡되고 조작된 거짓에 현혹된 것인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재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풍자소설의 전설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나쓰미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21세기 버전일 수 있겠다. 미치광이 '돈키호테'를 통해 세상을 향해 조소를 날리던 세르반테스와, 한낱 고양이의 눈과 입을 빌어 인간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직설화법으로 풀어냈던 소세키가 읽었다면 눈물을 흘리며 폭풍 공감했을 소설이었다.
동시에 풍자소설임에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아등바등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제시한다. 이야기를 되새길 수록 삶에 대해 힘을 빼고 편안히 받아들이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선명히 다가오는 책이다.
100년 동안 무수한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노인이 여전히 간직한 삶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은, 소설이 지닌 풍자적 성격과는 별개로,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설득적으로 전한다. 이 책이 전 세계에서 그토록 놀라운 인기를 얻은 건, 이런 부분이 한 몫 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
이 말에 내포된 의미 중 하나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적어도 타당한 이유 없이는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는 거였다. (p.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