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수많은 대중문화 콘텐츠가 연일 쏟아져 나오는 시대지만, '진정성'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작품들은 많지 않다. 방송, 영화, 공연 등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자본 권력이 절대화된 산업구조 상, 작가나 감독, 출연진이 소신을 지키면서 끝까지 작품을 완성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 TV 드라마는 더욱 그렇다. 단기적으로 '시청률'에 기댈 수밖에 없는 방송산업 구조에서, 드라마는 말초적이고 가벼운, '스낵 컬처'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장르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대다수 드라마가 이렇게 흘러가는 상황에서도, '진정성'을 느꼈던 몇몇 드라마들이 있다. 2011년 가을에 방송된 <뿌리 깊은 나무>는 드라마가 종영된 지 4년 여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안에 담겨진 진정성이 (아직은) 의심되지 않는 경우에 속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우리 역사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인 세종대왕과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문화유산인 한글 창제를 다룬 작품으로, "많은 이들의 수고와 희생을 바탕으로 창제된 한글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또한 극 중 인물인 이도(혹은 세종대왕)의 무리와 한글 반포를 저지하려는 정기준과 밀본집단 간의 대립을 통한 현실 정치의 풍자 또한 이 드라마를의 한 축을 담당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시간이 지났어도 <뿌리 깊은 나무>를 여전히 매력적으로 기억하게 하는 부분은 인물 설정과 대사를 통해 나타난 '타인과의 소통'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었다. 한글 창제는 바뀔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고, 현실 정치 풍자는 어찌 보면 '말'이기 때문에 쉬울 수 있다.
반면,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소통'의 문제는 진지한 고민 없이 섣불리 외치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 그만큼 어찌 보면 이 주제는 더 어렵고 무거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뿌리 깊은 나무>가 이 부분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작가가 진심으로 고민을 거듭한 덕분임에 분명하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초반부의 집현전 살인사건 부분만 소설의 내용을 따르고, 중반 이후부터는 한글을 지지하는 세종(이도, 한석규 분)의 세력과 이를 반대하는 정기준(윤제문 분) 세력 간의 대결이라는 오리지널 스토리로 진행된다.
이도와 정기준은 통치관에서 상반된 입장에 서 있는 인물들이다. 우매한 백성을 교육시켜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이도와, 권력을 잘 조절할 수 있는 똑똑한 지도자가 우매한 백성 천명보다 낫다며 군주정치를 주장하는 정기준은, 자신들의 정치신념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한글 창제'를 추진하고 막으려고 온갖 애를 쓴다.
그런데 서로의 주장이 다르다고 해서 소통의 방식까지 달랐던 건 아니다. 자세히 보면, 처음에는 이도 또한 정기준 일파처럼 상대방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칼을 내세웠다.
18화 엔딩 장면에서 연결된 19화 시작 장면은 이도와 기준의 호위무사들인 무휼과 개파이가 서로를 향해 칼을 대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가리온은 자신이 정기준임을 이도에게 밝히고 두 사람의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된다.
어린 시절의 악연을 다시 만나는 장면. 그것도 정도전이라는 조선 건국에 큰 공헌을 했던 전설적 인물의 손자가 최하층민인 백정으로 신분을 속이며 왕의 옆에 있었다는 설정 등은 그동안 여러 콘텐츠에서 익히 보았던 ‘정체가 밝혀질 때의 긴장감을 강조하는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어두운 밤 배경, 긴장감을 배가 시키는 BGM, 두 인물의 상반된 표정 (놀라움 vs 비웃음), 칼을 맞대고 서있는 상황 등이 그렇다.
게다가 이 장면(scene)의 시간이 무려 25분 이상 계속된다. 이는 작가의 전작인 <선덕여왕>에서 미실과 덕만의 토론 장면에서도 비슷하게 표현된 바 있는데, 장면의 빠른 전환과 편집을 중요시하는 드라마의 문법에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표현이다.
이 장면이 중요한 또 다른 요소는 인물들의 배치 및 이도와 정기준의 대화다. 먼저 이 장면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을 보면, 이도(임금), 무휼(임금의 호위무사), 소이(백성, 임금의 프로젝트를 진행), 채윤 (백성, 소이를 위해 임금을 도움), 정기준(사대부이자 백정, 임금을 반대), 윤평 (정기준의 호위무사), 개파이 (외국인 무사, 밀본조직을 위해 정기준을 호위)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세종(이도)-무휼-소이-채윤] 그룹과 [정기준-윤평-개파이] 그룹으로 나뉘어 한글을 놓고 대립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각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신분이나 배경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세종 편인 채윤(똘복, 장혁 분)은 임금을 돕고 있으나 소이(분이, 신세경 분)만큼 임금의 신념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가 이도를 도왔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어릴 적 억울하게 죽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소이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반면 소이는 채윤을 사랑하지만, 우선순위는 어디까지나 한글 프로젝트다. 무휼에게 한글 창제는 자신의 주군인 이도를 따르다 보니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프로젝트일 뿐이다.
정기준 그룹도 마찬가지다. 정기준은 사대부 출신이고 밀본의 수장이지만, 가리온으로 위장해 살면서 최하층인 백정의 신분으로 살고 있다. 윤평(이수혁 분)은 정기준을 무조건적으로 따른 인물이고, 개파이(김성현 분)는 정기준이라는 인물보다는 밀본이라는 조직을 더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분차에 따른 각자의 처한 입장이 다르다 보니, 우선순위와 가치관이 서로 다른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드라마 속 인물들은 모두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칼을 겨눈다.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상대. 그를 향해 칼을 드는 극 중 인물들. 이는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 어떠한지를 은유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장면인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 마음에 공감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소통’이라고 부른다. 소통은 어느 특정 시대만이 아닌, 역사 속에서 인류가 계속해서 도전하고 노력했던 부분이었다.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졌던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역사에서 소통이 괜찮게 이루어졌다고 흔히들 생각하는 시대가 조선 세종조 시절이 아니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시대를 태평성대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평가가 사실이었는지 여부는 뒤로 한 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고 있는 세종조 시절을 끌고 와서, 소통이 사라진 현대 시대에 “우리는 진짜로 소통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19화 초반, 정체를 밝힌 가리온을 마주한 이도는 한글 창제를 막겠다는 정기준을 향해 “좋구나, 좋아. 그럼 어디 한번 나와 얘기를 해보자꾸나.” 하면서 갓을 벗고 자리에 앉는다. 갓을 벗는다는 행위는 왕이라는 신분을 내려놓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겠다는 뜻이다. 게다가 대놓고 “얘기하자”며 소통을 시도한다. 이에 정기준 또한 소통하려고 노력하겠다는 표시로 이도를 마주하고 앉는다.
그렇다면 소통을 시도하려는 이 두 사람의 노력은 과연 진짜였을까.
두 사람은 아까부터 상대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자신들의 호위무사에게 칼을 내리게 하지 않는다. 지위고하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 얘기를 하자며 마주 앉아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이들의 진심은 호위무사들이 들고 있는 칼이다. 여차하면 베어버릴 수 있는 거리에서 상대에게 칼을 든 채, 이도와 정기준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를 시작한다.
이 때 카메라는 대화를 시작하려는 두 사람 뒤에 있는 호위무사들을 잠깐 동안 클로우즈 업하는데, 이 때 무휼은 개파이에게 “네 놈은 나와 얘기를 해야지”라고 말한다. 또한 카메라는 이들의 대화 중간중간에 칼을 겨누고 있는 무휼과 개파이를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무휼과 개파이가 이도와 정기준의 내면을 상징하는 것이 선명히 드러난다. 겉으로는 갓을 벗어던지고 얘기를 하자고 하지만, 실제로는 칼을 들고 얘기하겠다는 것이다.
칼과 소통은 모순된 단어다. 성군이라고 여겨지는 세종도 소통을 내세우지만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은, 결국 소통을 노력하지만 진짜로는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혹은 소통하는 법을 모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발이 아니었을까.
두 사람의 토론 대사를 살펴보면 이는 더욱 확실해진다. 이들의 끝장토론 장면만으로 한 회의 1/3 이상을 채워 화제가 되었던 19회에서 두 사람의 대화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이도 : 그래 인정한다. 또한 이 조선은 이씨가 세운 것이 아니라 신진 사대부들과 성리학 자들이 이씨를 옹립하여 세운 나라인 것도 내 인정을 한다. 하지만 너희 사대부는 결국 부패하게 될 것이다. 사대부들은 그들의 능력만큼 욕망을 갖게 될 것이고 또한 기득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득권을 세습하려 할 것이다. 왜? 사람이니까. 이해한다. 내기를 해도 좋다. 사대부는 훗날 고려 후기 너희들의 손으로 깨부순 그 더러운 음서제도를 부활시키고 고인 물처럼 냄새를 피우며 썩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대부가 그리 되지 않도록 그 욕망을 누가 견제할 수 있겠느냐? 임금은 늘 견제당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한계가 있다. 하여, 나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 역할을 하게 하려 한다. 백성이 힘을 가지고 권력을 나누게 되는 새로운 균형, 새로운 질서, 새로운 조화다. 해서, 나의 글자가 그런 새로운 세상의 작은 시작이 될 것이다.
기준 : 사대부의 욕망이라... 허면, 백성의 욕망은?
이도 : 욕망? 백성의 욕망이라고 했느냐?
기준 : 그래, 백성의 욕망. 그 거대하고도 무서운 군중의 욕망, 그걸 어찌할 것인가. 누구라도 권력의 정점에서 만나게 된다는 거대한 백성. 바다와도 같은 거대한 백성 말이다. 더 정확히, 거대한 백성의 욕망이지.
이도 : 그래, 나도 만났다.
기준 : 백성의 들끓는 거대한 욕망, 그걸 만나면 공포에 질리게 된다. 왜? 그 욕망들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왜? 그 욕망들이 모두 한꺼번에 풀어지면 세상은 지옥이 될 테니까. 그것을 제대로 만난 것은 바로 진시황이다. 그는 강력한 법률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다. 하지만 그걸로 되지 않아. 해서! 공자와 맹자가 필요한 것이고 또 주자가 나온 것이다. 무섭고 거대한 백성의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서역 대진국이 기리사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도, 삼한과 고려가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것도 그 욕망 때문이었어. 불교도 유학도 서역의 기리사독도 모두 이름만 달리 했을 뿐 욕망 통치체계에 다름 아니었다. 헌데, 너의 글자는 그 욕망 통치체계를 무너뜨리려 한다. 지옥문을 열고 있는 것이야.
이도 : 그것을 어찌 지옥이라고만 하느냐? 백성이 글을 배워 삼강을 알고 오륜을 알게 되면, 사람의 도리를 알고 성리학적 이상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그것이 지옥이냐?
기준 : 백성이 글을 알면 읽게 되고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즐거움을 알게 되면 결국 그들은 지혜를 갖게 된다. 누구나 지혜를 갖게 되면 쓰고 싶어 진다. 무엇을 위해 쓰겠는가? 욕망이다.
이도와 정기준은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생각을 일부 인정했다. 하지만 무휼과 개파이가 계속 칼을 들고 있듯이, 이도와 정기준이 서로를 인정하는 것은 진심이 아니다. 이도는 내기를 해도 좋다며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자신만만해하고, 기준은 그런 이도의 생각은 지옥문을 열게 한다고 단정한다.
칼을 들고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다. 서로를 인정하는 것 같다가도 마지막엔 자신의 잣대로 판단함으로써 끝난다.
토론 후반부에 정기준이 이도에게 “넌 이제 백성이 귀찮은 것이다”라며 공격하는 순간 카메라는 강채윤이 임금을 구하러 달려오는 컷으로 잠깐 넘어간다. 뒤따라 정기준 편인 윤평도 달려온다. 상대가 감추고 싶은 진심을 건드리며 공격했을 때 이도의 마음은 또 다른 칼(강채윤)을 불러들이고, 정기준 또한 기다렸다는 듯 준비해둔 또 다른 칼(윤평)을 불러들인다.
이는 이도와 정기준의 소통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도는 결국 “네 놈이 감히!”라고 외치며 군주라는 우월적 지위를 내세운다. 그러자 그 순간 정기준의 또 하나의 칼이었던 윤평이 나타나 이도의 목을 겨눈다. 칼이 하나 더 많은 정기준을 향해 이도는 “난 아직 할 얘기가 더 있다”고 외치지만, 더 이상의 소통은 불가능해졌다.
정기준은 말한다.
“난 말이다. 그 글자를 아는 모두를 다 죽일 것이다. 그리고 이 글자의 해례를 찾아 없앨 것이야. 너의 글자는 역병과도 같은 무서운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낼 것이야. 잘 가라 이도.”
이도 또한 정기준과 같은 시점에 또 다른 칼(강채윤)을 꺼내 들고 있었다. 마침 그 순간에 이도의 편인 강채윤이 나타난 것은 드라마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일 뿐.
강채윤이 등장하면서 카메라는 다시 이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 사람씩 빠르게 클로우즈 업한다. 각자의 위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은 두 팀으로 나눠져 대립하고 있지만, 각자의 팀에서도 진정한 소통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들을 묶어주고 있는 것은 대화가 아닌 칼이었기에.
같은 집단에서도 그럴진대 서로 다른 집단끼리는 어떠할까. 등장인물들의 신분이 보여주고 있듯이 사회나 조직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다. 슬프게도, 그런 사람들이 서로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뭉쳐있는 이유는 소통을 통해 타인을 이해한 덕분이 아니라 칼이 두렵기 때문인 경우가 허다하다.
오늘 날의 많은 미디어가 툭하면 토론을 외친다. 언제부턴가 선거철이 되면 TV토론은 당연해졌고, 개인들도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과연 소통은 있는가. 아니, 소통은 과연 가능한가. 우리는 진짜로 소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가. 소통하겠다는 의도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실은 소통할 생각도 의지도 없으면서, 소통을 가장해서 자신의 칼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가.
<뿌리 깊은 나무>는 한글 창제라는 역사적 사실을 다룬 것 외에도, 소통의 측면에서 다양한 알레고리를 숨어놓은 작품이다. 칼의 균형이 맞춰졌을 때야 이도는 비로소 “다시 토론하자”고 말한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칼을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내 놓고 말이다. 그에 대한 정기준의 대답은 “윤평, 이도를 죽여라.”였다. 이로써 갓을 벗어던지고 서로 차분히 앉아 말하던 연극은 완전히 끝났다. 이후 드라마는 소통보다는 칼이 난무하는 전개로 흘러간다.
19화의 칼의 대립을 끝낸 건 소이였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작가가 가장 찬양하는 인물은 세종 이도가 아닌, 소이다. 그녀는 진정한 소통을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물을 상징한다. 소이는 어릴 적 겪은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로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벙어리’라는 설정은 소통하고 싶지만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던 소이가 말을 하기 시작한 건 자신 때문에 위기에 처한 채윤 앞에서였다(13화). 채윤을 위기에 빠뜨린 윤평의 칼과 그런 채윤을 구한 소이의 ‘말’을 대비시킴으로써 작가는 진정한 소통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담아내고 있었다.
13화에서 채윤과 윤평의 칼의 대립을 멈추게 했고, 19화에서도 소이는 이도의 팀과 정기준 팀의 대립을 중지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24화에 이르면 작가는 소이의 죽음을 통해 소통에 대한 자신의 진지한 탐구를 보다 분명하게 전한다.
소이는 그 자체로 훈민정음 해례였다. 밀본 조직원에 의해 독화살을 맞고 죽어가면서도 소이는 자신의 치마를 찢어 훈민정음을 써 내려간다. 이는 글(또는 말)을 통해 대화하고 그럼으로써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소통의 노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소이의 희생이었고, 작가의 외침이었다.
특히 소이가 치마에 해례본을 쓰는 동안 독화살을 맞은 팔에서 피가 나오는 장면은 19화의 이도와 정기준 간의 대립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보여주는 은유적 장면이다.
흰 색 치마 위에 한글이라는 소통의 도구를 적어가는 소이. 검은 먹물로 흰 치마 위에 적힌 훈민정음. 그리고 그 옆에 묻은 피. 하지만 붉은 피는 치마를 채워가는 훈민정음을 지울 수 없다.
채윤은 소이를 사랑했던 인물이지만,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소통을 꿈꾸던 소이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소이가 죽어가면서 해례본을 쓰고 있던 중이도, 채윤은 소이를 찾으러 온 산을 헤매고 다닌다.
이는 소이의 꿈을 이해하기까지, 그리고 타인과의 온전한 소통을 배우기까지 채윤이 겪은 시행착오와 긴 여정을 뜻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소이가 해례본을 완성했을 때 소이를 찾은 채윤은 소이의 죽음을 보며 그제야 소이의 뜻을 정확히,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24화의 훈민정음 반포식은 피의 향연이었다. 19화에서 예고한 대로 정기준은 새로운 글자(소통의 도구)를 막기 위해 칼을 들었고, 개파이는 무휼을 죽인다.
그런데 무휼과 개파이가 싸우는 이 장면에서 극 중 인물들 반응이 생각보다 덤덤하게 표현되는 것이 재미있다. 이도와 정기준은 물론이고, 궁녀들이나 대신들, 백성들까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형식적인 비명만 지를 뿐 이들의 싸움을 구경하듯이 보고 있다. 막방으로 갈수록 촬영 시간이 빠듯해지는 국내 드라마 제작환경의 문제가 원인이었겠지만, 이것을 소통의 측면으로 보자면 칼을 들고 싸우고 대립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반증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글을 몰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없었던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이라는 새 글자가 반포되는 것만큼 설레는 것이 또 있을까. 이는 이제부터는 글과 말로 나의 생각을 표현하고 너의 생각을 듣겠다는, 다시 말해 이제부터는 칼로 인한 대립이 아닌 대화를 통한 소통을 시작하겠다는 모두의 의지가 결집된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조차 칼은 여전히 위력적이고, 자신들의 의지를 비웃는 피바람 앞에서 사람들은 격렬히 거부하기보다는 방관자적 입장만을 취한다. 이는 현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다.
무휼을 죽인 개파이가 이도를 향해 칼을 내미는 순간 채윤이 나타난다. 19화에서 보듯, 채윤은 이도의 숨겨진 본심, 즉 나와 다른 타인을 대함에 있어 칼을 사용하겠다는 익숙한 습관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채윤의 등장은 자신의 첫 번째 칼인 무휼이 죽자 두 번째 칼을 불러들인 이도의 선택을 의미한다.
하지만 채윤의 품속에는 소이가 적었던 해례본이 있었다. 개파이가 채윤의 가슴을 칼로 베는 순간, 채윤의 품에 있던 소이의 해례본이 흩날리며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온다.
채윤은 소이의 죽음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고 자기 자신의 고집과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는, 즉 자신이 죽는 과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소통이란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것으로, 말로만 외쳐서 이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절대 아니다. 채윤은 개파이와 싸움을 끝으로, 그 칼을 땅에 떨어진 해례본 위에 꽂는다. 이는 채윤의 결단임과 동시에 이도의 결단이다.
실제 역사에서 훈민정음 반포현장은 피로 물들지 않았다. 따라서 <뿌리 깊은 나무> 엔딩에서 보여준 피의 향연은 역사 왜곡의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칼의 역사에 대한 단죄와 진정한 소통을 시작하자는 작가의 외침이 담겨있는 알레고리로 읽혔다.
개파이가 죽은 뒤, 아직 숨이 남아있는 무휼에게 달려간 세종이 무휼을 구하려 할 때 무휼은 세종에게 말한다.
“전하, 멈추지 마시옵소서. 무사 무휼에게는 소신의 길이 있고 전하께서는 전하의 길이 있사옵니다. 자리로 돌아가시옵소서.”
칼의 역사를 끝내고 소통의 역사를 시작하려고 결심한 세종에게 무휼은 그 결심을 멈추지 말라고 말했다. 그것을 위해 칼의 역사를 대변했던 무휼은 사라져야 한다. 채윤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한글 창제를 너무 피로 물든 사건으로 그렸다는 점과 극 중 인물들을 너무 많이 죽였다는 점을 들어 <뿌리 깊은 나무>의 엔딩에 실망을 표하곤 했었다. 그러나 상대를 포용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우리 모두를 향한 반성과, 그것이 비록 쉽지 않은, 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 노력을 포기하지 말자는 작가의 바람을 위해서, 이들 캐릭터는 죽을 수밖에 없었고 죽어야만 했다.
세종 또한 충신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묵묵히 훈민정음을 반포한다. 방금 전까지 피로 물들었던 장소에서 백성과 왕, 신하들은 모두 너무도 태연히 새 글자를 반포하고 새 글자를 읽는다. 소통이 조금씩 시작된 것이다.
방금 전까지 서로 죽고 죽이던 자리에 순식간에 평화의 기운이 감도는 것은 소통이 가진 힘이다. 그 소통이 칼을 들었던 자기 자신을 죽이는 고통스러운 결단을 지나야 가능하다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이도와 정기준의 대립에서 결국 이도가 승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정기준은 해례본이 퍼지고 이도가 죽어가는 무휼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기로 결심한 상황에서도 새로운 칼을 빼들었다. 끝까지 타인을 포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한 정기준 또한 작가가 이 드라마에서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라져야 했다.
세종과 정기준의 마지막 독대 장면에서 이런 당위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칼을 버린 이도는 정기준을 더 이상 미워하거나 대립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덕분에 백성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대사에는 정기준 또한 이도가 사랑해야 할 백성에 포함하겠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칼을 버리지 못한 정기준은 이도의 이러한 소통의 손짓을 거부하며 죽어간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대화 중 일부는 아래와 같다.
이도 : 고맙구나! 나는 너 때문에 백성을 사랑하게 되었다.
기준 : 그래! 당신은 그럴 거야! 헌데, 다른 위정자들은, 지배층들은 그러지 않을 테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지. 집에서 기르는 개를 보면서 ‘저 개가 내 말을 알아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의 글자는 위정자와 지배층에 그렇게 이용될지도 모른다. 무릇 백성은 어리석어 보이나 지혜로서 속일 수 없다 했어. 허나 그 말은 어쩌면 오히려 어리석기 때문에 속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바위를 속일 수 없는 것처럼. 헌데 너의 글자로 지혜를 갖게 된 백성은 속게 될 것이다. 더 많이 속게 될 것이고 이용당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개새끼처럼...
이도 :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그들은 결국 그들의 지혜로 길을 모색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매번 싸우고 또 싸워 나갈 것이다. 어떤 땐 이기고, 어떤 땐 속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지기도 하겠지. 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역사니까. 또 지더라도 괜찮다. 수많은 왕족과 지배층이 명멸했으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수만 년 동안 살아왔으니까. 또 싸우면 되니까.
기준 : 이제 주상의 말이 맞기를 바라는 수밖에.
이도 : 전에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지.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래, 그때는 정말 그런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었다. 헌데 이제는 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야. 여기가 이렇게 아픈데. 그것이 어떻게 사랑이 아닐 수가 있겠느냐? 고맙구나, 정기준. 고맙구나!
무휼과 채윤의 죽음 앞에서도 울지 않았던 세종이 기준의 죽음 앞에서 울었던 것은 연민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민의 눈물은 여전히 칼을 앞세워 대립각을 세우고 소통의 노력을 하지 않으려는 현 시대와 우리 모두를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과도 같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계속해서 싸우는 중이다. 남북으로 갈라져있는 분단국가이면서, 동서로 갈라져 지역갈등이 계속되어 왔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세대 간의 갈등과 남녀 간의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 갈등의 집단이 점점 더 세분화되는 추세다.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의 마음을 공감하려는 노력, 나아가 상대를 끌어안으려는 노력이 상실된 시대. 그것이 현재 2015년의 한국사회 모습이고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그러나 지금도 사람들은 싸운다. 내가 아닌 당신의 잘못이라고 싸우고 헐뜯는다. 극 중 정기준이 말한 대로, 글자를 배운 사람들이 이제는 그 글자를 칼로 사용하고 있는 슬픈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때문에 <뿌리 깊은 나무>는 단순히 한글만을 찬양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리 훌륭한 한글이라도 그것을 칼로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아픈 결과를 가져오는지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과 글을 더 이상 상대를 헐뜯고 비방하는 칼로 쓰지 말자는 것. 대신 대화의 수단으로 되돌리자는 것. <뿌리 깊은 나무>는 이 모든 것을 한글 창제와 그를 저지하려는 세력 간의 갈등구조를 통해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였다.
이 외에도, 어린 시절, 누명을 쓰고 죽어가던 아버지가 아들 채윤(똘복) 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글조차 쓸 수 없어 옆에 있던 양반이 대신 써주던 장면이나, 그런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방금 배운 한글로 땅에 쓰는 채윤과 그런 채윤의 마음을 땅에 쓰인 글자를 읽으며 알게 되는 소이의 모습(15화)의 장면 등. 드라마는 중간중간 끊임없이 이러한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15화에서 땅에 글씨를 쓰며 채윤은 속으로 “이게 정말 가능한 거야? 정말로 모두가 글을 쓰는 세상이 올 수도 있는 건가?”라고 묻는다. 이는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정말로 모두가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는, 온전히 소통하는 세상이 올 수 있느냐고 말이다. 이러한 작가의 물음은 드라마의 전반적인 스토리텔링과 곳곳에 배치된 상징이나 은유적 표현을 통해 진정성 있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드라마가 대책 없는 긍정의 메시지나 교훈적인 어투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밀본의 4대 수장이 세워지고 새 글자를 천한 사람들이 쓰는 언문으로 만들자는 계획을 세우든 이들의 모습이 비치면서, 서로가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은 여전히 많은 난관을 각오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메시지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의 씨앗은 심겨졌다. 궁궐에 피어있는 작은 노란 들꽃을 통해 작가는 작게나마 소통의 꽃을 피우게 될 세상을 꿈꾸고 있음을 표현했다.
무휼도, 소이도, 똘복이도 없는 낯선 곳은 진정한 소통을 위해 칼을 내려놓기로 결단한 이후부터 세종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다. 소통을 이루는 길은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다. 아직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간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길의 곳곳에는 노란 들꽃이 심어져 있다는 것.
이 장면 이후 등장하는 소이와 채윤의 상상씬은 어디까지나 시청자를 향한 보너스 장면일 뿐이다. 이 드라마의 진짜 엔딩은 이 노란 꽃이 나오는 장면이었고, 이는 소통을 꿈꾸는 작가의 진심을 압축시켜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드라마 제목인 <뿌리 깊은 나무>는 원작에서 따온 제목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이 들꽃이 뿌리를 내리고 강한 영향력을 전하는 세상을 고대하는 작가의 꿈이 담긴 제목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이 들꽃 장면 덕분이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노란 들꽃 장면에서 한글이 상징하는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cf)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계층간의 소통을 다루었다면, 영화 <인턴>은 세대간의 소통에 집중한다.
영화 <인턴>리뷰 보러가기 --> https://brunch.co.kr/@jhwhjn/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