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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비키 Oct 06. 2015

얼굴, 그것의 완성

에세이 '빈센트 반 고흐, 내 영혼의 자서전'


본 리뷰는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것으로, 혹시라도 고흐를 좋아하시는 독자분들이 불편하게 읽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약간만, 고흐의 '성품'이 불편하게 와 닿았다는 뜻으로 쓴 글이니까요. 그의 그림은 당연히 좋고요^^




오랜만에 예전 싸이월드에 적어두었던 글을 보다가, 반 고흐 에세이에 대한 리뷰를 발견했다. 온라인 상에 적어둔 최초의 리뷰였을 것 같은데, 엄밀히 말하면 리뷰라기 보다는 일기에 가까운 글이었다.


그때는 제법 꽤 많은 책을 읽었음에도,  일기나 리뷰로 흔적을 남겨놓을 생각을 미처 못했었다. 그럼에도 고흐의 자서전을 읽고 일기에 가까운 감상문을 남겨두었던 것은, '천재화가'이자 현대인들이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인기예술가'인 고흐가 못내 아쉽게 다가왔던 개인적인 감정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화가가 내게는 왜 그리 불편하게 와 닿았을까. 그것도 그가 쓴 편지들을 모은 자서전을 읽고 나서 말이다.




반 고흐.


느즈막에야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림에 대한 안목이 짧은 나로서는, 아직 그의 그림이 어떻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고흐지만, 생전에는 그야말로 불행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다는 정도 밖에.

  

그에 대한 관심은 2006년, 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일부를 보면서 생겨났다. 그 편지에서 고흐는 그림 그리는 것이 때로는 힘들고 어렵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그린다고. 인내하면서 그린다고. 천재들이라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없었겠나 싶지마는,  그때는 천재화가라고 평가받는 고흐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게 유독 마음에 박혔더랬다.

 

2006년 당시 나는, 새로운 비전을 놓고 심각한 내적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남들이 선망하는 좋은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나름 인정받으며 일도 즐겁게 하고 있던 상황이라, 이러한 나의 고민은 나 스스로도 의아하기에 충분했던 부분이라, 남들에게 쉽게 터놓을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한 동안 입맛도 잃었고, 잠도 거의 잘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때 어찌나 고민이 심각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이면 끝날 것 같던 당시 나의 내적 고민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몇 달이 되도록 나 자신과 씨름하고 하나님께 묻고 또 물으며 끙끙 앓던 내게 다가왔던 것이 무심코 들어간 절친의 미니홈피에서 발견한 고흐의 편지 중 한 단락이었다.  그때의 기쁨이란!


그 이후 이 화가가 누군지 관심이 갔다. 그리고 2008년 새해를 앞두고, "힘내라"며 가장 친한 친구가 빌려준 <반 고흐, 내 영혼의 자서전>을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은,  


처절하게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았던 아픔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리려 했던 그의 노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 그렇게 몸부림치며 사랑을 갈망했던 화가의 삶이 안쓰럽고 불쌍하다는 것,


이었다. 또한 고흐가 느꼈을 고통도 어느 정도 동감했고.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고흐가 싫어지는 역효과가 발생했다. 첫 번째로는 그의 유아적인 자기 사고방식이 불편했고, 자서전 속 그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림의 간극이 너무 크게 느껴져 그로 인해 "고흐의 작품들이 과연 진정성을 지녔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자신을 다스림에 있어 너무도 부족한 나머지,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쉽게 상처를 주는 스타일이었다. 책에서 만난 고흐는  자신의 아픔만 생각할 뿐, 자신이 다른 이에게 준 아픔과 상처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만난 고흐는.


고흐의 삶이 너무도 힘들었던 것은 안다. 하지만 그는 수 많은 명화들을 남겼다. 덕분에 고흐는 후대 사람들로부터 찬사와 존경뿐만 아니라, 위로와 연민, 동정까지 받고 있다. 그가 타인들에게 주었던 고통들은 그의 빛나는 걸작품들로 인해 완전히 면죄부를 받은 모양새다.


반면, 그의 가족, 친구들, 연인들은, 단지 그들이 이름 없이 사라져간 인물들이라는 관계로 상처 입은 마음을 안은 채 그냥 잊혀져 버렸다. 사람들은 "고흐 때문에" 그들이 받았을 아픔과 상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의 고통이 고흐보다 더 컸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때문에 난 고흐가 도통 좋아지지 않는다. 존경심도 들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2015년이 된 지금도 그때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기본적인 감정은 비슷하다. 난 여전히 고흐가 별로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그림들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천재성, 평생 외로움과 가난과 상처 속에서 살았던 생애, 그래서 오직 신만 바라본다는 고백을 했던 것은 미켈란젤로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털고 부패한 가톨릭에 맞서, 성경에 근거하여 마지막 작품 "최후의 심판"을 남긴 미켈란젤로는, 개인적으로 최고로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이 받은 상처에 집중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있지 않았다. 대신 그 아픈 마음을 타인이 아닌 작품에 오롯이 투영시킴으로써 결국에는 고통을 이겨냈다.


반면, "하나님의 얼굴을 찾겠다"며 열심히 자화상을 그렸고 심지어 한때 성직자의 길을 가기도 했던 고흐는, 자신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남에게 돌렸고, 끝없이 사랑을 외쳐댔지만 실제로는 원망만 내뱉기 십상이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신과 영원히 결별했다.


인간의 신체에서 얼굴은 전체 몸의 8분의 1밖에 안 될지라도 실질적으로 그 사람을 대표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틀림없이 얼굴일 것입니다.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만들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얼굴에 그만큼 신경을 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사람의 얼굴에서는 하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P.122)  


위의 인용 구절에 나타난 고흐의 말에는 동의한다. 신이 우리 모두를 창조했을 때 가장 신경 쓰셨을 부분은 얼굴일 거라는 말. 60억이 넘는 전 세계 인구 중 똑같은 얼굴을 가진 자는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내가 지혜롭다면 내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올 수 있을 텐데. 내 눈이 신을 담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생각"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고흐마저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은 확실하니까.


'파이프를 물고 귀를 싸맨 자화상', 반 고흐 作, 1889


때문에 고흐처럼 단지 생각으로만 끝내지 않으면 좋겠다. 지금의 내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앞으로 내 얼굴은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 나는 과연, 내 얼굴에 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을까.  내 삶이, 내 생각이, 내 감정이, 내 언어가, 내 행동이, 내 모든 것이, 무엇을 닮은 모습으로 채워져 갈까.


외로워서, 상처받아서, 낙심돼서,  실패뿐이어서,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 남과 비교해보니 부끄러워서, 나는, 우리 모두는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것을 고흐처럼 타인에게로 원인을 돌리고 싶지는 않다. 사람이 아프고 괴로운 부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낼 때, 피해를 받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인들이다.


사촌 누이를 사랑했는데 상대가 받아주지 않자 그 가족이 보는 앞에서 자기 손을 지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도 스토커처럼 막무가내로 그녀 집에 찾아가고, 오죽하면 그녀 가족이 고흐가 들이닥친 것을 눈치채고 미리 사촌누이를 피신시킨 적도 있었다. 자신 앞에서 손을 지져버리는 사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불쑥 나타날지 몰라 사촌누이의 가족은 매일 가슴이 벌렁벌렁 거렸을 것이다. 부탁도 해보고, 말려도 보고, 화를 내어도 봤지만, 고흐는 듣지 않았다.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고흐의 모습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뒤집어 쓴 채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무조건 액셀만 밟아버리는 폭주족과 닮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 사회면에 등장하는 데이트 폭력, 헤어진 연인에 대한 앙갚음 범죄 등이 고흐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고흐'라는 이유로, 그가 위대하다는 이유로, 그의 이 모든 행동마저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것이라고 불 수 있을까.


고흐가 사랑을 갈망하는 불쌍하고 상처 입은 영혼이었음은, 인정한다. 그래서 그가 안쓰럽고 불쌍하다. 하지만 고흐에게 연민을 가지는 것 반만큼이라도, 고흐 때문에 괴로웠을 사촌 누이 가족과, 고흐의 모든 것을 받아주었던 동생 테오가 겪었을 마음의 짐에 대해서도 우리는 연민을 가지고 있을까.

 

화가, 음악가, 연기자, 무용수 등 수많은 예술가들 중 그들의 예술활동 또는 작품이 그들의 인격과 상치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경우라도 예술가는 예술 작품으로만 말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예술작품은 예술가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니 그 사람의 인성과 가치관, 삶의 모습까지 함께 보아야 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후자다. 그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어낼 때에 담겨있는 '진정성'의 측면은 그의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고흐에게 안타까움과 연민은 있을지언정, 본인의 감정에만 치우쳐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그러한 행동을 사랑이라고 정당화한 그의 모습은 여전히 불편하다.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기심이 아니었을까.


임신 중인 아내를 두고 성스캔들을 벌인 국내 인기 배우나, 불륜을 저지른 자신들의 만행을 사죄하지 않는 브란젤리나 커플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고아들을 입양하고 여러 자선사업을 벌이는 것은 분명 선한 일이겠지만,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한 사과나 사죄가 수반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선행을 펼친다 해도 좋게 보기가 어렵다. 자신들로 인해 눈물을 흘렸을 누군가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부재한 탓일 거다.


배려는 사랑의 또 다른 형태다. 내 감정이 우선이 아니라, 상대를 사랑하기에 상대의 감정을  우선시하는 것. 그래서 배려의 측면에서는, 훌륭한 화가도, 유명한 배우도,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한참 부족할 수 있다. 그래서 신은 사람을 공평하게 하셨나 보다.


대학원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인용해본다.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 액셀을 밟는 것은 파국이다." 슬프게도 역사 속 위대하다고 추앙받는 인물들 중, 삶 속에서 브레이크와 액셀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문제는 그들의 업적(그것이 예술, 정치, 학문 등 어느 분야에서건 간에)이 훌륭하다는 이유로, 이들이 걸어간 파국의 길까지 아름답게 포장된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많은 이들의 영감을 속이는데 어느 정도 일조하고 있음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고흐의 아름다운 그림에도 불구하고, 고흐가 딱히 내게 많이 와 닿지 않는 건 이 때문이었다.


얼굴. 그것은 신을 온전히 비추는 거울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반고흐 #얼굴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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