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아비키 Dec 21. 2015

모두가 부르는 사랑과 희망의 노래, 그래서 내일은 온다

영화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의 대하소설 <레미제라블>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주인공 '장발장'의 스토리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19년 동안 복역을 하고 가석방되었으며, 석방 후 여전히 살길이 막막해 은혜를 베풀어준 신부의 은식기를 훔쳐 달아났다가 붙잡혔지만 오히려 신부가 은촛대까지 얹어준 사건. 그것에 감명받아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지만 자베르 경감은 끝까지 그를 뒤쫓다는 이야기.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라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엄청난 사건이다. 특히 그것이 일시적인 감정의 동요나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가치관을 뒤흔들며 남은 평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된다면 더더욱 그렇다. 살면서 이처럼 기존의 모든 가치관을 모두 뒤엎고 완전히 변화되는 사건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설령 인생에서 그런 지점을 만나더라도 우리는 과연 남은 인생을 완전히 바꾸며 살아가는가. 앞으로는 달라지겠다고 결심했다가도 이내 삶의 무게 앞에서 그 결심을 포기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우리는 타인을 향해서는 '변해야 한다'고 외치기 마련이다. 정작 그 변화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절절히 체험했으면서도.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는 더없이 관대하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장발장, 그는 달랐다.

 

레미제라블은 원작이 2500 페이지에 이르는 대하 서사극인 만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미 빅토르 위고가 원작에서부터 각 캐릭터들마다 고유의 매력을 불어넣은 덕분에, 레미제라블은 영화나 뮤지컬로 확장되는 과정에서도 캐릭터들의 매력이 여전히 빛난다. 특히 뮤지컬로 각색되면서 각 캐릭터들의 매력은 더욱 극대화되는데, 때문에 레미제라블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분량이나 매력도 면에서 주조연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그만큼 배우는 물론이고 관객 입장에서도, 각 캐릭터들마다 생생하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감동적인 서사뿐 아니라 캐릭터의 몰입도에서도, 레미제라블은 세계 4대 뮤지컬이라 불리는 다른 대작 뮤지컬 작품들보다도 단연 압도적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휴잭맨 분)


그러나 다양한 매력적인 캐릭터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캐릭터는 역시 주인공 '장발장'이다. 2012년 개봉했던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으로 분한 휴 잭맨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장발장으로 분해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마치 빅토르 위고가 휴 잭맨의 모습을 상상하며 소설을 썼다고 느꼈을 정도로 그는 상상 속의 장발장을 완벽히 표현했고, 또한 그간 수많은 배우들의 연기로 사람들에게 정형화되어버린 장발장의 모습을 완전히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건 배우의 노력과 재능 탓도 물론 있겠지만, 그 전에 장발장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매력과 흡입력이 너무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캐릭터가 21세기의 트렌드라고 한다면, 장발장은 그 트렌드를 거스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트렌드에 부합하기도 하는 묘한 캐릭터다. 죄수의 신분에서 신부를 만나 회심하고 선한 사람으로 거듭난 후 끝까지 그 모습을 지키고 살아가는 모습을 평면적이라고 본다면 장발장은 현대의 트렌드에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죄수 시절조차 장발장의 모습은 악인이라고 보기엔 어려웠으니까. 지극히 선한 사람=주인공이라는 고전적인 공식을 충실히 따른 캐릭터가 장발장이다.


반면, 회심을 하고 난 이후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시장 자리까지 올랐지만, 그의 과거는 여전히 어두움에 갇혀있다. 과거가 베일에 싸인 인물.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도망 다니는 신분. 그래서 그의 겉모습과 실제 처한 상황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때문에 극 중의 인물들은 그의 이중적인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자베르가 그랬고, 뮤지컬과 달리 소설에서는 딸인 코제트와 마리우스조차 장발장의 과거 고백을 듣고서는 잠시 동안 장발장과 거리를 둔다. 빅토르 위고는 장발장이라는 캐릭터에 심리적인 선과 악을 입히기보다는, 그가 처한 상황에서 이중성을 부여함으로써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장발장 캐릭터를 입체화시켰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장발장은 또한 21세기의 다중적 캐릭터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영화는 죄수로 복역 중인 장발장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고단한 노역에 지쳐버린 죄수들이 울부짖듯 부르는 합창은 웅장한 멜로디와 함께 그들의 처절함을 보여주는 장면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면서 사실감을 더한다. 주님은 우리를 잊어버렸다, 신은 더 이상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며 절규하는 그들의 외침은 육체적인  고난뿐 아니라, 더는 회생할 수 없다는 그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대변한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을 볼 때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가 떠올랐다. 가사, 음악, 장면 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절망 속에서 부르는 합창과 오버랩되는 건 나뿐일까. 억압받는 자와 통제하는 자의 계층 관계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근본적인 약함(Weakness)과 악함(Wickedness)를 타고났기 때문일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것은 "사랑"과 "희생"만이 유일하다고 답한다. 이 메시지를 상징하는 존재가 바로 장발장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저마다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장발장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랑과 희생을 통한 구원"이라는 메시지를, 빅토르 위고는 오직 장발장에게만 부여했다.



예전부터 늘 궁금했다. 장발장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장발장과 신부의 에피소드일 텐데, 막상 원작이나 영화에서 신부가 등장하는 장면은 아주 잠깐이다. 중후반부를 장식하는 프랑스 혁명의 이야기가 스케일이나 시대적 의미로도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는데, 신부의 이야기가 더 많이 회자됨은 어떤 이유일까.


장발장은 자베르와 달리,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이는 신부를 통해 신의 구원과 사랑을 경험한 장발장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아가는 장발장은 이후 이러한 자신의 결심과 사랑이 시험받는 순간을 수없이 맞이하지만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그가 회심하던 순간은 장발장의 일생에서 강렬한 경험이었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이라는 대작에서 일관되게 전하고자 했던 주제의식이 "사랑"과 "희생 또는 헌신", 그리고 "용서"라는 기독교적 메시지였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장발장은 자신을 그리도 괴롭혔던 자베르를 용서했고, 친딸도 아닌 코제트를 사랑으로 키웠으며, 가난한 자들을 돌봤고, 마리우스 대신 자신이 죽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영화의 마지막엔 시대의 아픔으로 스러져간 모든 이들이 "사랑의 전사가 되자"며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부른다.


 


혹자는 이 영화를 혁명의식으로 받아들이며 현시대의 정치상황과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여당이든 야당이든 보수든 진보든, 어떠한 정치적 이념도 완벽한 것은 없다. 각자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현재 어떤가. 통합을 외치고 있지만 정작 그만한 노력을 하는 이들은 드물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나는 옳고 다른 이는 그르다는 인식이 팽배한 사회. 과연 이것이 빅토르 위고가 보여준 <레미제라블>일까. 하지만 작가는 혁명군은 선, 반대파는 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작가가 온전히 지지하는 인물은 '장발장' 뿐이다.


장발장은 혁명군이나 진압군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다. 그는 이념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랑에 따라 마리우스를 구했다. 딸 코제트를 위해서라는 부성애적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코제트에 대한 사랑을 희생과 헌신이라는 보다 확대된 개념으로 바라본다면, 장발장이 마리우스를 구하는 것은 부성애를 뛰어넘은, 보편적인 인류애에 대한 관점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장발장이 자베르를 용서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장발장이 사랑과 용서의 상징이라면, 자베르는 율법과 윤리의 상징이다. 성경적으로는 자베르는 율법주의자 또는 유대인들, 자베르는 예수님의 사랑정신을 따르는 성도를 상징한다.


문학사에서 가장 우유부단한 인물로 '햄릿'을 주로 떠올린다면, 가장 강력한 의지의 소유자로 '장발장을 꼽아도 될 것 같다. 은촛대 사건을 통해 삶이 완전히 변하는 강렬한 경험을 했다고는 해도, 남은 평생을 회심했던 순간에 의지하여 살아가긴 사실 굉장히 어렵다.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의지와 결심은 살면서 백만 번 이상 유혹과 시험을 받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한 달 전 결심도 지키기 어려운 것. 그래서 새해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지만 "작심 3일"에 그치고 마는 것이 우리 모습 아니던가.


그런 작은 결심도 변하기 쉬운 마당에, 근본적인 변화는 오죽할까. 장발장의 변화는 소소한 변화가 아니었다. 이름을 바꿔야 했고, 이전까지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변했으며, 절망이 없던 과거에서 새로운 희망을 써 내려가는 변화였다. 무엇보다 사랑이 없던 삶에서 사랑을 베푸는 삶으로 변했다. 말이 쉽지 이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죽을 만큼, 어쩌면 죽음보다 더 어려운 변화다. 더구나 이 변화에는 종종 커다란 희생이 뒤따른다. 그래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장발장이 놀라운 것은 이런 고통스러운 변화를 끝까지 지킨다는 것이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수도 없이 찾아온다. 자베르에게 잡히면 끝장이다. 판틴과의 약속이고 뭐고, 마리우스를 살리고 뭐고 간에, 일단 도망가 봐야 한다. 그런데도 장발장은 회피하지 않는다. 도망가는 삶은 그가 결심한 변화된 삶과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닮은 사람이 대신 잡힌 상황에서 입만 다물면 될 것을 스스로 자수하는 장면에선 전율마저 일었다. 그때 장발장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시장의 자리에 있었다. 그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무엇보다 보장받은 자유를 내려놓고 자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충분히 억울하다고 항소할 수도 있을 법한 상황에서, 그는 대립하기보다는 순순히 자신을 내어놓는다. 그의 모습은 아마도 자베르에게 조금씩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았을까. 자베르가 점점 악랄해지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장발장에게 영향 받는 것이 싫어서 반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힘은 그만큼 위대하고 무서운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장발장은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신분증명서를 찢으며 새로운 삶을 살겠노라 결심했던 그는, 억울한 희생자 앞에서 스스로 지웠던 자신의 이름을 다시 꺼내든다.


자베르, 장발장의 사랑에 지다.   


<레미제라블>은 프랑스어로 "비참한 사람들"(또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비참하고 불쌍하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꼽으라면 개인적으로 주저 없이 자베르를 꼽고 싶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극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자의에 의해 죽음을 맞는 인물은 자베르가 유일하다. 때문에 현상 그대로만을 보더라도 자베르가 가장 불쌍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가장 불쌍하게 보이는 이유는 작가가 전하는 사랑과 소망의 삶이 자베르에게만은 끝까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나르 디에 부부도 변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그들은 아직 삶이 남아있기에 앞으로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자베르와는 다르다.)   

 


장발장이 사람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면, 자베르는 계층의 상하관계를 추종하는 인물이다. 그는 계급사회의 유지를 위해 만든 법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며, 시장인 장발장에겐 머리를 숙이지만 죄수였던 장발장에겐 조롱과 멸시를 보낸다. 오프닝 신에서 노역하는 죄수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베르의 모습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효과적인 장치다.   


영화는 유독 자베르의 경우에 수직적인 카메라 앵글을 많이 보여주는데, 오프닝, 공장에 들어선 장발장을 2층에서 보는 장면,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업고 가는 장발장을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장면, 투신할 강물을 바라보는 장면 등에서 자베르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처리된다. 또한 자베르의 유명한 아리아 'star'를 부르거나 최후의 순간에서는, 건물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에서 카메라는 아래에서 위를 비춤으로써 그의 위압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데 성공한다. 장발장이 판틴, 코제트와 눈을 맞추며 대화를 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장발장이 마리우스를 위해 'bring him home'을 부르며 기도하는 장면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 앵글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봐야 할 것이다.)


신분이 보잘 것 없는 것은 사실 장발장이나 자베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장발장의 신분이 죄수(비록 빵 한 조각을 훔쳤을 뿐이지만)라면, 자베르는 어머니가 죄수였다. (자베르는 감옥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장발장의 신분이 후천성이라면 자베르의 그것은 선천적이다. 날 때부터 죄수인 사람이 환경에 의해 죄수가 된 사람을 쫓아다니는 상황. 자베르가 장발장에게 지나치리만치 가혹한 것은 여기서부터 기인하는 게 아닐까. 소망이 없는 것은 비단  자베르뿐이 아니다. 장발장도, 판틴도, 혁명군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독 절망의 그림자에 얽매어 있는 사람은  자베르뿐이다. 왜일까.



자베르의 비극은 비참한 출신으로 태어난데서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만약 빅토르 위고가 '인본주의적인 영웅'을 그리려 했다면, 이 선천적인 비극을 장발장에게 부여했을 테지만, 위고는 신이 베푼 사랑을 기본으로 한 '성경적 영웅'을 그렸다. 장발장은 죄수에서 성자(신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데 (마지막에 마리우스는 장발장을 "성자"라고 부른다), 이는 성도들이 사랑의 대명사인 "예수"를 통해 죄인에서 신의 자녀로 신분이 회복되는 성경적 가치관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장발장은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날 때부터 죄수여서는 안 되었다.


위고는 선천적인 비극을 자베르에게 부여한다. 자베르는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을 대변한다. 그렇다고 자베르에게 기회가 없던 것은 아니다. 장발장의 사랑은 자베르에게도 예외 없이, 아니 어쩌면 다른 이들보다 더 강력하게 전해진다. 하지만 처음부터 타락한 채로 태어난, 다시 말해 영원히 죄에 구속될  수밖에 없는 자베르는 그 사랑을 받고서도 변화된 삶을 거부한다. 대신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을 택할 뿐이다. 장발장에게 용서를 구했다면 어땠을까.


참회가 없는 삶은 허망할 뿐이다. 남는 것은 더 큰 비참함과 후회였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강물에 몸을 던진 자베르는, 때문에 총탄에 맞아 죽은 혁명군 보다도, 몸을 팔다가 죽은 판틴보다도, 몇 백만 배 불쌍한 존재다. 그는 강물에 몸을 던짐으로써 영원히 구원받지 못했다. 엔딩 씬에서 모두가 사랑의 전사가 되자며 합창을 할 때도, 자베르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장발장의 사랑이 비참한 사람들인 레미제라블에게로 퍼져갔지만, 자베르만큼은 그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자베르의 선택이었다. 출신을 선택받지 못했더라도 삶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자베르는 그것을 몰랐다. 자베르는 장발장의 사랑에도 졌고, 소망과 절망 중에 선택하는 것에도 졌다. 한 때는 위풍당당했고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였지만, 마지막에 그의 눈 밑에는 사람들이 아닌 무서운 강물만 흐르고 있었다.


 

판틴과 코제트, 사랑의 씨앗이 피운 꽃   


<레미제라블>은 다양한 인물이 나오지만 상대적으로 여성 캐릭터의 분량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적은 분량 대신 이들이 전하는 임팩트는 상당하다. 특히 판틴 (앤 해서웨이 분)이 그러한데, 영화에서는 앤 해서웨이의 뛰어난 연기와 맞물려 역대 판틴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판틴이 처음 몸을 팔고 고통 속에서 부르는 "I Dreamed a Dream" 아리아는 처절하다 못해 듣기가 괴로울 정도다. (물론 앤 해서웨이의 노래 솜씨는 일품이다). 뮤지컬에서는 예쁘게 들렸던 곡이었지만 영화에서는 가장 아팠던 곡이었다. 그만큼 판틴의 절망이 노래 한 곡으로 절절히 묻어난다.


배우의 열연도  한몫했겠지만, 판틴은 이미 캐릭터 자체가 워낙 드라마틱하다. 아픈 딸( 실제로 코제트는 건강했지만 테나르 디에 부부가 거짓말을 해서 돈을 뜯어낸 결과다.)을 위해 머리를 자르고 이빨을 뽑고, 몸까지 팔아야 했던 여인. 하지만 그토록 보고 싶던 딸을 보지 못한 채 온갖 비참한 생활을 견디다 병으로 죽고 만다. 너무 억울해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여인. 딸의 환상을 보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던 여인. 남녀를 막론하고 끔찍하리만치 비참한 삶을 살다 간 판틴 캐릭터는 분량과 상관없이 강렬할  수밖에 없다.

 


판틴이 이토록 삶의 밑바닥까지 간 것은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다. 자베르가 선천적으로 비천한 출신을 부여받았다면, 판틴은 아름다움을 타고났다. 안타깝게도 불행의 시대에 미모를 타고나는 건 비극이 된다. 아름다움 때문에 남자들은 그녀를 희롱하고 여자들은 그녀를 시기한다. 하지만 작가는 판틴이 타고난 외모의 아름다움에 그녀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심어놓았다. 빅토르 위고는 캐릭터에 부여한 외적인 조건들에 이중적인 의미(또는 상징)를 숨겨놓았는데, 이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주제의식과 연결되어 경이로울 지경이다.


판틴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순결한 영혼을 상징한다. 때문에 관객들은 그녀가 결국 구원받을 것임을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다. 똑같이 선천적으로 부여받았지만, 자베르의 것은 비참했고 판틴의 것은 아름다웠다. 설정에서부터 작가는 캐릭터들이 절망과 소망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암시하고 있는데, 뒤에 가서 이 설정을 뒤집는 반전 같은 것을 내세우지 않음에도 조금도 지루하거나 뻔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작가의 역량일 것이다. 그걸 뮤지컬과 영화로 잘 담아낸 감독의 재능도 물론이고.


판틴의 아름다움은 그녀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지만, 동시에 그녀 영혼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 환경에서도 딸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그녀를 구원으로 이끈다.
장발장은 판틴에게 구원이자 빛이다. 장발장은 판틴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그녀의 딸 코제트를 돌봐주겠다고 한다. 삶의 가장 힘든 순간에 다가온 사랑의 빛 앞에서 판틴의 삶도 변한다.


판틴은 장발장의 품에서 죽는다. 비록 그토록 보고 싶었던 딸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녀의 마지막이 결코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삶의 희망을 품었다. 그 가녀린 몸에 엄청난 사랑을 품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놀라운 능력이며, 이는 전적으로 신이 주신 사랑을 받아 누릴 때 가능하다.


장발장은 자신이 받은 사랑을 판틴에게 전하고, 판틴은 그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죽는다. 비록 그녀의 삶은 눈물로 가득 찬 삶이었지만, 고통 가운데 사랑도 함께 있었다. 눈물로 뿌린 사랑의 씨앗. 장발장은 판틴에게 자신의 사랑을 주었고, 동시에 판틴이 뿌린 그 사랑의 씨앗을 키우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코제트의 삶도 처음엔 절망이었다. 하지만 코제트 또한 판틴만큼이나 소망을 품는데 적극적이다. 테나르디에 부부의 구박속에서도 코제트는 구름 위의 성을 생각하며 노래를 부른다. 성에 사는 예쁜 공주가 된 자신을 상상함으로써 힘겨운 현실을 어린 코제트는 꿋꿋이 견뎌나간다. 장발장이 코제트를 데리러 온 것이 단지 판틴과의 약속 때문일까. 코제트 입장에서 보면,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다가온 축복일 수 있다. 그  어린아이가 추운 겨울날, 어른도 가기 무서운 숲을 혼자 가야 했을 때,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성인이 된 코제트의 스토리는 마리우스와의 사랑에만 한정되어 있는 관계로 간과하기 쉽지만, 어린 시절의 코제트는 누구보다도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는 캐릭터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희생한 에포닌의 모습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상대적으로 코제트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작가는 대신 어린 코제트에게 충분한 매력과 강인한 정신을 심어줌으로써 코제트에게 생명력을 부여했다.



엄마 판틴이 그랬듯이 코제트의 인생도 장발장을 만남으로써 완전히 바뀌었다.  아빠뿐 아니라 엄마도 되어주겠다는 장발장의 말은 그동안 고통받았던 어린 소녀의 마음을 따뜻이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장발장 또한 나눠줄 사랑이 이전보다 더 커졌다. 판틴의 사랑까지 더해진 것도 있고, 사랑 자체가 이미  나눌수록 더욱 커지는 습성을 지녔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덕분에 누더기 차림으로 얼굴에 거뭇거뭇 먼지가 묻어있던 지저분한 소녀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빛나는 여인으로 성장한다. 코제트의 모습은 장발장이 그동안 얼마나 사랑으로 그녀를 키웠을지를 보여주는 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장발장이 헌신적으로 쏟은 사랑이 진실로 아름다웠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자란 코제트를 보고 마리우스가 한 눈에 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에게는 외적인 아름다움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따뜻함일 수도, 빛나는 빛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건, 그 사람에게 흘러간 사랑은  마음속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미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지극한 아름다움으로 그 사람을 감싼다.


마리우스는 코제트를 감싸고 있는 이 사랑의 모습에 끌렸을 것이다. 에포닌도 아름다웠고 친하기로는 코제트보다 더 가까웠음에도 마리우스가 그녀에게 끌리지 않았던 건, 에포닌이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돈벌이 수단으로 자식을 대하는 부모 슬하에서 자란 에포닌과 장발장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란 코제트가 품어내는 기운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에포닌은 대신 그녀 자신이 마리우스를 통해 사랑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판틴이 뿌렸던 사랑의 씨앗은 그렇게 장발장을 통해 길러졌고, 코제트를 통해 꽃으로 피어났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리우스와의 결혼을 통해 더 큰 결실을 맺을 것이다. 사랑이든 증오든 계속 커져가는 것은 똑같지만, 증오에 비해 사랑의 성장하기는 더욱 어렵다. 사랑이 메말라가는 시대, 반면 증오는 커져가는 시대의 상황을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때문에 사랑은 증오보다 강력한 힘을 갖는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증오를 품기란 쉬워도 사랑을 품기란 어렵기 때문에 그렇다. 판틴은 처참한 상황 속에서 사랑을 품었고, 그 결과 그녀의 사랑은 소멸되지 않고 장발장을 커쳐 코제트에게서 발화했다. 엔딩씬에서 판틴이 모두와 함께 부르는 합창이 감동적임은 이 때문이었다.


 

에포닌과 마리우스, 사랑의 아픔과 행복을 맛보다.


많은 이들이 마리우스와 코제트 커플에 비해 에포닌에게 지지를 보낸다. 나 역시 비슷하다. 아무래도 짝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더 애달플  수밖에 없는데다, 짝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가련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서로를 바라보며 환한 웃음을 지을때, 뒤에서 홀로 우는 에포닌의 모습은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캐릭터다.


특히 비를 맞으며 울부짖는 에포닌의 모습은 그녀의 상황과 맞물려 더욱 절절하다. 그 때문에 서로 떨어져서 어떻게 사냐고 괴로워하는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배부른 투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코제트보다 에포닌에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짜증 난다고 까지 했다.)



에포닌은 친부모 슬하에서 자랐음에도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겐 코제트와 같은 빛남이 없었다. 그러나 에포닌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실제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이 엇나가고 비뚤어지기 쉬운 것이 현실 세계다. 어딘가 모르게 날이 서 있고 자아가 왜곡되기 쉽다. 하지만 에포닌이 사랑스러웠던 건 이런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외부에서 받지 못한 사랑을 자신의 내부에서 생성시킴으로써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면 그녀가 스스로 만들어낸 사랑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다 못해 흘러넘쳤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이겨나가는 모습.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마리우스를 원망하거나 코제트를 질투하지도 않는다. 그냥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이되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꿈을 꾸기까지, 에포닌은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증오보다 사랑을 키우기가 훨씬 어렵다. 에포닌 같은 환경에선 더더욱 그렇다. 때문에 사랑을 키우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온 에포닌의 모습은 판틴의 모습과도 많이 겹친다. (두 캐릭터는 모두 극 중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점에서도 서로 닮아 있다).


코제트가 선대의 사랑을 받아 꽃을 피우며 완성시키는 존재라면, 에포닌은 판틴의 계보를 잇는 사랑의 씨앗을 심는 존재다. 부유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마리우스가 코제트와 연결되는 건 이런 관점에서 당연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사랑의 씨앗이든 꽃이든, 모두 나름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씨앗의 단계는 아프고 힘들다. 자신을 갈라 싹을 틔워야 한다. 그래서 뭐든 처음이 중요하다. 에포닌은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의 싹을 틔웠다. 아프고 힘들었겠지만 그만큼 가치 있고 빛나는 과정이다.


진정한 사랑은 아프다. 그러나 아픔이 있어야 행복이 따른다. 에포닌은 이를 알고 아픔의 단계를 담당했다는 점에서 이미 '사랑의 전사'였다.


 

마리우스는 사랑의 절정을 경험하는 인물이다. 코제트에게 한 눈에 반했고, 결국 그 결실을 맺는다. 흔히 사랑하는 연인들이 이루어지기까지 그들의 사랑이 의심받거나 위협받는 상황이 많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레미제라블>의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적인 요소였지만, 그마저도 장발장에 의해 모두 해결된다. 이 두 사람이 에포닌보다 사람들의 지지를 덜 받는 것은, 아마도 이 부분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을 갈라놓는 어려움마저도 다른 인물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되니까. 정작 이들을 도와준 에포닌이나 장발장은 죽는데 말이다.  


물론 이는 주변인들이 자진해서 도와주겠다고 뛰어든 꼴이니, 마리우스나 코제트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을 통해 빅토르 위고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완성시키려 했던 것 같다. 영화는 진압군에 의해 스러진 혁명단원들이 다시 모여 사랑을 노래하는 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이 모든 혜택을 누리기까지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사랑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메세지를 강조하고 있는 인물들은 바로 마리우스와 코제트였다.

 


마리우스는 사랑하는 코제트와 결혼함으로써 행복한 결실을 맺는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환하게 웃는 동안, 장발장은 수도원에서 홀로 죽어간다. 두 사람이 사랑의 모든 혜택을 누리며 행복해하는 것은, 장발장과 에포닌, 그리고 죽어간 혁명군들(어쩌면 반대편에 선 진압군들까지도)의 처절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이 뿌리고 간 희생의 옥토밭 위에서 사랑의 꽃을 피우고, 그 사랑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전수할 것이다. 후대를 사는 우리들이 선대의 희생과 사랑의 혜택을 입고 있듯이 말이다.   



앙졸라와 혁명군, 그리고 테나르디에 부부. 사랑의 오용, 왜곡, 그리고 과격함.   


<레미제라블>은 기본적으로 장발장이라는 한 인간의 생애를 다루고 있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혁명군의 이야기가 주된 스토리로 등장한다. 극에서 다루고 있는 혁명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프랑스  대혁명(1789년)"으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는 혁명에 대해 지지 또는 반대의 어떠한 입장이나 견해를 일절 표하지 않는다. (작가가 지지한 것은 오직  장발장뿐이었다)


영화는 혁명군의 시점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들이 ' 또는 옳음'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혹자는  영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만큼 커다란 부작용도 가져왔던 사건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했던 로베스 피에르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았으나  자신 또한 공포정치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결국 자신이 만든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은 인류사적으로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


그 후로 프랑스 역사는 혼돈을 반복한다. 왕정, 공화정, 황정 등 너무도 단시간 내에 급격하게 정치체제가 변했고,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프랑스 정치권은 혼란의 혼란을 반복하고 있다.  피를 흘리고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이룬 혁명은 그만큼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부작용과 후유증을 낳는 것도 사실이다. 명예혁명으로 순조롭게 정치체계를 변화시킨 영국에 비해, 프랑스의 정치는 아직도 부정부패 소식과 잡음이 많이 들린다.


피로 점철된 대립은 결국 혁명군과 진압군을 가릴  없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레미제라블> 그들의 죽음에 집중하지, 그들이 죽고  후의 정치체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레미제라블>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가 관심을 가진 것도 정치적 이념이 아니었다. 모두가 죽고  이후, 파리의 여인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만 봐도 그렇다. "이들은 누군가의 귀한 아들들이었을 거다" 추모하는 여인들의 노래를 보았을 , 작가가 추모한  자신들의 신념에 의해 죽어간 프랑스의 젊은이들 모두였지, 혁명군만 지지한 아니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우리의 역사와도 닮아있다. 2011 개봉했던 국내 영화 <적과의 동침 (김주혁, 려원 주연)>에서도 비슷한 시각이 나온다. 자신이 믿던 신념에 따라 남과 북으로 갈리었던 젊은이들은 결국 서로를 죽이고 자신들의 목숨도 잃었다. 그들 누구를 비난할  있을까. 현재 우리와 다른 입장에 섰다고 비난하기엔 당시의 그들이 너무도 순수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이상적인 것을 바랐고, 그것에 따라 행동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이념을 논하고 싸우기 바쁜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들  누가 옳았고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무례할  있다. 선대의 희생을  없이 누려온 우리는 선대의 오류를 거울삼아 미래를 재정비하는데 집중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므로.


<레미제라블>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보다    전에 살았던 이들이 흘렸던 . 하지만 어느 입장이었더라도 그들은 나름의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각자가 바라는 이상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 시점에서 옳고 그르다고 평가된 한들, 당시 그들이 무엇을 쫓았는가로 어찌 다른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들을 평가할  있을까. 우리가 말할  있는 것은 "그들은 사랑의 방식을 자신들의 이념에 맞게 오용, 왜곡한 오류를 범했다" 정도 이다.



사랑의 속성은 무서운 것이어서, 잘못 사용했을  자칫 과격해지기 쉽다. 삐뚤어지고 왜곡된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안다. 그래서 사랑은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 사람 간의 소통과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사랑은 왜곡되기 쉽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사랑은 그래서 위험하다.


혁명군은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동지애가 있었다. 하지만 혁명군에 가담하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진 못했다. 그래서 파리 시민들은 그들을 져버렸는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에선 두려움 때문에 시민들이 혁명군을 져버렸다고 나오지만, 그렇다고 시민들을 배신자 또는 겁쟁이라고 명할 수는 없다.  


혁명군이 실패한 가운데서도 마리우스가 구원을 받을  있었던 것은, 마리우스가 코제트를 사랑한 것에서 상징을 찾을  있지 않을까. 코제트는 에포닌과 달리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다. 자기편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고 품는 . 비록 극에서는 연인 간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코제트를  혁명세력의 관점으로 보았을  그녀를 사랑한 마리우스의 모습은 다른 시민들까지 품은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이다. 앙졸라가 마리우스에게 " 어린애가 아냐. 사랑놀음은 그만해"하고 비난했지만, 마리우스는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켰다. 혁명군 바깥에 있는 사람까지 사랑하고 품었을 , 그는 혁명군 바깥 세력인 장발장에 의해 생명을 건질  있었다.


빅토르 위고는 이 장면을 통해 뜨거운 열정과 신념은 좋지만, 그것을 좀 더 다른 이들을 향해 쓰라고 역설한다. 장발장이 자신의 사랑을 판틴과 코제트, 마리우스와 자베르에게까지 전해주었듯이. 혁명군은 이 점에서 미숙했고 실패했다. 혁명의 실패는 정치적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랑을 하는데 있어 실패한 이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치였다.  



테나르디에 부부도 사랑을 오용했다는 점에서는 혁명군과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혁명군이 너무 순수해서 사랑에 실패했다면, 이들 부부는 처음부터 의도적이었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들은 판틴의 코제트에 대한 사랑을 의도적으로 이용했고 변형시켰다. 사랑의 또 다른 무서운 속성이, 한 번 변질되면 그 범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는 것이다.


판틴과 코제트 모녀를 이용했던 테나르디에 부부는 이후 모든 이들의 사랑을 서슴없이 이용해먹는다. 장발장에게 거액의 돈을 뜯어내고, 자베르와 마리우스에게까지 접근한다.  과정에서 이들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혁명군처럼 너무 순수해서 사랑을 오용해도 문제지만, 이들처럼 대놓고 사랑을 왜곡, 변질시키는 것은 절대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만이 팽배해지고,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들 부부의 모습은  현시대의 우리 사회 모습 그 자체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각종 부정적 현상들은 테나르디에 부부처럼 사랑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시도들에서 기인한 것들이 다수다. 사랑을 오용했다는 점에서는 혁명군도 같았지만, 혁명군과 테나르디에 부부는  반대 지점에  있다. 좋은 시도였든 나쁜 의도였든 간에, 제대로  사랑을 하지 못하면  결과는 비극이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 사랑은 어려운 것이고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모두가 부르는 사랑과 희망의 노래, 그래서 내일은 온다!


내게서 타인에게, 타인에게서 내게로. 무언가는 반드시 흐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흐를 때 소망이 생길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다. 빅토르 위고는 사람들 간에 '사랑'이 흐를 때, 소망이 있음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증오와 정죄만이 흘렀던 자베르는 구원받지 못했고, 사랑을 흘려보냈던 장발장은 구원받았다. 또한 장발장이 전하 사랑을 조금이라도 맛보고 그것을 간직한 사람들은 함께 합창을 하며 바리케이드 너머의 세상을 꿈꾼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혁명도, 진압도 아닌,  사랑뿐이다.


<레미제라블>은 광대한 스토리를 다루면서도 한 순간도 주제 의식을 놓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사랑의 메시지는 극이  전개될수록 더욱 분명해진다. 특히 수십 명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도 이들 캐릭터들이 모두 한결같이 '사랑'에 대해 역설하고 있음이 놀랍다. 작가의 천재성에 감독의 재능,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이 잘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수고와 노력 덕분에, 난 이 영화를 편안히 감상만 하면 되는 "혜택"을 누렸던 것일 테고.


매서운 한파가 예고되는 2015년의 겨울. 하지만 타인을 보듬어 주는 사랑의 따뜻한 열기로 이 겨울의 한파를 녹일 수 있도록, 우리 시대에도 장발장이 많아지면 좋겠다.


#레미제라블 #빅토르위고 #장발장 #휴잭맨 #프랑스혁명


-----------------------------------------------

* 너무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그동안 프로젝트랑 논문 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보내고 보니 어느덧 연말이네요. 시간이 어쩜 ... ㅠㅠ  

얼추 바쁜 것이 끝났으니 앞으로는 좀더 자주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꾸준히 읽어주시는 구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해피 미리 크리스마스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