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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비키 Dec 28. 2015

감정과 기억의 스펙트럼, 그리고 행복의 조건

영화 '인사이드 아웃'



몇 년 전부터 국내 대중문화의 키워드에는 늘 '복고'라는 단어가 포함됐다. 1980년대를 다룬 영화 <써니>를 시작으로, 6~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빛과 그림자>, 방영 때마다 신드롬을 몰고 온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영화 <건축학개론>, 90년대 1세대 아이돌을 추억하며 당시의 아이돌 그룹 리더들이 모였던 프로젝트 그룹 "핫젝갓알지"와 올해 초 <무한도전>을 통해 불었던 <토토가> 열풍 , 최근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해 '종이접기' 열풍을 몰고 왔던 '종이접기 아저씨'(또는 '영만 아재')까지.


그 외에도 많다. 영화, 드라마, 음악, 예능 할 것 없이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과거'의 시간들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라며 애써 날카로운 시각으로 그 당시를 회고하려고 애써도, 과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때가 좋았지"라는 '그리움'의 정서다.


그런데 이러한 '복고' 또는 '과거'에 대한 테마가 비단 우리만의 키워드는 아닌 것 같다. 픽사가 2015년 세상에 공개한 <인사이드아웃>은 대놓고 '복고 정서'를 들고 나오는 우리의 콘텐츠들과는 사뭇 다르지만, 어른이  관객들에게 자신들의 유년시절을 추억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는  맥락을 같이 한다. 게다가 어린이 관객들에게도 그 자체로 재미를 느낄 만한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 말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복고 정서'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대표 키워드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픽사가 다시 한번 '사고'를 쳤다.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영화라는 분야 전체를 통틀어서도, 아이디어의 기발함과 스토리의 탄탄함, 게다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울림까지 삼박자를 두루 갖춘 손꼽히는 '작품'을 기어이 만들어내고 말았다.


<인사이드아웃>.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이 애니메이션은 보통의 흥행작들처럼 물량공세의 마케팅 활동이나 스크린 독점 등 외부환경에 의해 흥행을 '강요받지' 않았다. 소리 소문 없이 개봉해서 조용히 관객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전 세계 다수의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대거 쏟아져나오는 여름철 영화시장에서 당당히 살아남았다. 그것도 순위를 역주행하면서 말이다.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의인화한 캐릭터로 표현한 <인사이드아웃>은 11살의 '라일리'의 주요 감정을 형성하고 있는 5가지 감정들(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소심이, 까칠이)의 두뇌 속 활동을 그리고 있다. 뜻하지 않게 벌어진 사고로 인해 '기쁨이'(Joy)와 슬픔이(Sadness)가 감정 본부를 벗어나게 되면서 라일리는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되고,  라일리의 두뇌 속 세계를 떠돌게 된 '기쁨이'와 '슬픔이'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감정 본부로 돌아가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다.


기쁨과 슬픔. 인간의 모든 감정을 대표하는 감정이자 인간이 가장 '자주', 그리고 '많이' 느끼는 이 두 감정은 그동안 흑백논리처럼 양극단에 위치한 감정으로 이해되어 왔다. 기쁨의 반대 감정은 슬픔. 기쁨은 좋은 것. 슬픔은 나쁜 것. 기쁘면 행복하고, 슬프면 불행한 것. 이런 식으로 '기쁨'이 완벽히 긍정적인 위치에서 환영받아 온 감정인데 반해, '슬픔'은 완벽히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슬픔'은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곤 한다. 지금 내가 슬픈 상황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어떻게든 슬픔을 '견뎌내고', '벗어나서', 궁극적으로는 '이겼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고 믿는다.


<인사이드아웃>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에 대해 진지하게 반문한다.

 "행복은 과연 기쁨의 감정만으로 가능한가?"라고.  



라일리가 11살이 될 때까지 그녀의 감정을 지배했던 것은 '기쁨이'였다. 자녀는 태어나는 순간 부모에게 기쁨이 된다. 다른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존재만으로도 기쁨의 대상이다. 그래서 라일리의 부모는 갓 태어난 라일리를 보면서 "우리의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라일리를 사랑을 다해 키웠다.


어린 라일리에게 부모는 삶의 전부였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최고로 즐거웠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아빠의 목마를 타고, 엄마가 안아주는 것, 방안을 어지럽히며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이리저리 넘어져도 아빠와 함께 스케이트를 배우거나, 어린이 아이스하키팀에서 친구들과 경기하는 것 등.


라일리의 어린 시절의 모든 것은 즐겁고 재미났으며, 때문에 어린 라일리를 지배하는 핵심 감정은 '기쁨이'였다. 이는 비단 라일리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라일리가 대변하는 우리 모두의 유년시절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얼굴에 흙을 묻히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넘어지고 깨져서 아프다고 울어도, 우리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대체로 '기쁘고 즐거웠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기쁨이 주도하는 시기는 라일리가 11살이 되면서 급변하기 시작한다. 11살이면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게다가 이 시점에 라일리 가족이 고향 미네소타를 벗어나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라일리는 환경의 변화까지 겪게 된다. 소꿉친구 및 소속 하키팀과의 이별, 낯선 도시, 이삿짐센터의 실수로 자신의 짐은 도착하지 않고, 게다가 아빠는 새로운 사업 때문에 바빠서 라일리에게 신경 써 줄 틈이 없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환경의 변화 때문에 라일리가 감정 변화를 겪는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다. 낯선 환경을 마주한 라일리를 위해 5가지 감정 캐릭터들이 난리법석을 떠는 것은 라일리의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표현되는데, 이전까지 뒤에서 조용히 있었던 '슬픔이'가 갑자기 감정의 조절 핸들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핵심 기억'을 만지는 등의 '슬픔이'의 돌출 행동이 발생하자 이전까지 라일리의 감정을 리드했던 '기쁨이'가 반발하고, 그러면서 라일리의 감정 변화는 가속도를 탄다.



'슬픔이'는 라일리가 어린 시절 겪었던 여러 기억 들 중 '기쁨이'가 선별해 놓은 핵심 기억들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핵심 기억들은 라일리가 자라서도 잊혀지지 않는 것들로,  어린 시절 기억 중에서 '기쁨이'가 라일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즐거운 추억들로만 선별해두었던 기억들이다. 그러나 그 핵심 기억들에 '슬픔이'가 손을 대면 기억은 달라진다. 즐겁기만 했다고 여겨지는 그 핵심 기억들에 '슬픈 감정'이 들어가면서, '슬프기도 했던 ' 기억으로 바뀌는 것이다.


'기쁨이'가 반발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는 '행복관'에 대한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행복한 기억'='즐거운 기억'이라는 공식.


우리가 과거를 회상할 때, 즐거웠다고 생각되면 우리는 그것을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과거는 미화되고, 회고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왜곡된다. 특히 유년시절은 더욱 그렇다. 그때는 마냥 즐거워서, 이 세상의 어떤 슬픔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았다고 우리 모두는 종종 착각한 적은 없었는지.



인간의 두 기본적인 감정인 '기쁨이'와 '슬픔이'는 티격태격하다가 라일리의 일부 핵심 기억과 함께 본부에서 이탈하는 사고를 당한다. 라일리의 감정을 다스리는 본부는 감정을 통해 라일리의 인격 및 자아까지 통제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 중요한 곳을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이탈해버렸으니 문제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감정을 주관하는 본부에 남아있는 감정이라고는 '버럭이'와 '까칠이', 그리고 '소심이' 뿐이다.


덕분에 라일리는 변한다. 이전에 '기쁨이'가 리드해서 조정석을 잡았을 때는 라일리는 명랑하게 웃었고, 부모 말도 잘 듣는 착한 딸이었으며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 모범적인 아이였다.


그러나 버럭이와 까칠이, 소심이만이 남은 이상, 라일리는 더 이상 예전처럼 말을 잘 듣지도, 잘 웃지도, 사교적이지도 않다. 매사가 불만스럽고 짜증이 난다. 엄마 아빠보다는 혼자 있고 싶고, 학교생활도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변해버린 라일리를 되돌리기 위해 버럭이와 까칠이, 소심이가  더 노력하면  할수록,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될 뿐이다.  



감정 본부에서 버럭이와 까칠이, 소심이가 우왕좌왕하는 동안, 이탈한 기쁨이와 슬픔이는 본부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라일리의 두뇌 속 세계지만, 감정들이 돌아다니는 그 세계는 우주보다 더 넓어서, 기쁨이와 슬픔이가 이탈한 지역에서 본부까지는 지구와 달만큼이나 까마득히 멀고 멀다. 그럼에도 기쁨이는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내세워 어떻게든 본부로 돌아가려고 애쓴다. 반면 자기 때문에 라일리의 감정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슬픔이는 의욕이 없다.  


슬픔이의 이러한 생각은 사실 기쁨이로부터 세뇌된 생각이다. 슬픈 감정은 라일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슬픔이는 처음에는 기쁨이를 따라 본부로 가기 위해 노력하다가도 (이마저도 '기쁨이'에게 떠밀려 간신히 따라가는 인상을 주지만), 나중에는 "너는 라일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기쁨이'의 말을 듣고 그 노력마저 포기한다. 기쁨이에게, 그리고 (세뇌된) 슬픔이에게, 인간의 행복이란 "오직 즐거운 감정"만이었던 것이다.



<인사이드아웃> 우리에게 묻는다. 행복은 과연 기쁨만으로 가능한 것이냐고. 우리가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그 순간, 우리의 감정은 순도 100%의 기쁨만이 존재했던가. 아니면 기쁨이라는 감정이 50%, 60%, 70% 등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을 뿐, 다른 감정도 분명 존재했던가.


좀 더 깊게 생각해보자. 순도 100%의 기쁨이란 과연 가능한가.  기쁨뿐만이 아니다. 다른 감정들이 오직 배재된 채, 하나의 감정만이 100% 발휘되는 순간이 과연 있을까. 그것이 과연 이 세상에서 가능할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 일분이라도, 과연 하나의 감정만으로 어느 순간 가슴을 다 채울 수 있는가.


단언컨대, 없다. 결코.



'기쁨이'는 착각하고 있었다. 11년 동안 라일리는 많이 웃고 즐거워하면서 성장했고, 그래서 라일리는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순간순간에는 '기쁨이' 외에, '슬픔이', '소심이', '버럭이', '까칠이'가 늘 함께 있었다. 이 중 어느 하나의 감정이라도 배재되었다면, 라일리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내적, 외적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한다. 때문에 여러 가지 상황에 맞게 반응하는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해야만 시시각각 변하는 수많은 상황들에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재미있고 유쾌한 일이 벌어지면 기뻐하고 웃으며, 괴롭고 힘든 일이 생기면 울고 슬퍼하는 것이 마땅하다. 짜증 나거나 억울한 상황에서는 화가 나는 것이 자연스럽고,  미지의 세계 앞에서는 두렵고 소심 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며,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상황에서는 까칠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이 중 어느 하나의 감정이라도 배제된다면, 그 감정이 필요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 혹은 취하는 반응은 비정상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것이 된다.



사춘기를 질풍노도라고 부르는 것은 매사에 반항적이고 비딱한 시선을 가졌으며, 감정이 들쑥날쑥 해서 종잡을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됐다. '질풍노도'라는 말은 사춘기의 좋은 점도 담고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부정적인 의미를 더 많이 함축하는 단어다.


다시 말해, '기쁨'과 '슬픔'이 배제된, '분노', '소심', '냉소'의 감정이 주를 이루고 있는 사춘기의 청소년들을 보며, 사회(기성세대)는 '질풍노도'라는, 비정상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로 규정한다. 즉,  기쁨뿐 아니라 '슬픔'의 감정을 갖지 못한 것도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는 '슬픔'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을까. '슬픈 것'은 왜 좋지 않은 것이라고,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을까.


이쯤에서 <인사이드아웃>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냐고. 좀 더 정확히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떤' 감정을, '어떻게' 느껴야 하겠느냐"고 말이다.



픽사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언제나 그렇듯, <인사이드아웃>의 결말 역시 해피엔딩이다. '기쁨이'와 '슬픔이'는 감정 본부로 무사히 돌아가고, 라일리도 질풍노도의 시간을 무사히 이겨내고 한 단계 성장한다. 그 가운데서 비록 어린 시절을 지탱했던 유아적 사고와 가치관은 무너졌지만, 대신 청소년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가치관과 사고체계가 라일리의  마음속에 생겨났다.  


<인사이드아웃>은 그것을 라일리의 두뇌 속에 '새로운 성'이 생성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일례로 '어린 시절의 가족 성'은 사라지고, 보다 단단해지고 성숙해진 '청소년기의 가족 성'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그만큼 라일리가 성장했으며, 그에 따라 부모와의 관계도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우리들의 성장사를 그대로 표현한 모양새다.



그래서 <인사이드아웃>은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늘 그렇듯, 영화의 결말보다는 스토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핵심 주제를 찾게 된다. 앞서 말했듯, 행복의 조건은 '어느 하나의 감정도 배재되지 않는 ' 일차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행복은 '모든 감정이 배재되지 않는 것을 넘어서, 각각의 감정이 적당한 상황에서 올바로 작용하고, 그 자체로 인정받을 때' 가능하다. 이는 '슬픔', '분노', '소심' 등 부정적이라고 여겨지는 감정들도 예외가 아니다. 슬플 때는 마땅히 슬퍼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슬퍼할 권리'를 누리는 것이 행복이다. 


기억과 감정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감정들이 차별 없이 제대로 발휘되었을 , 인간은 '행복' 느낀다는 .  <인사이드아웃>은 이 평범하면서도 우리가 잊고 있던 메시지를 5가지 감정들의 '캐릭터화'를 통해서 설득력 있게 풀어가고 있다.  



라일리의 유년기 핵심 기억들은 기쁨이가 주도했었다. 그래서 기쁨이는 라일리의 '핵심 기억'들은 모두 '기쁜 감정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그 기억들 (영화에서는 '구슬'로 표현된다)을 다시 살펴본 기쁨이'는 자신이 작용하기 앞서 '슬픔이'가 먼저 작용했음을, 그래서 슬픔의 감정을 지났을 때 비로소 라일리가 '기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키팀 경기가 끝나고서 엄마 아빠와 마냥 기뻐했난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경기 패배로 침울해진 라일리는 슬퍼하고 있었고, 그것을 엄마 아빠의 위로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기쁨을 느꼈던 것이었다.


아마도 다른 기억들도 비슷할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는 라일리의 어떤 기억에서 각자의 역할대로 라일리가 충분히 다양한 감정을 느끼도록 관여했고, 그 감정들이 제대로 해소되었을 때 비로소 라일리는 '행복하다'고 그 시간을 기억할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알아챘다. '기쁨이'의 머리가 파란색이었음을. 영화를 볼 때는 몰입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다른 감정들과 달리, '기쁨이'만은 색깔이 두 개다. 얼굴과 몸은 노란색, 머리는 파란색.


이는 앞서 말했듯 '기쁨'과 '슬픔'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치다. 픽사 제작진은 캐릭터 설정에서부터 영화의 메시지를 담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틀림없다. '기쁨이'의 캐릭터 디자인을 통해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슬픔'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기쁨'을 극대화시켜주는 긍정적인 감정이라고. 물론 지나치게 슬픔에만 빠지는 것은 좋지 않다. 이는 긍정적인 감정이라고 일컫어지는 '기쁨'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감정이든, 그 감정에만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은 감정의 건강상태를 망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감정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슬픔'은 환영받아야 한다. 그것은 '기쁨'이 생겨나게 하는 통로이자, 우리가 '기쁨'을 '기쁨'이라고 인식하게 하는 비교 감정이 되기 때문이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기쁨'을 인지할 수 없다. 이는 24시간 '밤'만  계속된다면 '낮'이 무엇인지, '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성경의 창세기 1장을 보면 그 유명한 '천지창조' 부분에서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밤'이란 '낮'의 반대말이 아니라, '빛이 없음'을 뜻한다. 빛이 '있고' '없는' 것에 따라 우리는 밤과 낮을 구분하고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슬픔은 '기쁨이 없음'이고, '기쁨' '기쁨이 있음'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쁘기 위해서는 기쁨이 없는 상태, 즉 '슬픔'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인사이드아웃>은 그것을 '기쁨이' 캐릭터의 머리색이 '슬픔이'와 같은  파란색으로 표현해내었다.  



<인사이드아웃>은 이야기 자체로도 심플하고 쉽게 볼 수 있지만, 캐릭터 디자인, 설정, 스토리 등 하나하나가 굉장히 상징적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렵게 꼬아내지 않고,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상징으로 풀어낸 것이 놀랍다.


상상력과 기발함, 은유와 상징, 메시지까지 모든 면에서 <인사이드아웃>은 애니메이션의 신화를 다시 썼던 <겨울왕국>보다 그 완성도와 깊이에서 한 수 위다. 순간의 재미와 임팩트 면에서는 '노래'를 앞세운 <겨울왕국>이 강할  수밖에 없으나, '기발함'으로 모두를 '당연하게 설득시키는' 능력과 '쉽게 이해시키는' 능력에서는 <인사이드아웃>이 앞선다.  재미뿐만 아니라 철학과 심리학까지 아우르는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빙봉' 캐릭터도 매력적이다. <겨울왕국>의 '올라프'보다는 매력이나 임팩트가 약한 감이 없진 않지만, '빙봉'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많은 해석과 상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 있다. '기쁨이'와 '슬픔이'와 함께, 다른 감정들보다도 비중이 높게 다뤄진 '빙봉'은 우리의 어린 시절 자아를 상징하는 캐릭터다.


때문에 라일리가 성장하기 위해서 빙봉은 스토리 흐름상 애당초 사라져야 할 운명이었다. 관객 또한 이미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지만, 아마도 속으로는 우리 모두 예견했던 흐름이었다. 그럼에도 빙봉이 사라질 때 많은 이들이 아파했다. 어떤 관객들은 울었다고도 했다. 그만큼 우리는 빙봉, 즉 우리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추억한다. 모든 감정을 자유자재로 느끼고 보여주는데 제약을 받지 않았던 그 시절이 행복했기에.


'빙봉'은 라일리와 함께 달나라로 가야 한다고 외친다. 어린 시절 우리가 꿈꾸던 미지의 세계, 수시로 바뀌지만 그 자체로 즐거웠던 꿈들. 자라면서 어느 순간 잊어버렸던 그 꿈들은 우리 마음속에 있던 '빙봉'이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라지면서 함께 날아가버렸다.  



빙봉을 그리워하고 빙봉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면서도, 우리는 빙봉을 되살릴 수 없다. 되살려서도 안 된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야 아름다운 법. 지금 시점에서 빙봉을 다시 꺼내 든다면 그것은 아름답기보다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변형되고 말 것이다.


어린 시절이 아름다운 것은 '그 시절에 적합한 상태'로 우리가 느꼈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라서는 현재 상황에 맞는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라일리의  마음속에 유년 시절의 성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성들이 건설되었던 것처럼.


이런 점에서 <인사이드 아웃>은 "무조건 어린 시절이 좋았어"를 주장하지 않는다. 옛날이 그리운 것은 맞지만, 그 시절은  그때의 추억으로서 간직할 때 아름다운 거라고 주장한다. 아쉬워도 '빙봉'이라는 유년시절의 자아에게 이별을 고하고, 대신 '빙봉'과 논의했던 '달나라로 가는 꿈'을 꿈이 아닌 '기억'으로 간직해두기를 영화는 권하고 있다.


우리는 간혹 어린 시절의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의 자아는 어린 시절에는 분명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 빙봉을 버리지 못한 사람의 자아는 건강하지 않다. 어쩌면 나 또한 떠나보내기 싫어서 억지로 빙봉을 붙잡아 두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빙봉을 이제는 완전히 놓아주어야 할 것이다. 대신 '핵심 기억' 구슬에 빙봉과의 추억을 넣어두면 된다.



기억 처리반(Forgetter)의 존재도 흥미롭다. 영화 속에서 비중은 크지 않지만, 기억 처리반 캐릭터들 또한 '기쁨이'와 '슬픔이'가 라일리의 기억을 관장하여 '행복'을 느끼도록 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중요한 역할들을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기억 처리반들에 의해 영원히 무의식 속으로 사라져버린 내 기억의 구슬들이 궁금해졌다. 내 안의 '기쁨이'와 '슬픔이'가 선별하지 않고 걸러낸 기억 들인 만큼 나의 '행복'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기억들일 거라고 믿고 싶지만, 어쩌면 '기쁨이'와 '슬픔이'가 미처 선별해내기 전에 '기억 처리반' 멤버들이 실수로 처리해버린 기억들도 있을 가능성도 있을 테니까.


그 기억들을 과연 되찾을 수 있을까. 어느 날 문득, 나도 모르게 갑자기 생각나는 과거의 일들은 이처럼 실수로 처리되어서 무의식의 감옥에 갇혀있던 '기억'들이 다시 핵심 기억으로 자리 잡는 과정이겠지. 그 뒤에는 나의 기쁨이와 슬픔이가 활약했을 테고 말이다.



모처럼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였다.  지난여름에 봤지만, 겨울에도 여전히 생각나는 영화다. 아마 앞으로도 두고두고, 보고 또 보고 싶은 영화일 것이다. 설정의 기발함과 창의력에 놀랐고, 심도 있는 메시지와 놀라운 상징들에 놀랐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모두를 끌어들이는 재미가 있음에 또 놀랐다. 이런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할리우드의 아이디어와 기획력이 부러웠고, 이런 아이디어는 우리도 발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아쉬웠다.


전 세계적으로 애니메이션 시장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유례없는 호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기발한 발상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메시지를 녹여내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즐거웠다. 영화의 재미와 기발한 상상력에 웃음이 났다. 한편으로는 아련했다. 라일리가 성장하면서 사라져간 빙봉을 추억하니,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가슴 한 편이 먹먹했다. 어떤 관객들은 빙봉 때문에 울기도 했다. 초반에 라일리의 핵심 기억을 마구 만지는 '슬픔이' 때문에 살짝 짜증이 나기도 했고, 기쁨과 슬픔이 이탈한 본부에서 고군분투하는 나머지 감정들을 보며 걱정과 기대도 들었다.


영화 속 감정들만큼이나 다양한 내 안의 감정들이 반응하며 볼 수 있었던  <인사이드아웃> 덕분에,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행복"했었나 보다. 그리고 이 영화를 "기억"할 때면 '행복'할 것이다. 다양한 감정들이 자유롭게 반응하면서 볼 수 있었던 모처럼의 영화였기 때문에 말이다.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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