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의 창작 및 수용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고민
본 글은 2014년에 <디지털 시대의 문화읽기>(최혜실 저)를 읽고서 느낀 점을 썼던 글입니다. 3년전에 쓴 글이라 지금 시점에서는 올드할 수 있으나, 현재에도 일부는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21세기가 다매체, 다채널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당연함을 넘어 진부한 설명이 되었다. 국내만 해도 1995년에 케이블TV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다채널 시대가 열린지 벌써 20년이 넘었고, 보급률과 사용률에서 압도적으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인터넷 또한 초고속 인터넷망이 도입된 때가 1990년대 중반이다. PC통신까지 포함하면 우리 사회에 온라인 시대가 열린 것은 더 오래된다. 굳이 외국의 사례를 논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서 인터넷을 필두로 한 새로운 매체와 그에 따른 다양한 채널들이 문화 전반을 이끌고 있는 것은 이제 너무도 일상적인 현상이 되어버려서 다매체·다채널 이전의 시대가 어떠했는지 회상하기가 힘들 정도다.
인터넷을 포함한 디지털 매체가 과거 다른 매체와 비교해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뭐니 뭐니 해도 '쌍방향성(interactive)'이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 문화 텍스트가 존재하는 것은 TV나 라디오 등 기존 매체에서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던 바였다. 하지만 창작자와 수용자 혹은 공급자와 수요자가 콘텐츠에 동시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매체는 단연코 인터넷으로, 인터넷 세상에서 창작자(작가)는 하나의 콘텐츠를 창작하고 완성하는데 있어 더 이상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메시지는 매체(미디어)와 분리될 수 없다. 커뮤니케이션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학자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다. (Media is Message.)"라고 했다. 당연히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하면 메시지를 생성하고 완성하는 방법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매체의 출현은 문화 콘텐츠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바꿔놓고 있는데, 이는 크게 1) 창작 과정과 2) 수용 과정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창작의 측면을 살펴보자. 디지털 시대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창작자의 역할이 생산자(작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소비자(독자)에게로 확대되는 것이다. 디지털 매체에서 작가는 더 이상 전지전능하지도, 스토리의 흐름을 통제하지도 못한다. 그 역할의 많은 부분이 관객에게 넘어가면서 작가는 이제 큰 그림을 제시해주는 기획자 혹은 프로듀서로 변해버렸다. 독자(수용자)는 원하는 것을 선별해서 즐길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콘텐츠라도 독자의 취향과 의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스토리가 나올 수 있다. 일례로 인터넷 게임의 스토리 진행방식이 대표적인데, 전개되는 여러 스토리들은 전적으로 독자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며 작가는 캐릭터 설정과 전체적인 배경을 제시하는 역할에 주로 집중한다. 이 경우, 독자들이 '선별하여 읽는 과정'은 적극적인 수용 행위로, 넓은 의미에서 창작의 행위에 귀속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창작자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황에서는 “콘텐츠의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대두된다. 큰 틀을 제시한 것은 작가이지만 이야기의 세부전개를 진행시킨 것이 독자일 경우, 해당 콘텐츠의 저작권은 과연 어느 쪽에 귀속될 것인가.
2014년 네이버에서 연재했던 웹소설 [마인드 헌터]는 최초로 독자와 작가가 함께 스토리를 이어가는 방식을 택했던 콘텐츠였다. 각 화차마다 작가는 두 가지 옵션을 제시하고 독자들에게 선택을 맡긴 다음, 독자들이 선택한 옵션을 바탕으로 다음 화차의 스토리를 진행한다. 쌍방향성이 디지털 매체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지만, 인터넷 게임 외에 온라인 소설에서 독자들이 직접적으로 스토리를 선택할 수 있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원하는 스토리를 취사선택하는 선택적 수용 또는 창작자에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행위로 창작에 개입하곤 했다. 하지만 [마인드 헌터]는 독자가 다음 스토리의 전개에 절대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창작의 단계에 보다 더 깊이 관여한다. 총 52회로 완결된 이 소설은 연재 당시 독자들에게 평점 9.9라는 높은 점수를 얻으며 반향을 일으켰다.
[마인드 헌터]의 경우, 저작권은 기존의 콘텐츠들처럼 작가만이 가질 수 있을까? 1차적으로는 당연히 작가가 저작권을 갖겠지만, 작품의 완성도나 스토리의 전개에 직접 관여한 독자들 또한 저작 권리의 일부분을 가질 수는 없을까? 만약 독자들의 저작권리가 인정된다고 가정한다면, 과연 독자들은 저작권의 몇 퍼센트를 주장할 수 있을까?
이처럼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는 창작자와 독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쌍방향 특성상, 작가와 독자 간의 저작권 분할 여부에 대한 문제제기가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비단 창작 경계에 대한 이슈가 아니더라도 복제와 수정이 가능한 매체의 특성상, 매체 환경 변화에 맞게 저작권에 새로운 개념을 추가하는 등 저작권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는 있다.
최근의 저작권 강화를 위한 노력은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매체적 특성에 대해 저항하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인간과 디지털 미디어라는 거대한 두 세력이 충돌함으로써 저작권의 개념과 창작의 범위를 재규정하고, 궁극적으로는 디지털 예술의 새로운 양상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 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콘텐츠를 수용하는 모든 과정이 하나의 거대한 '놀이 행위(Entertainment)'가 된다는 점이다. 흔히들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는 문자, 이미지, 음향, 영상이 통합된 멀티미디어 콘텐츠라고 말한다. 문화콘텐츠 연구의 대가인 최혜실 박사 또한 문자 시대 이전에 발달했던 구비문학이 종합예술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현대의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는 과거의 구비문학과 닮아있음을 언급했다.
이를 고려할 때, 인류가 디지털 미디어를 급속히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단순히 편리함을 넘어서 구비문학 시절부터 계승되어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종합예술을 갈망하는 문화 유전자가 깨어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종합예술은 근본적으로 놀이와 통한다. 인간은 두 개 이상의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행위를 통해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떠올려 봐도, 시각과 청각, 청각과 촉각, 후각과 미각 등 대부분의 놀이 행위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감각을 사용하면서 이루어진다.
디지털 미디어는 인간의 감각을 최소한 두 개 이상 동시에 사용하도록 만드는 특성을 지녔다. 기본적으로 스크린(시각)과 마우스 또는 키보드(촉각)가 존재하는데다, 많은 경우 영상 및 플래시 등 청각 요소들이 더해지곤 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예술작품을 진지하게 감상하는 행위와는 다른, 한바탕 즐기고 마는 가벼운 놀이로 문화 콘텐츠를 소비한다. 과거에 비해 킬링 타임용 문화 콘텐츠가 급속도로 많아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대변한 것이다.
어느 시대든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보존성이 아니라, 그 순간에 얼마나 즐거웠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성'과 '즉시성'이었다.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현대에 놀이의 이러한 속성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비' 행위로, 무언가를 사는 것은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과도 같기 때문에 '사는 것'(구매)과 '사용하는 것'(소비)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사람들은 이 소비의 과정 자체를 즐거움(놀이)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소비가 이루어지는 범위가 물건(제품)만이 아니라 무형의 서비스(브랜드)까지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인 소비가 우리 생활 전 영역에 퍼져있다는 것은 놀이의 문화가 그만큼 우리 생활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골치 아픈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마음을 쏟지 않으며, 치열한 경쟁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살면서 지쳐버린 심신을 소비라는 놀이를 통해 치유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디지털 시대에서 문화콘텐츠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미'다. 예술영화와 독립영화가 왜 다수의 사람들에게 소비되지 않는지, 진지한 톤과 무거운 주제를 가진 콘텐츠를 사람들이 왜 부담스러워하는지는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다.
대학원 시절, 한 토론수업에서 전통적인 방식의 종이책과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전자책의 차이를 표현한 키워드는 '소유'와 '소비'로 정의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둘 다 자본(돈)으로 할 수 있는 행위이긴 하지만 보존의 의무가 없는 '소비'가 좀 더 편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놀이에 더 가깝다고 보며, 이것이 전자책 혹은 이북이라는 매체가 갖는 이미지가 좀 더 가볍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종이책이 전하는 진지함과 무거운 이미지는 지식을 소유한 대가로 보존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부담감이 내재된 때문이 아닐까. 반면 전자책이 담고 있는 멀티미디어 콘텐츠는 소비를 통해 '즐기고', '누리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내용이라고 종이책의 텍스트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 맞는 톤과 방법으로 수정하는 것은 필수다. 미디어가 메시지가 되는 것처럼 메시지 또한 미디어 특성에 맞게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디지털 환경에 걸맞은 콘텐츠를 개발하려면 “과연 이 콘텐츠가 놀이의 행위를 제대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전제되어야 한다.
놀이의 핵심인 재미의 극대화를 위해 디지털 미디어는 현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변형시켜왔다. 물론 디지털 시대 이전에도 문화콘텐츠의 현실왜곡과 변형은 있었다. 소설이나 희곡 속의 배경은 현실처럼 보이게 만든 가짜 현실이었고, 그림이나 사진이 담은 이미지 또한 작가의 시각으로 변형된 가짜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 매체 환경이 담아내던 현실은 가상현실이긴 해도 진짜 현실과 닿아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일어날 법한 이야기' 혹은 '진짜를 똑같이 모방한 이미지'였기 때문이었다.
반면. 디지털 미디어가 구현하는 가상현실은 현실의 리얼리즘과 개연성을 아예 일부러 배제시키면서 가상현실을 가상현실로만 즐기게 만든다. 독자들의 취사선택을 통해 다양한 버전으로 변형·생성된 콘텐츠에 개연성이나 논리가 중요할 리 없다. 황당무계하고 말도 안 되는 스토리라도 독자들은 그것을 선택했기에 얼마든지 그 콘텐츠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다만 디지털 매체의 가상현실은 해체가 쉬운 말랑말랑한 구조인데다 시간과 사건이 순차적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독자는 그 가상현실에 몰입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조하는 입장을 유지한다. 이는 디지털 문학에서는 독자가 기존의 작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세뇌되지 않는 것과도 통한다.
한편, 개인들의 주관적 취향과 즉흥적 선택이 우선시되다 보니, 콘텐츠의 완성도에 대한 의문을 품는 이들도 많아졌다. 소비가 놀이가 되는 현상은 제품의 물리적인 퀄리티가 아니라, 제품이 갖는 기호, 다시 말해 제품의 브랜드 가치에 집중할 때 발생한다. 디지털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스토리의 개연성이나 리얼리즘, 완성도보다는 스토리를 읽는 과정이나 디자인 레이아웃, 제목, 다른 독자들과의 의견공유 및 댓글 수다 등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과 쾌감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작품을 물건이라고 본다면 물건의 품질(완성도)보다는 브랜드(재미, 놀이)가 더 중요하다. 브랜드가 내포하는 기호의 가치는 인간의 과시욕과 즐거움, 즉 재미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소비 행위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디지털 미디어에 빠져드는 것은 이런 점에서 당연하며, 이는 (지독한 경쟁 구조에 시달리는 것의 보상심리 때문이겠지만) 유달리 소비의 기호 가치에 몰두하는 한국사회에서 디지털 미디어가 유독 발전하고 있는 원인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디지털 콘텐츠는 전통적인 매체에서 생산된 콘텐츠에 비해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디지털 콘텐츠는 소비 행위가 전제된다는 점에서 상업적이지만 그것이 예술성이 없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너무 극단적이다. 단언컨대 예술과 상업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예술과 상업이 협력하는 것이 예술성을 떨어뜨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장 이상적일 수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디지털 매체는 이러한 예술의 이상향을 추구하는데 적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과거의 문자로만 이루어진 종이책은 이런 관점에서는 오히려 예술의 이상향에 가장 멀었던 매체가 아니었을지.
문자와 활자술은 지식의 확장과 평등화를 가져오는 엄청난 혁명이었으나, 뒤로 갈수록 예술을 고매하고 위대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일반 대중들의 등급을 나눠버리는 또 다른 계급을 만드는데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계급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활자술 이전에는 소수의 지배계급이었다면 활자술 이후에는 대중 혹은 민중들이었다는 것이 달라졌을 뿐.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서는 다양한 의견과 시각이 공존하고 충돌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계급화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변화의 최전방을 이끄는 분야가 바로 '문화예술'이다.
따라서 하나의 콘텐츠가 얼마나 예술적인지 혹은 얼마나 상업적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콘텐츠는 예술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지니며, 동시대의 미디어 환경과 콘텐츠 발전에 나름대로 기여한다. 개인적으로 썩 좋아하는 용어의 구분은 아니지만, 흔히들 말하는 순수예술과 대중문화로 구분할 때, 순수예술은 작품성이 훌륭하고(다른 말로, 예술성이 좋고), 대중문화는 상업적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예술성과 상업성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 두 개를 모두 잡은 작품은 '명작'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예술성과 상업성을 분리시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예술이 반드시 진지하고 시대정신만을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벼우면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왜 영화제에서 로맨틱 코미디나 가족물, 판타지, SF 장르는 대상을 받지 못할까. 왜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라고 구분함으로써 영화라는 분야에 일부러 한계를 만들려는 시도를 할까. 처음부터 상업성을 고려해서 창작된 작품의 예술성은 왜 충분히 인정되기 어려울까. 과연 디지털 미디어 환경을 기반으로 탄생한 작품들은 예술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나의 콘텐츠를 소비할 때 그 콘텐츠의 내용보다 그 콘텐츠의 장르에 더 집중하는 오류를 우리 모두는 자주 범한다. 똑같은 춤을 발레복을 입고 발레리나가 추면 예술성 높은 순수예술이 되고, 힙합 옷을 입은 사람이 추면 하위문화로 평가받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스토리라도 유명 출판사를 통해 종이책으로 출간될 경우와 인터넷의 어느 커뮤니티에서 공개되는 경우, 예술성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곤 했다. 결국 지금까지 예술이라고 평가했던 수많은 작품들도 어쩌면 작품 자체의 우수성이 아니라 미디어 환경 때문에 그렇게 평가됐을 가능성이 더 높을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술에 대한 기존 관념은 확실히 바뀔 필요가 있다. 물론 상위문화와 하위문화의 구분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의 가치 등급을 매기기 위함이 아니라, 카테고리 혹은 장르의 차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디지털 콘텐츠는 상업적이기 때문에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준점을 세운 후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인터넷 소설이니까 장르문학, 하위문학이다”라고 규정할 것이 아니라, 기존의 순수문학에 포함되었던 문학들과 한데 섞어서 "소유와 소비 중 어느 행위가 더 많이 나타나고 있는가"에 따라 분류하는 방식 등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가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는 순간을 경험한 것은 개인적으로 크나큰 행운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지인들 대부분은 아날로그 시절의 추억과 그 시절 누렸던 문화 콘텐츠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재밌게도 아날로그 시절을 그리워하면서도 디지털 시대의 미디어를 습득함에 있어서는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는다. 추억은 언제나 미화되기 마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현재의 변화에 더없이 빠르게 적응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오랫동안 아날로그 문화 콘텐츠에 익숙했던 사람들조차도 디지털 매체의 콘텐츠를 받아들이길 거부하지 않는 까닭은 디지털 세상이 완성도(퀄리티)의 차이를 따지기보다는 즐거움이라는 놀이의 행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0과 1이라는 비트 단위로 개성을 획일적으로 처리해버린다고 비판할지도 모르지만, 고급과 저급의 구분을 “의도적으로” 해체시켜서 예술과 상업을 통합하려고 시도하고 문화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시대로 이끄는데 일조한 것은 오히려 디지털 매체였다.
작가와 독자 간의 사라진 경계, 작가의 역할 변화, 이해에서 놀이가 된 읽기 행위, 완성된 텍스트의 보존 대신 데이터베이스에 언제든 해체가능 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 개연성과 리얼리즘의 포기, 가상과 현실의 뚜렷한 경계, 그리고 구비문학 시대로의 회귀까지.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변화가 상당함에도 우리는 이런 변화를 감지하는데 민감하지 않다. 그저 디지털 환경에서 구현되는 문화 콘텐츠를 즐기고 향유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것은 디지털 미디어 세상이 가져온 문화향유 방식의 변화를 나름 민감하게 관찰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자세다. 여전히 원천콘텐츠의 역할을 여전히 감당하고 있는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근대 문학이나 현대 사회에 출현한 장르를 바탕으로, 디지털 시대에 기존의 콘텐츠 장르와 어떤 차이가 있으며 기존 콘텐츠 장르의 어떤 점을 향후 디지털 매체에 어울리는 콘텐츠로 차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어쩌면 이 과정 자체가 디지털 환경의 가장 큰 특징인 '하이퍼텍스트' 소비와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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