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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비키 Aug 02. 2017

천재(the great)를 갈망하는 집착과 광기의 변주

영화 '위플래쉬'

영화 <위플래쉬>(Whiplash, 2014)는 제 74회 골든글로브에서 7개부문을 휩쓴 <라라랜드>(La La Land , 2016)의 감독 데미언 샤젤(Damien Chazelle)이 감독한 작품이다. 영화는 드럼 연주를 매개로 위대해지고 싶은 젊은 학생과 스파르타식 교육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선생 사이의 대립을 다루고 있는데, 강압적인 방식의 교육이 옳은 것인가를 묻는 표면적인 질문 안에는 ‘과연 예술은 모든 것을 희생시켜가며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담겨 있다. 2014년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등을 수상했고, 국내에서도 독립영화 외화부문 1위(158만)를 차지하는 등, 국내외에서 뜨거운 돌풍을 일으킨 작품이다.



선뜻 답을 내리기 어려운, 그러나 몰입되는 대립


21세기 대중문화 산업은 그야말로 스토리의 홍수다. 문학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극영화부터 예능, 다큐 같은 리얼리티가 강조되는 장르, 심지어는 사실을 전달하는(전달한다고 여겨지는) 뉴스조차도 스토리라인이 없으면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중 '영화'는 스토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멀티미디어 관련한 최신 기술이 결합된 종합 장르다. 물론 나날이 커져가는 제작비 규모에 비해, 스토리의 짜임새는 약해지고 있다는 비판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영화에 대한 환상 내지는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곤 한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좋아하는 여가생활로 극장에서 영화보는 것이 압도적인 1위(2014)라는 조사가 나올 정도로 영화광인 사람들이 많다.


잔인하거나 공포물을 제외하면 장르를 가리지 않는 편인 '스토리광'으로서, 언제부턴가 ‘엔딩이 명확하지 않은 열린 결말의 스토리'를 좋아하게 됐다. '내 맘대로의 상상'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은, 영화라는 것이 완성된 편집본으로 선보이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개입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또는 “저렇게 되었을 것이다”라는 여러 ‘가설’을 세워두고 다양한 생각을 해보는 것은 허접하나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는 놀이이자 영화가 주는 이차적인 재미다.


영화 <위플래쉬>는 재밌으면서도 어려운 영화였다. 비교적 명확히 전개되는 스토리 라인 덕분에, 의견이 분분했던 엔딩조차 스토리흐름 안에서 쉽게 해석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위플래쉬>는 어려웠다. ‘두 캐릭터의 대립 구도’라는 스토리라인은 극히 단선적인데, 극의 전체적으로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 매 순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고, 한편으로는 진부했지만, 오랜만에 ‘명품’의 느낌도 풍긴다. 이 복합적이고 이중적인 느낌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이후에 영화를 상기할 때마다) 계속 이어졌다.



영화 <위플래쉬>는 기본적으로 천재 드러머를 꿈꾸는 ‘앤드류(마일즈 텔러 분)’와 학생들을 최고의 실력가로 키우는 폭군선생 ‘플레처(J.K. 시몬스 분)’의 갈등과 대립을 다룬다. 반면, 마지막에 극한의 대립 상태에서 한계를 돌파한 앤드류와 그를 바라보는 플레처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장면으로 두고 "과연 이들이 통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만큼, 이들의 대립 속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교감’도 다루려했던 노력의 흔적도 일부 보인다.


<위플래쉬>를 말할 때 대부분 천재에 집착하는 두 사람의 광기가 충돌한 것에 초점을 둔다. 이 영화는 일차적으로 악명 높은 선생과 재능을 지닌 학생 간의 이분법적 대립, 즉 스승과 제자라는 상하계급 간의 갈등, 선과 악의 충돌, 재능을 가진 자와 그 재능을 수탈하는 자의 싸움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플레처가 ‘악인'’이냐는 관점에 대해서는 엔딩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는 것에서 보듯 반대의견이 있을 수 있음으로 일단 논외로 하자.


음악 대학의 신입생인 앤드류는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를 꿈꾸며 연습에 매진하다 플레처의 눈에 띤다. 플레처는 학생들을 최고의 실력가로 키워냈지만, 인격모독에 가까운 폭언도 서슴지 않아 악명이 높은 교수다. 하지만 ‘천재(one of the Greats)’가 되고 싶은 앤드류는 플레처의 비인격적인 교수방법을 얼마든지 감내할 만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앤드류는 자신도 모르게 (그리고 관객도 눈치채지 못하게 서서히) 점점 변해간다. 천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욕망'으로 변질되면서 '천재'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앤드류의 모습은  플레쳐와 꼭 닮았다. 여자 친구에게 무례한 방식으로 이별을 통보하고도 조금도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장면은 앤드류가 플레쳐처럼 변하는 순간을 표현한 상징적 장면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비인격적인 플레쳐의 모습에 앤드류는 반항을 하게 되고, 뒤로 갈 수록 두 사람의 대립은 더욱 극렬해진다.  앤드류와 플레쳐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에게 타격을 가한다. 가령 앤드류가 플레쳐에 대해 익명으로 증언을 한 탓에 교수직에서 물러난 플레쳐가 앤드류에게 일부러 잘못된 연주곡 정보를 알려줘서 앤드류가 연주회에서 망신을 당하게 하는 식이다.

 

오랜만에 선 연주회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한 것은 앤드류의 오기를 일깨운다. 마지막 연주장면은 앤드류와 플래쳐가 벌이는 처절한 대립 현장이었다. 앤드류는 무대로 올라가 단원들에게 직접 큐 사인을 주며 드럼을 연주한다. 플래쳐가 여전히 지휘석에 서 있었지만, 싸움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앤드류는 플레쳐의 방해에도 아랑곳없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드럼을 친다. 피가 튈 정도로 미친 듯이 스틱을 내리치는 앤드류의 모습은 내면의 광기가 완전히 폭발해버린 모습이다.


감독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카메라워크와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힘든 빠른 손놀림의 연주 장면을 매우 공들여서 자세히 보여준다. 그 장면을 보는 관객들이라면 누구나, 앤드류가 광기를 폭발하는 그 순간이 바로 그가 그토록 원했던 '천재'의 경지에 들어섰음을 깨닫게 될 정도로.


광기어린 연주가 끝나고 앤드류는 플래쳐를 바라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앤드류와 마주친 플레처의 눈빛이 모호했던 것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됐지만, 영화 스토리의 흐름상 신들린 연주로 음악 속에 몰입해버린 앤드류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패배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앤드류와 플레처, 두 중심인물의 대립과 갈등을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영화에서 앤드류와 플래처는 분명 다른 인물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행동이나 대사, 카메라의 구도 등을 고려해보면, 두 사람은 사실 같은 사람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앤드류와 플레처는 서로 같은 인물(즉 앤드류의 또 다른 자아로서의 플레처)의 다른 인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테면, '지킬과 하이드'의 변형인 셈이다.



앤드류의 또 다른 자아, 플레처


앤드류와 플레처, 이 둘은 언뜻 보기에 제자와 선생 사이이고, 앤드류에게 강요와 폭력을 사용하는 플레처는 앤드류와 대립하는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플레처는 앤드류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천재에 대한 집착'을 대변하는 앤드류의 또 다른 인격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음악학교 신입생인 앤드류는 처음부터 ‘천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존재였다. 이는 버디 리치의 음반을 반복해서 듣고, 밤새 홀로 연습실에 남아 드럼을 두드리는 모습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천재가 되고 싶었던 앤드류는 자신의 그 소원을 형상화한 또 다른 자아 플레처와 만나게 된다. 천재가 되고 싶다는 앤드류의 바람은 처음엔 보통의 음악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품을 수 있는 꿈이었을 것이다. 천재 드러머의 음반을 듣고, 그의 음악을 동경하며 열심히 연습하는 그의 모습은 여느 음악 대학생들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인격인 플레처가 앤드류 앞에 육화되어 나타나는 순간, 앤드류의 꿈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을 수 있는 꿈의 모양에서, 경쟁자의 몰락을 기뻐하고 자신의 패배는 받아들이지 않는 집착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 버린 광기의 단계로. 앤드류는 그렇게 변해갔다. 꿈을 품었던 보통의 학생에서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리는 광기의 사람으로 말이다. 플레처의 눈에 들어 교내 최우수 재즈 밴드에 들어갔을 때만해도 앤드류는 설렜었다. 플레처가 소심한 다른 학생을 누명을 씌워 쫓아내는 걸 보면서 잠시 놀라긴 했지만, 이내 플레처의 격려 한 마디에 앤드류는 악독한 플레처의 교수법도 기꺼이 수용하는 자세를 취한다.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엄마의 몫까지 합해서 사랑으로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앤드류였다. 극 중의 앤드류 아버지는 앤드류가 플레처와 같은 성품을 가지도록 키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원래의 앤드류라면 타인을 괴롭히고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사람에 대해 속으로라도 반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플레처에게 반감을 갖지 않는다. 단지 두려워할 뿐이다. 오히려 그의 교수법을 기꺼이 따라가고, 플레처의 눈에 들어 메인드러머 자리를 차지하기 몸부림을 친다.


앤드류가 플레처에게 보인 태도는 반감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천재로 가는 길’을 봉쇄당하는 것이며, 천재가 될 기회를 놓쳐버린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천재가 되고자 했던 앤드류의 갈망은 그의 타고난 성품과 사랑으로 길러주신 아버지의 가르침, 자신에게 예쁜 미소를 보내주었던 여자 친구의 마음까지도 가차 없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크고 강렬했다.



앤드류의 갈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앤드류를 향한 플레처의 악행도 커진다. 앤드류가 아무리 노력해도 플레처의 템포를 맞추지 않으면 가차 없이 앤드류의 뺨에 손을 대고, 연주하고 있는 앤드류에게 갑자기 위험한 물건을 던지기도 한다. 새벽 두시까지 극도의 스피드로 땀과 피를 쏟게 하며 연습을 시킨다. 폭언은 기본이고 예고 없이 다른 경쟁자를 데려와서 앤드류의 기를 꺾어놓기도 한다.  


플레처는 자신가 원하는 템포를 맞추지 못한다면서 “지금 네가 연주하고 있는 템포가 빠른 것 같냐 아니면 느린 것 같냐”고 묻는다. 플레처가 원하는 템포는 플레처만 알 수 있는 게 당연하다. 그가 원하는 템포를 타인이 아주 미세한 차이까지 알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플레처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플레처는 묻고 또 묻는다. 대답하지 못하는 앤드류의 뺨을 때리는 모욕을 주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앤드류가 플레처를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천재가 되고 싶다'는 그의 욕구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내면의 욕구가 실체화된 플레처는 앤드류의 자아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앤드류 옆에 있을 수 밖에 없으며, 앤드류는 천재가 되고픈 욕망을 품고 있는 한 플레처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극 중에서 플레처의 '그 템포'를 결국 앤드류가 알아내는 것은 플레처가 앤드류의 또 다른 자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꿈과 욕망, 끈기와 집착, 그리고 열정과 광기


꿈은 인간에게 무엇일까. 욕망은 꿈의 어느 지점부터 시작될까. 꿈을 긍정의 뜻으로, 욕망을 부정의 뜻으로 수용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과연 꿈과 욕망의 경계를 구분할 수 있을까?


앤드류는 구분하지 못했다. 그는 '천재'라는 꿈이 욕망으로 넘어가는 갔음을 알지 못해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여자 친구를 배신하고, 자신을 학대하는 플레처에게 휘둘렸다. 꿈을 가지고 밤새 연습을 하던 초반의 모습처럼, 영화 중반에도 앤드류는 메인드러머가 되기 위해 손에 피가 나도 연습을 쉬지 않는다.


스틱을 휘두르는 앤드류의 모습은 영화 초반이나 중반이나 같다. 그러나 초반의 앤드류는 꿈을 가지고 연주하고 있었지만, 중반의 앤드류는 욕망으로 연주하고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꿈을 품고 연주하던 앤드류에게 플레처가 나타났다면, 욕망을 안고 연주하는 앤드류에게는 플레처가 나타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앤드류의 자아는 플레처의 자아로 통제권이 넘어간 탓이다. 따라서 극중에서 앤드류가 꿈에서 욕망으로 넘어가는 지점은 영화 초반, 플레처가 앤드류에게 나타나던 시점부터다. 감독은 영화 초반에 이 장면을 배치하면서, 영화 내내 "꿈과 욕망의 경계에서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꿈을 선택하느냐, 혹은 욕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향방은 자동적으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꿈을 선택한 사람은 끈기를 가지고 꿈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을 부여받는다. 반면 욕망을 선택한 사람은 욕망에 집착한 나머지 종국에는 광기를 표출하고 만다. 사람들은 그래서 누구나 욕망보다는 꿈을 선택하길 원한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우리 대부분은 앤드류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꿈이 아닌 ‘욕망’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에게 나의 템포에 맞출 것을 강요하고, 그 강요를 정당화시키는 것. 나의 템포를 맞추지를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다수의 폭력과 침묵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을 뿐더러, 우리 스스로가 그 다수에 속해있을 때가 많다.



앤드류의 욕망은 집착을 낳았다. 그 집착이 어찌나 심했던지, 앤드류는 원래의 메인드러머의 악보가 자기 때문에 없어졌는데도, 그에게 미안한 마음보다 그 사람이 악보를 외우지 못했다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이 메인드러머가 된 것을 마냥 기뻐한다. 반면 플레처가 또 다른 메인드러머 경쟁자를 데려오자, 앤드류는 처음으로 플레처에게 대들만큼 강하게 반발한다. 앞서 자신 때문에 다른 동료가 메인 드러머의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던 아픔을 그제서라도 앤드류가 이해했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감독은 그 지점에서 일차로 앤드류가 욕망의 길에서 다시 꿈의 길로 되돌아올 기회가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앤드류는 그 지점에서 브레이크를 밟기는커녕, 엑셀레이터를 더 강하게 밟을 뿐이었다.


다행히(?) 앤드류는 메인드러머 자리는 지켜낸다. 욕망의 강렬함이 멈출 수 없는 강한 집착이 되다보니 간신히 그 집착의 결과물은 얻은 셈이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앤드류는 공연 당일에 버스 타이어가 펑크 나고 교통사고까지 났는데도 불구하고 메인드러머의 자리를 놓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른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치료를 받으러 가야하는데도, 앤드류는 손에서 스틱을 놓지 못했다. 메인드러머 자리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집착이 어느 샌가 앤드류를 삼켜버린 것이다. 천재드러머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지만, 이 지점에 이르자 앤드류에게는 천재드러머라는 꿈보다는 플레처의 악단에서 메인드러머를 뺏기지 않겠다는 집착만 남아 있었다.


꿈이 욕망으로 변질되는 순간. 꿈은 점차 보잘 것 없는 모양새로 조금씩 생기를 잃어간다. 천재 음악가가 되겠다는 것을 꿈의 상태로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앤드류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폭언과 무력을 행사하는 플레처 악단을 과감히 뛰쳐나와, 조금은 낮은 수준일 수도 있는 다른 악단으로 갈 수도 있다.  또는 플레처 악단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동료들과 불화를 일으키지 않고,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몸을 먼저 치료하여 다음에 더 좋은 연주를 기약할 수도 있었다. 자신을 지지해주던 여자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고서, 나중에 외로울 때 다시 전화했다가 그녀를 영영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조금 돌아간다고 해서 꿈과 미래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앤드류는 그걸 몰랐고, 그래서 조급했다. 꿈은 기다림을 가능하게 하지만, 욕망은 그렇지 않다. 조급증은 반드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들지만, 강렬한 욕망에 유혹당한 앤드류는 조급했고 플레쳐의 인격에 지배당했다.



욕망의 자아와 하나 되는 순간, 집착을 넘어 광기로



욕망을 쫓은 앤드류가 얻은 건 무엇일까. 플레처의 모욕을 감내하며,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스틱을 놓지 않으면서까지 앤드류가 얻고자 했던 것은 '천재'라는 타이틀이었다. 손가락이 망가지면 영영 연주할 수 없는데, 교통사고로 몸이 부서지면 영영 연주를 못할 수도 있는데, 자신의 몸과 자아를 학대하면서까지 스틱에 집착하는 앤드류의 모습은 '천재'에 집착한 플레처가 100% 발현된 모습이었다.


앤드류가 또 다른 자아인 플레처와 완전히 합쳐지던 순간, 앤드류의 집착은 광기로 변한다. 결과는 참혹했다. 원대한 꿈을 잃어버리고 대학교 악단의 메인드러머에 집착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상태로도 연주를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결국 연주도 망치고, 무대 위에서 플레처에게 달려들면서 제적까지 당하고 만다.


욕망이 아닌 꿈이었다면, 그 작은 연주회 한번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그에게 다른 결과를 선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앤드류는 내면의 욕망에 굴복당한 상태였다. 스틱을 잡고 펴지 못하는 그의 손은  왜곡된 욕망에 집착하는 앤드류의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욕망에 집착했던 앤드류는 연주도 망쳤고, 제적까지 당했을 뿐더러, 그토록 사랑했던 음악까지 포기하는 상황에 이른다.


플레처도 교수에서 잘렸다. 앤드류의 아버지가 아들의 상태를 걱정한 탓이다. 아버지는 알았을 것이다. 꿈을 품고 밝게 빛났던 아들이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 욕망에 사로잡혀 집착과 광기에 빠져버린 모습을. 아들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액셀레이터를 밟으며 가고 있는 욕망의 길로부터 아들을 되돌리는 것이었다. 이미 멀리까지 와버린 앤드류였기에, 되돌리기 위해서는 아들 곁을 맴도는 플레처를 완전히 떼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설득한다. 그리고 욕망의 길에서 잠깐 멈춘 앤드류는 잠시나마 광기에 빠졌던 정신을 회복했다. 플레처의 악행을 익명으로 증언하고, 자신의 삶에서 음악을 지워버린다. 플레처의 악행을 증언하는 것은 또 다른 자아인 욕망과 집착의 ‘플레처’ 인격을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는 앤드류 내면의 결심을 의미한다.


앤드류는 버디리치 음반을 버리고 드럼을 창고에 넣음으로써 플레처 인격에게 일시적인 사형선고를 선포한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사람의 욕망이 그리 쉽게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슬프게도, 우리의 욕망은 한 번 자아의 통제 밖을 벗어난 경험을 하고 나면, 그 맛을 좀처럼 잊지 못한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우리 내면에서 죽어있다 할지라도, 호시탐탐 다시 살아날 기회를 엿보는 것이 우리의 욕망이다.


플레처는 살아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앤드류를 자신이 연주하는 클럽으로 이끌었고, 앤드류에게 영화 초반 다정하게 다가갔던 것처럼, '천재를 키우고 싶어서 일부러 가혹하게 했다'는 감언이설로 앤드류의 동정과 공감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아직 꿈의 길, 원래의 긍정적이고 밝은 길로 완전히 돌아가지 못한 상황에서, 앤드류는 자신의 발목을 잡아끄는 플레처의 유혹에 다시 넘어간다. 마음 속 깊이 묻어두었던 욕망의 도구들. 창고 속에 넣어두었던 먼지 쌓인 드럼을 다시 꺼낸 것이다. 그것이 꿈으로 변할 때까지 충분한 숙성시간을 가졌어야 했음에도 말이다.


욕망은 사악한 뱀 같아서, 우리가 다시 꿈의 상태로 돌아갈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욕망의 유혹이 올 때 과감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하지만, 앤드류가 그랬듯이 아무리 굳게 결심해도 사람은 누구나 욕망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앤드류는 결국 또 당하고 만다. 욕망을 벗어나려고 했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욕망은 더 무서운 모습으로 앤드류에게 복수를 가했다. 알지도 못하는 곡을 연주함으로써 공개적인 망신을 준 것이다. 의기양양하게 앤드류를 향해 웃어 보이는 플레처의 모습은 앤드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네가 이러고도 나에게 저항할 수 있어? 넌 평생 나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 욕망을 위해 끊임없이 집착해라. 집착하고 또 집착해서 네가 가진 광기를 폭발시켜라. 미친 놈처럼. 너의 욕망에 속박되어, 영원히 나의 노예로 살아!”


무섭고도 소름끼치는 목소리 아닌가? 문제는 이러한 내면의 목소리를 우리 모두가 갖고 있다는 점이다. 꿈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꾸는 것인데, 이 꿈의 뒷면은 이와같은 어둠의 욕망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욕망의 화신, 플레처에게 앤드류는 처절히 패배했다. 무대 위에서 대 망신을 당하고 의기양양한 플레처의 조롱을 뒤로 한 채, 힘없이 나가는 앤드류의 어깨는 한없이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실패한 아들을 꼭 안아준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욕망의 세계에서 실패는 조롱의 대상이지만, 꿈의 세계에서 실패는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다. 앤드류의 아버지는 이 실패를 통해 아들이 다시 욕망의 길에서 돌아 나오길 바랐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다짐했던 ‘욕망의 단죄’는 실패했지만, 다시 이번의 실패를 통해 아들이 플레처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니까.


앤드류는 아버지의 사랑에 속죄 아닌 속죄를 하기 위해 플레처로 달려 나간다. 그리고 시작되는 앤드류의 연주. 큐 사인을 낼 수 있는 사람은 플레처뿐이지만, 플레처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한 앤드류 또한 큐 사인을 낼 수 있다. 다만 플레처는 또 다른 인격인 앤드류가 큐 사인을 내는 걸 용납하지 않았을 뿐이다.



예전 같았다면 앤드류는 플레처가 두려워서 플레처에게 굴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꼭 안아주던 아버지의 격려는 앤드류에게 플레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었다. 눈빛으로 위압을 가하는 플레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앤드류는 자신의 욕망의 덩어리를 드럼에 실어 폭발시켜버린다. 그리고 이런 앤드류의 연주 앞에 플레처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 없다.


상황은 역전되어 큐 사인을 주는 앤드류에게 플레처가 따라가는 구도로 변한다. 그 가운데서 플레처와 앤드류의 주도권 싸움이 계속 벌어지지만 최후의 승자는 결국 앤드류였다. 서로 주고 받으면서 주도권의 우위를 쥐고 있던 힘의 균형은, 마지막 앤드류가 ‘카라반’을 연주하며 자신의 광기를 모두 폭발시켜버리는 순간 모두 깨져버렸다.


꿈의 길에서 욕망의 길로 잘못 들어섰다면 다시 그 길을 되돌아 나와 원래의 길로 가면 된다. 돌아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지루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잘못된 길을 끝까지 갈수는 없으니까. 반면 더는 빠져나오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도 너무 늦었다 싶은 그 순간에도 길은 있다. 다만 그때는 다시 되돌아오기에는 밟고 있던 엑셀레이터가 너무 빨라서 방향을 돌리기 전에 낭떠러지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앤드류의 마지막은 그런 순간이었다. 이제는 엑셀레이터를 멈춘다 해도 이미 붙어있던 가속도 때문에 멈춰지지 않는 순간.


그 순간에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엑셀레이터를 더 밟아 낭떠러지 위로 날아오르는 것뿐이다. 앤드류는 내면의 광기를 폭발시켰다. 지저분한 욕망과 집착으로 똘똘 뭉쳐져서 자신마저 집어삼켰던 광기를, 그토록 손에 잡은 채 놓지 못하던 스틱에 실어 완전히 터뜨려버렸다. 그것도 욕망을 강요하는 플레처 앞에서 보란 듯이, 쾅! 하고서.



 앤드류의 광기가 산화되어 공중 분해되는 순간, 눈을 부릅뜨고 앤드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플레처의 눈빛 또한 변한다. 욕망의 결과물이 낳았던 광기가 사라진 자리는 비로소 원래 존재했던 ‘꿈’의 차지가 되었다. 광기를 폭발시킨 후의 앤드류의 눈빛은 극 초반 꿈을 품고 반짝거리던 눈빛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전보다 더 밝게.


그를 바라보는 플레처의 눈빛은 패배를 인정하는 눈빛이자, 욕망을 이긴 꿈의 자아에게 보내는 경외의 눈빛이다. 이로써 욕망은 떠나갈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단단한 집착과 광기로 발현되기까지는 이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이다. 앤드류를 집어삼킬 듯 맹위를 떨쳤던 욕망의 덩어리 ‘플레처’는 단단한 광기가 파쇄(破碎)됨으로써 더 이상 앤드류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이후 앤드류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느냐는 온전히 앤드류의 선택에 달려있겠지만, 앤드류의 마지막 눈빛에서 보듯 그리고 극의 스토리 흐름에서 보듯이 플레처에게 통쾌한 복수를 날리는 앤드류의 성공을 통해, 우리는 앤드류가 다시 꿈을 품고 반짝거리는 청년으로서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비록 영화의 감독은 “극 중 앤드류라면 이후 30대에 약물중독으로 죽고, 플레처는 여전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렇다면 그건 감독이 앤드류라는 인물을 광기를 폭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욕망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인물로 본다는 뜻일 거다.


어떤 선택이든 앤드류 개인에 달린 것이니 정답은 없다. 그러나 앤드류에게 아버지의 존재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영화상의 흐름을 보았을 때는, 앤드류가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를 꼭 안아주는 앤드류의 아버지가 순간 순간 앤드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위플래쉬>는 음악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꿈’과 ‘욕망’의 관점에서 우리 내면의 긍정과 부정의 자아를 돌아보게 만드는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 일차적으로 음악의 드라마로 따라가도 충분히 귀가 즐거운 영화였고, 다양한 상징과 은유를 통한 자기만의 해석이 가능한 영화여서 더욱 즐거웠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만난 것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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