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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비키 Jan 17. 2016

사람다움을 포기하게 되는 시대상에 대한 통렬한 풍자

소설 '굿바이 동물원'


매년 연말이 되면 반복적으로 들리는 표현은 '다사다난했다'는 것일 테다. 하지만 본래 다양한 사건사고가 많았다는 뜻이었던 이 표현이 언제부턴가 다르게 와 닿는다. '사건'과 '사고'가 우리의 힘으로 통제불가능한 천재지변이 아니라, 우리들이 직간접적으로 초래하는 '인재사건'들이 많아져서일 것이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건 이러한 사건들 중에는,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사람이 벌인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엽기행각'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정재계를 비롯하여 사회 곳곳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를 바라보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말한다. "도저히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세상"이라고.


고달픈 삶을 강요하는 사회가 비단 한국사회뿐만은 아니겠지만, 여하튼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한국 땅이기에, 사람들은 21세기 대한민국에 대해 짙은 회의와 비관을 담아 절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강태식 작가의 <굿바이 동물원>은 사람들의 이러한 절규를 고스란히 담아낸 소설이다. 제목만 보았을 때 어딘가 모르게 느껴졌던 코믹이나 해학적인 느낌은 소설을 읽는 동안 서글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시대를 바라보는 아픔으로 변해갔다. 평론가들은 이 소설에서 유머식 코드도 읽을 수 있다고 했지만, 내게는 첫 장부터 끝 장까지 <굿바이 동물원>은 처절히 아프고 슬픈 소설이었다.


                                                                                                                            

강태식 작가의 <굿바이 동물원>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책을 읽는 내내 이 거대한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작가가 극 중 인물 한 명 한 명에게 사연을 제법 촘촘히 심어놓은 때문일 것이다.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한 이후 생계를 위해 부업전선에 뛰어든 주인공 '김영수'. 열심히 마늘을 까고 인형 눈을 붙여보지만, 그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삶은 점점 힘겨워질 뿐이다. 마늘을 까면서 마늘이 맵다고 울고, 인형 눈을 붙이면서 본드에 중독되어 환각에 빠지는 주인공의 모습은 해학적이라기보다 슬프게 다가왔다. 그가 운 것은 마늘이 매워서가 아니라 현실의 무게 때문이며, 환각증세에 빠진 것은 본드 때문이 아니라 본드를 핑계로 무거운 현실을 잊기 위한 그 스스로의 선택이었음은 소설의 주인공은 물론, 소설을 읽는 독자도 모두 안다.


마늘을 까면서 울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 더 많은 본드를 불며 더 큰 환각에 빠져 방바닥을 뒹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상상하면 서글프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첫 번째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이 주인공을 '남자'라는 사람의 명사로 부를 수 있을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다움'을 잊어가는 자신이 슬퍼서 울고, 사람다움을 벗어나려고 본드 속에 파묻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사람다움의 모습을 거의 잃어가고 있는 것임에 다름없다. 회사에서 잘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처럼 '인간다운 삶'을 위협당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고, 그 때문에 소설은 초반부터 강렬한 충격을 전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주인공은 부업을 알선해주는 브로커 '돼지엄마'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소개받는다. 시립 동물원 '세렝게티 동물원'에서 구인공고가 난 것인데, 시립이다보니 공무원과 다름없는, 흔히 생각하는 '복지좋고, 안정적이고, 칼퇴도 할 수 있는' 곳일 거란 기대감은 주인공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바로 직전, 밑바닥까지 내려가면서 '인간다움'을 거의 포기하는 상황까지 갔던 주인공이었다. 마늘을 가며 울고 환각제를 불며 빈 방을 뒹굴던 그에게 새로 찾아온 기회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꿈꾸는 공무원직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으로 살아가지만 '인간다운 삶'을 충족하지 못한 주인공에게 공무원은 '인간다움'을 넘어 '신의 영역'까지 높여줄 수 있는 자리다. 안정적인 생활과 정년 보장이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 조건들 때문에 신의 직장이라 칭송받는 공무원직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자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꿈의 직장, 신의 직장을 갖게 된 주인공은 한껏 들뜬다. 설렌다. 사라졌던 의욕도 다시 회복했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체력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드디어 "신의 직장"에 합격하는 행운을 누린다. 이제는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물론이요, "신처럼 살 수"도 있게 되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공무원이었으니까.


                                                                   

안타깝게도 주인공을 흥분시켰던 '공무원'이라는 단어는 주인공이 이후 느낄 비참함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처참하게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된다. 동물원에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은 뭐가 있을까. 크게 사육사, 관리사, 청소부, 편의시설 아르바이트생 등 현장직과 사무직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우리는 모르는, 더 세세한 일자리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직접 "동물이 되는 (동물 역할을 하는)" 일자리를 생각하는 이들은 매우 드물거다. 어린이 뮤지컬도 아니고, 실제 동물원 우리 속에 있는 동물 역할을 사람이 할 리는 아예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세렝게티 동물원은 이 불가능한 일자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었다.



출근하는 건 좋다.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 하지만 사는 게 뭔지... 묵직한 슬픔도 있다. 결국 밑바닥까지 밀려난 걸까? 가슴에 탕탕 대못이 박힌다.                                                  (P.100)



뜬금없는 고백 같지만 나는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열심히 운동해서 팔 근육이 발달한다거나 한쪽 뇌를 열심히 써서 그쪽만 특화시킨다거나 하는 후천적인 노력이나 계발에 따른 진화는 믿지만, 흔히 말하는 무생물이 생물이 되고 곤충이 동물이 되며 동물이 사람이 되는 "종의 진화"는 믿지 않는다. 특히나 진화론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동물이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부분은 죽었다 깨어나도 믿을 수 없다.

 

이는 크리스천인 나의 신앙적인 부분이 물론 가장 크겠지만, 설령 종교를 떠나 내 사고방식으로 따져보아도 그렇다. 인간은 몇 만년 전에도, 몇 만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인간"으로 존재했고 또 존재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지구의 역사는 몇 억만년이 넘었고, 이 중 인간의 역사는 지구 전체 역사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몇 천년에 불과하다고도 한다. 하지만 몇 만년이든, 몇 천년이든, 그 당시에 살았던 동물들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현대에도 여전히 동물 종으로 후손을 이어 왔을 뿐, 인간 종으로 넘어오지 못했다. (일부는 동물로 남고, 일부는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 간에는 절대적인 간극이 있어서, 감히 동물은 인간의 영역을 넘볼 수 없다. 인류 모두가 누리는 문화, 예술, 정치, 경제, 스포츠, 법률, 조직, 국가 등은 오직 "이성"을 가진 인간만이 누리는 특징이며 이는 신에게서 부여받은 선물이다. 때문에 인간이 동물 종에서 진화되어 탄생했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인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주는 가장 큰 모욕 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할 때 사람들은 "짐승 같다" 또는 "짐승보다 못하다"라고 말한다. 즉, 사람이 동물(혹은 짐승)과 동일시되는 것은 격을 낮추다 못해 "인간의 고귀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답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본능을 지녔으며 인간답게 살 권리를 부여받았다.

                                                                                             


황당하게도 주인공이 맡은 일은  "마운틴고릴라"였다. 다시 말해 '동물이 되는 것'이었다. 이는 공연에서의 동물 역할이 아니라, 마치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 탐 크루즈가 장가면을 쓰듯이 실제 동물의 옷과 가면을 쓰고, 실제 동물 우리에서, 실제 동물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했다. 동물원 측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관객을 기쁘게 해주기 위한 동물원의 서비스라고. 관객이 보고 싶은 동물과 실제 동물의 간극을 채워주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여 진짜 동물 인양 행동하게 하면, 관객들은 그 '사람 동물'을 보면서 기뻐한다고.


관객을 기만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관객을 기쁘게 해준다는 것으로 합리화되고, 기만당하는 관객은 자신이 기만당하는지도 모른 채, 자신과 같은 '인간(이었던)'인 우리 속 동물들을 보며 인간으로서의 우월감과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동물들(행세를 하는)인 극 중 인물들은 "생계"를 위해 그 일을 무조건 할  수밖에 없다.

                                                                                                                                                 


"이 동물원에는 고릴라밖에 없습니까?"

여자 사육사가 대답한다.

"몰랐어요? 당신 담당은  고릴라예요.".....  (중략).... "그래요. 이걸 입어요."

여자 사육사가 아무럿지 않게 대답한다. 이제 카메라는 내 시선을 따라서 움직인다. 여자 사육사가 들고 있는 의상을 천천히 훑는다. 카메라 앵글이 밑에서 위로 올라간다. 발등에도 검은 털이 수북하다. 한쪽이 뒤집혀 있어 발바닥이 보인다. 발바닥에는 털이 없다. 그냥 살색이다. 다섯 개의 발가락과 툭 튀어나온 뒤꿈치까지, 크기만 다를 뿐 생긴 건 사람 발바닥과 비슷하다.  (중략)....

"입어요. 오늘부터 당신은 고릴라예요."....  (중략)....

'아! 나는 고릴라였구나.'                                                                            (P.32-34)



"먹고 산다"는 것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보장하는 가장 최소한의 것이라면, 이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해 개인은 인간다움을 스스로 져버릴  수밖에 없고, 동물원으로 대변되는 이 사회는 개인의 인간다움을 버릴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강요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들이 받는 것은 고작(!?) "먹을 것"이었다.



고릴라 하면 바나나. 그날 나는 하루 종일 바나나만 먹었다. 사료 같은 건 따로 나오지 않았다. 관람객들이 던져준 바나나로 점심을 해결했다. (중략)... 그 바나나를 유인원관 입구에 있는 '고릴라 휴게 음식점'에서 시중가의 두 배 가격으로 버젓이 팔고 있었다. 문득 세상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릴라야, 이거 먹어."

바나나를 던져주는 관람객들을 보면서, 관람객들이 원하는 게 뭘까? 생각했다                       (P.120)



                                                                                                                                                                            "먹고 산다"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은 아니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동식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추구하는 생리적 본능일 뿐이다.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하던 창세에는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구조가 없었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먹을 것을 보장받았고, 때문에 모든 '종'은 평화롭게 어울렸다. 먹이사슬이 생긴 건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한 이후, 더 나아가서는 노아의 방주 사건이 있은 후였다.


모든 생명체가 먹는 문제를 보장받으며 창조되었다는 것은  "먹고사는 문제", 다시 말해 "먹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저 멀리 아프리카나 북한 땅에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가슴 아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동식물도 당연히 추구하는, 권리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당연히 이 문제를 오히려 사람은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진짜 동물 인마냥, 네 발로 기고 관람객이 던져주는 바나나로 허기를 채우는 소설 속 인물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그러나 그들이 가짜 동물이라는 것은 관람객도 알았을 터이지만 (관람객의 말대로 움직이는 동물은 세상에 없으니까), 동물원 사육사들은 물론이고, 관람객들도 누구 하나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그저 관람객의 '재미'와 동물 역을 하는 사람들의 '생계의 문제'라는 필요충분조건이 서로 맞아떨어진 결과라며 합리화될 뿐이다.

  


"바나나를 먹으면서 매일 탕탕 가슴을 치는 고릴라는 진짜 고릴라가 아니야. 하지만 관람객들이 보고 싶어 하는 건 그런 고릴라거든. <킹콩>이라는 영화 본 적  있나?"...  (중략)...

"<킹콩>의 모델이 된 동물이 바로 고릴랄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는 장면이 정말 압권이었지. 관람객들은 그런 고릴라를 보고 싶어 해. 한 손에 바나나를 쥐고, 가슴을 탕ㅌ아 치면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는 고릴라 말일세. 하지만 세상에 그런 고릴라가 어디 있겠나. 그런 고릴라를 볼 수 있는 곳은 이곳 '세렝게티 동물원'뿐일세. 자네와 내가 바로 그런 고릴라니까 말이야."   (P.117-118)



주인공과 고릴라 동료들이 인센티브를 받겠다고 한 시간에 한 번씩  무려 12미터에 달하는 우리 안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올라 부저를 누르는  목적은 하나였다.  먹고사는 것. 그것 때문에 온갖 모멸감과 비참함을 참아가면서, 빌딩에 오르다 떨어져 생명의 위험도 간신히 비켜가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계속되는데도, 그들은 엠파이어 오르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며 하루 일과가 끝나면 매일 동물원 내의 술집에 모여 서로 술 한잔씩 나누는 것으로 아픔을 달래는  것뿐이다.  


이 부분에서 처음 질문을 다시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을 비롯한  마운틴고릴라 동료들은, 세렝게티 동물원의 동물들(사람들)은 여전히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삶은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고달프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책임져야 할 범위가 늘어나고 감당해야 할 분량이 늘어나기에 삶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짐이 너무 무거워 감당이 어려울 때,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별로 없다. 최악의 경우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경우는 "사람답게 살기"를 포기하고, 기계가 되거나 동물이 되어 살아가곤 한다.



멋져, 굉장해, 관람객들도 탄성을 연발했다. 멋져요, 조풍년 씨. 나도 감탄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정상에서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조풍년 씨에게 묻고 싶었다. 과장님,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요? (P.128)


세상이 밉다. 사람들이 밉다. 울분에 찬 가슴을 두 주먹으로 두드린다. 성격 따위 삐뚤어질 테면 삐뚤어져라. 어차피 이 나라에서 가난하게 살면 성격 같은 건 그냥 삐뚤어지는 거니까. 역시 세상이 밉다. 사람들이 밉다.

  "정말 잘 지내는 거지?"
옆에 누워 있는 아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아, 나는 과연 잘 지내고 있는 걸까?                                                                                (P153)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우리는 누누이 말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을 통해 전 세게로 퍼져나간 정신은 자유와 평등을 앞세운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정신. 하지만 정작 현실은 점점 힘들어져가는 생활고로 인해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들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일이다. 같은 '종'인 사람끼리 서로 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세상.  "먹고사는" 문제가 치열한 경쟁이 되어버려, 인간의 존엄성까지 포기하게 만드는 시대. 읽는 내내 <굿바이 동물원>은 너무도 아팠다.  



하루 종일 입고 있던 고릴라 옷을 벗고, 팬티와 러닝도 탈의한 다음, 만딩고와 조풍년 씨를 따라 샤워실로 들어갔다. 사실 그때 난 좀 낯설었다. 만딩고도 조풍년 씨도 이렇게 생긴 사람들이었구나.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새삼 서먹서먹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너무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이라 더 그랬다. (P.133)



결국 이 상황을 견딜 수 없던 주인공의 동료, 만딩고는 정글로 떠난다. 세렝게티 동물원에서 "고릴라 흉내"를 내며 사느니, 차라리 콩고의 정글에서 진짜 고릴라가 되어 진짜 고릴라들과 함께 살겠다고 결심하면서. 한 달 동안 통신이 끊기기 직전까지 만딩고는 동물원 동료들에게 현지 생활의 즐거움을 전한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곳. 폭등하는 전세금 걱정도, 살인적인 물가 걱정도, 중학생 일진들에게 뜯기는 각종 명목의 세금 걱정도 전혀 없는  그곳. 만딩고의 말에 갈라파고스 거북도,  히말라야 불곰도, 개미핥기도, 판다도, 악어도, 벵갈호랑이도, 하나 둘 씩 콩코로 향한다.


                                                                                      

소설에서 가장 잔인하고 무서웠던 대목이었다. 자발적으로 사람이 되기를 "완전히" 포기한 사람들. 신에게서 존엄성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그 특권을 포기하게 되는 이유가 "생계" 때문이었다는 것은 충격을 넘어 공포였다. 얼마나 많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마운틴고릴라가 되어, 불곰이 되어, 판다가 되어, 각종 동물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까.


사람이 동물처럼 사는 것은 비참하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동물이 동물처럼 사는 것은 당연하다. 동물은 동물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니까. 모름지기 "분수에 맞게 산다"는 말은 비단 인간사회 속에서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거대한 '종'의 경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 만딩고를 비롯한 동물원의 (실제로는 사람이지만) 동물들은 결국 그 종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스스로 동물로 떨어지는 것을 선택했다. 생계의 위협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차라리 동물이 되어 동물답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차라리 비참한 인간보다 낫겠다는 처참한 마음으로 말이다.

 

심각성을 인지한 동물원 측은 남아있는 동물들을 미행하고,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바로 그들을 잡아 가둔다. 이제 "사람으로서의 삶"에 대한 선택권은 더 이상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동물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다행인지도 모른다. 남아있는 이들은 동물이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다. 영원히 풀려나지 못할 동물원의 감옥에서 그들은 인간이면서 동물로 사는 비참한 삶을 강요당할 것이다.



사람이면 어떻고 고릴라면 어떤가. 사람이라고 해서 꼭 행복한 건 아니다. 고릴라가 불행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인권? 존엄성?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게 없다. 다 옛말이다. 있는 놈과 없는 놈이 있을 뿐이다. 빈부의 차가 개인의 가치를 판가름하고 결정짓는다. (중략) 민주주의라는 것도 그렇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씨발, 욕부터 나오고, 있는 놈들은 있는 놈들끼리만 노는데, 결혼도 있는 놈들끼리만 하는데, 민주주의는 개뿔,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니 지랄, 전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리고,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 계속 몸부림쳐야 하고, 쥐구멍에 해 뜰 날은 영원히 오지 않고, 내일의 태양 같은 건 절대 뜨지 않고, 그런 세상인데.... 어쩌면 고릴라가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283-284)


고릴라로 일하는 동안은 사람답게 살 수 있었다. 고릴라이기 때문에 사람 구실을 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인간미가 남아 있는 동물들이 가족처럼 서로를 걱정해주는 고릴라 동료들이 좋았다. 그래서 고소공포증이라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걸렸지만, 어금니를 악무느라 이가 상하고 털이 아팠지만, 위만 바라보며, 때로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 파란 버저를 눌렀다. (P.323)



엔딩에서 소설은 그럼에도 힘을 내는 주인공을 보여주면서, 희망을 말한다. 비록 동물로 사는 삶을 강요받고 있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사람"이기에 희망이라는 것을 꿈꿀 수 있다. 주인공은 고릴라로 일하고, 주인공의 아내는 인형의 망토를 붙이는 일을 하며 돈을 번다. 비참한 현실 속에서 주인공은 술을 마시고 아내는 본드를 불면서 하루하루를 견뎌갔다. 밤마다 외롭게 울던 두 부부의 눈물은 그럼에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았다. 비록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고 고달프지만, 새로운 생명은 다시 태어나고 인류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없는 고달픈 상황에서 인간다움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 결국 인간의 역사는 "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각자가 치열하게 투쟁해온 역사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범사회적으로 나타나면 혁명이겠지만, 개인들의 삶에서도 소소한 투쟁은 늘 존재헀을 것이다.  먹고살기 힘들던 시대조차도, 인간은 "인간답게"  먹고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동물들과 달랐다.


권력을 탐하고, 경제력을 차지하려고 싸우고, 사랑을 얻으려고 음모와 술수를 벌인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인간의 본능이 비뚤어진 욕망으로 발현된 탓이다.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이러한 인간다움을 지켜내려는 개인의 노력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주인공 부부가 그러하고, 그들의 삶을 이어받을 새 생명이 주인공 부부에게 찾아왔듯이.  



"나 효자 낳아서  효도받아야지."

내 옆에는 손을 맞잡고 같이 걸어가는 아내가 있고......

한때 나는 태평양 한가운데 혼자 떠 잇는 작은 섬처럼 고독하고 쓸쓸했지만,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인간이라 인생이 외로웠지만, 그날 밤 나는 고독하지도 쓸쓸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P.336)



소설은 말한다. 돈이 없어도, 생계를 위협받고 그래서 때로는 동물이 되어버린 것 같은 비참한 삶 속에 있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사람"이라고. 사람이기에 미래를 꿈꿀 수 있고,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동물처럼 살고 있는 비참한 사람들이라도,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고 옆에 있어주면, 함께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작가는 그것을 "새로운 생명"이라는 것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먹먹했다. 극 중 인물들의 처절한 삶의 무게와 그에 따른 사람들의 선택 때문이었다. 스스로 동물이 되기를 자처한 사람들과, 동물이 되고 싶었으나 사회(동물원)에 의해 그 선택권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혀서 비참한 사람이 되기를 강요받는 사람들, 그리고 동물처럼 살고 있는 현실에 수긍하지만 그럼에도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 


누구의 선택이 옳은가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누가 가장 행복하고 불행한지를 논할 필요도 없다. 어찌 되었든 이들 중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으며, 이들은 각각의 선택에 따라 웃는 기준을 달리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인간답게 사는" 고달픔을 담담하게 풀어낸 소설의 문체는 슬픔을 오히려 배가시킨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소설은 감정적이거나 감성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딱딱하게 흐르지도 않는다. 문체가 주는 느낌은 담담하지만, 그 안에 인물들의 슬픔이 충분히 묻어나오기 때문에 전체적인 소설의 분위기는 건조하지 않다.


                                                                                                           

세렝게티 동물원의 모습이 우리 사회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세렝게티 동물원의 동물들도, 세렝게티 동물원의 관객들도, 모두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동물원을 찾은 관객 중엔 어쩌면 그 자신도 동물이 되고플 정도로 힘든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동물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때로는 우리 밖에서 전해져 오는 관객들의 삶의 고충을 느낄지도 모른다. 모두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관객이든 동물옷을 입은 직원들이든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서로의 삶이 고달프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인정한다. 때문에 소설 <굿바이 동물원>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강력한 흡입력과 공감을 이끌어낸다. 극 중 인물들의 삶이 바로 나 자신의 삶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동물들에게 뭘 집어던지는 사람들도 참 안됐다. 얼마나 쌓인 게 많았으면 동물원까지 와서 저럴까 싶다. 어떻게 사는지 안 봐도 비디오다. 직장에서는 스트레스만 받는다. 전쟁터가 따로 없다. 위에서는 찍어 누르지 밑에서는 치고 올라오지, 하루하루가 총알이 빗발치는 사선의 최전방이다. 아군은 없다. 적군뿐이다.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다고 집이 편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집에 와도 발 불일 곳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중략) 그런 사람들이 모처럼 동물원을 찾는다. (중략) 그렇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안돼 보인다. (P.219)



2014년 여름에 이 책을 읽었다. 당시 책장을 덮으며 주인공의 질문을 되짚어 보던 것이 기억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더불어 또 다른 질문. 과연 나는 지금 사람답게 살고 있을까. 


당시 난, 근 세 달만에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대부분 TV는 보니까, "바빠서 책을 못 읽는다"는 말은 핑계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바빠서 책을 읽을 수 없는 상황이 되니 알 수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때 몇 달간, 지금 돌이켜보면 책을 펼칠 기운도 없었던 것이 속상하지만, 막상 당시에는 그럴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일해야 하지? 끼니 때면 밥을 먹고,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 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닌, 인간다운 삶을 충족하기 위한 "생리적인 필요충분조건"이지만, 그 당시  내 삶은 그 최소 조건을 충족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밤을 꼬박 새도 끝나지 않는 업무량은 여름, 가을, 겨울에도 계속될 것이고,  밤을 새도 끝나지 않으니, 밥을 먹을 시간을 빼야 하고 잠잘 시간을 빼야 했다. "일하는 기계"가 된다는 것은 이런 뜻일까. 일이 사람 위에 있는 것인지, 일을 위해 '사람다움'의 최소 필요충분조건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때 나는 내 안의 "사람다움"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그곳을 박차고 나온 후로, 내 안의 사람다움은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소설 <굿바이 동물원>이 와 닿았던 것은 극 중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이  내가 느꼈던 것과 비슷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한참 전에 친구가 선물해준 책을 2년 전 여름에 읽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메시지를 깊이 공감하기 위한 타이밍으로 최적합한 시기가 아니었는지.


책장을 덮으면서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되짚어 보았다.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현시대의 우리 모두가 매일같이 고민하는 주제를 다룬 책. <굿바이 동물원>의 임팩트는 상당히 강했다.






아무리 힘든 상황,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우리 모두는 '귀한 존재'입니다. 흙수저, 금수저 상관없이 말이지요. 모두들 좋은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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