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낡은 다이어리 속 그림 리뷰] 천지창조 & 최후의 심판
본 포스팅은 2005년 유럽여행에서 바티칸 미술관(로마)과 우피치 미술관(피렌체)을 둘러보며
거장 '미켈란젤로'와 그의 작품에 대해 느낀 리뷰를 적은 것으로,
예전 싸이월드에 올린 글들을 엮은 것이라서 요즘의 리뷰와는 어조나 문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사진 해상도가 안타깝네요 ㅠㅠ
내가 얼마나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노력했는지 안다면, 사람들은 결코 나를 천재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시대 뿐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로 손꼽히는 화가 중 한 명인 '미켈란젤로'.
누가 보아도 그가 천재라는데 이견이 없겠지만, 정작 그 자신은 노력 없이는 그 재능 또한 무의미 하다는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미켈란젤로.
천하의 추남이고 성격은 무지무지 까칠하고 고집불통에, 약간의 대인기피증까지 보였던, 정말로 어렵고 어려운 천재.
그래서일까.
까칠하고 어려운 그의 모습이,
너무 유쾌해서 별다른 고민이 느껴지지 않았던 라이벌 '다빈치'나 '라파엘로'보다,
나는 훨씬 더 좋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쭈욱.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만난 그의 유일한 유화 <성가족 (톤도 도니>를 볼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빛나는 걸작인 <다비드 상>을 볼 때도 감탄이 나왔지만, 감동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보는 순간, 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에 압도되고 말았다.
전율이 일었고,
눈물이 났다.
단순히 감동이라고 표현하긴 어려운 감정이었다.
화가이기보다 조각가로 더 명성이 높았던 그였는데.
실제로 조각가로 불리길 원했고, 스스로도 자신은 조각가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조각에서는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미켈란젤로였기에, 그의 조각을 보면 '천재'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그러나 그의 회화 작품을 보면 '천재'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흠모하는 모든 화가들이 "예술가"이겠지만, "진정한 예술가"라는 호칭은 '미켈란젤로'에게만 쓰고 싶다.
<천지창조>를 보면서 처음에는 경악에 가까운 탄성이,
그러더 나중에는 눈물이 나려고 했다.
너무 높은 높이의 천창이라 보는 것만 해도 목이 아플 정도였다.
평생 돌을 마치 떡 주무르듯이 조각에만 미쳐 살았고, 그렇게 살고 싶었던 미켈란젤로.
하지만 그의 바람과 소망은 율리우스 교황에 의해 무참히 무시되었다.
지금은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이자 세계 유산이 되었지만, 당시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의 임무가 떨어진 것은 천재의 재능을 혹사시키거나 혹은 재능있는 천재의 몰락을 바랐던 음모 때문이었다.
율리우스 2세는 재임기간 동안 업적을 내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게 미켈란젤로에게 작업을 요구했다.
거기에 당대 최고 건축가인 브라만테와 그의 제자인 또 한 명의 예술가 라파엘로의 모함도 곁들어졌다.
물론 라파엘로는 이후 완성된 <천지창조>를 보고, 미켈란젤로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어 그의 대표작 <아테네학당>에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그려넣게 되었지만 말이다.
개인의 욕심을 위해 예술가를 괴롭혔던 교황의 압력에 대해서, 미켈란젤로는 오기와 소신으로 맞서고 또 맞섰다.
끊임없이 <천지창조>의 작업과정을 공개하라는 교황의 압력에 맞서, 완성될 때까지는 절대로 보여줄 수 없다면서 끝까지 비공개로 진행했던 것이 바로 불멸의 작품인 <천지창조>다.
다빈치나 라파엘로가 제자들과 함께 작품활동을 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고독하게 홀로 그 방대한 분량의 작업을 수행해갔다. 어떻게 4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그 엄청난 규모의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는 지금도 미스테리로 남는다.
수학자들이 계산해본 바로는 매일 거의 2시간 정도만 자고, 꼬박 일을 해야 4년동안 간신히 완성할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천지창조>는 1508년에 시작하여 1512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인류사에 남을 대작을 완성했다는 기쁨에 취하기에는 그가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천지창조를 마치고 난 후, 그의 어깨는 휘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석회분진을 4년 동안 맞으면서 그의 한쪽 눈은 시력을 잃어버렸다.
작품 활동하면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석회가루를 맞느라, 교황 및 추기경과 싸우느라 맞았던 그의 코는 콧날이 비뚤어져서 평생을 돌아오지 않았다.
코가 비뚤어지면서 천식도 생겼다.
거의 누워서 그려야 했던 자세 때문에 그의 등은 욥창이 생기고 등이 굽어서 평생을 돌아오지 않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고작 33살때였다.
자신의 몸과 바꾼 그 작품.
자신의 영혼과 바꾼 작품.
자신의 소신과 고집을 바쳐 만든 그 작품.
실제 눈으로 담기에도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천장화를 보고 있노라니, 감동을 넘어 눈물이 났다.
그 어떤 예술가가 이토록 자신의 진액을 뽑아서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천재일수록 자신의 재능에 취하기가 쉬운 법이거늘.
그는 결코 그림에 능숙한 화가가 아니었다.
이전까지 그가 그린 그림은 자그마한 <성가족 (톤도 도니)> 하나를 그려본 것이 전부일 뿐이었다.
그것도 적당한 액자크기로.
더군다나 <성가족>은 프레스코화도 아닌 유화였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린 유화 그림이 저정도 수준이라는데 더이상 할 말이 없지만, 작은 유화 한 점 그려본 것이 전부인 그가, 어마어마한 넓이의, 그것도 천장화를 그렸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미스테리에 가까운 일이다. 그것도 오롯이 혼자서 말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는 그의 젊을 때의 <천지창조>가 있다면, 벽면에는 그가 노년에 그린 <최후의 심판>이 있었다.
최후의 심판은 그가 70을 바라보면서 그린 프레스코화였다.
작품 완성시기의 시간적 텀이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서는 여전히 그의 예술가적 기질이 젊고 열정적으로 남아있었다. 젊었을 때나, 노년일 때나, 그는 변함없이 자신의 예술에 대해 열정을 닮고 살았던 진정한 젊은이였음은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천지창조>때 와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 작업과정을 공개했다. 중간중간 일반인들에게도 공개할 정도였으니, 혈기왕성하던 <천지창조> 작업 당시의 청년 미켈란젤로에 비해, <최후의 심판>을 그리던 노년의 미켈란젤로는 외부의 압박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깨달은 듯 했다.
그러나 자신의 소신과 신념을 꺾지 않는 예술가적 고집은 여전했다.
<최후의 심판> 작업 과정을 보았던 사람들은 벽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나체로 그려져 있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심할 경우, 술집 그림이나 목욕탕 그림으로 걸맞다는 혹평도 들었다.
그러나 예술가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눈하나 깜박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심하게 비난한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사자에게 붙여놓는 복수(?ㅋㅋ)까지 한다. 추기경의 얼굴 외에,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얼굴도 그려넣었다.
그림 중앙에 위치한 예수의 바로 아래편에 앉아있서 가죽을 들고 있는 이는 바돌로매다. 바돌로매는 가죽이 벗겨짐을 당하며 순교했던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다. 미켈란젤로는 바로 이 바돌로매의 가죽에 자신의 초상을 그려넣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작업과정을 공개하면서도 지옥사자를 추기경의 얼굴로 그리고, 반면 자신은 순교한 사도의 얼굴로 그린 것은 예술가의 오만이라기 보다는,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예술가의 꼿꼿한 신념으로 다가왔다. 아울러 험한 풍파를 겪어오면서 여유를 배운 예술가의 유쾌한 유머였기도 했고.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고 난후, 그는 이단시비에 휘말렸다고 한다.
당시 천사는 반드시 날개가 있어야 했고 예수님은 십자가고난으로 비쩍 마른 모습이어야 했단다. 유색인종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백인우월주의 사상이 강했다고 한다. 흑인 노예매매가 왕성했던 시절이었으니.
그러나 예술가는 달랐다.
최후에 심판하실 예수님은 강하고 위대한 분이라 생각해서 힘을 상징하기 위해 건장한 남성의 모습으로 그렸다. 천사들에 날개를 달지 않고 마치 인간과 비슷하게 그린 것도 성경에 근거한 해석이었지만, 당시 통념에는 위배된 표현방법이었다. 또한 그는 유색인종을 천사가 붙잡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인종과 상관없이 허락하신 신의 구원을 확신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의 믿음과 소신을 넣어 그렸던 <최후의 심판> .
그는 시대의 고정관념과 압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과 소신대로 창작활동을 했고 명작을 남긴 진정한 예술가다.
사람들이 비웃고 혹평해도 눈하나 깜박하지 않고 대담하게 작품을 만들어간 사람.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말못할 아픔과 고통, 상처들이 얼마나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을지, 후대를 사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평생을 외롭고 고독하게 작업하며 살아갔을 예술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온다.
예순여섯이 되어 붓을 들고 작업대에 오른 <최후의 심판>이 완성된 이후에도, 그는 '베드로 대성당' 지붕을 설계하고 건축을 감독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끌과 망치를 놓치 않고, 어린시절부터 마음에 품었던 피에타 조각을 다시 깎으며 마지막 생을 불태웠다.
그렇게 바티칸에서 나는 인생의 예술가를 만났다.
그리고 그 이후로 10년이 넘은 지금에도, 젊을 때의 그 열정과 고집을 평생에 담고 살아간 위대한 예술가를 난 진심으로 존경하고 또 존경하며 살고 있다.
아마도 이 마음은 미켈란젤로에게서 느껴진 진정성이 거짓이라고 밝혀지지 않는 한, 평생을 품게 될 것이다.
외로운 열정으로 살아간 미켈란젤로.
그는 내 예술관뿐 아니라 인생관도 바꾼 인물이다.
미켈란젤로.
그는 내게 있어, 베토벤과 더불어 진정한 예술가다.
2005. 로마를 여행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