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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비키 Sep 15. 2015

그 시절의 순수함, 믿음,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

영화 '늑대소년'

어른이 되어버린 소녀.

잊고 있던 그 시절의 순수함, 믿음, 그리고 사랑을 다시 찾다.



배우 '송중기'와 '박보영'을 A급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한 영화 '늑대소년'. 개봉한지 일주일이 채 안돼서 관객수 백만을 훌쩍 넘리면서, 당시 영화계는 역대 최단기간에 세운 기간이라며 흥분했었고, 이에 발맞춰 언론도 연일 '늑대소년' 기사를 쏟아내기 바빴었다.


주연을 맡은 송중기는 꽃미남에서 '배우'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굳히면서 그야말로 '대세'가 되어버렸고, '과속스캔들'에서의 발랄하고 귀여운 이미지가 강했던 박보영은 이 영화에서 정통 멜로 연기를 선보이며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당시 난, 이 모든 것이 궁금했다.


드라마 <착한 남자>를 통해 "눈빛 연기가 가능한 배우"로서의 송중기는 알 수 있었지만, 대사가 거의 없이 눈빛과 표정, 몸으로만 온전히 연기해내야 하는 버거운 캐릭터를 어떻게 소화할지 궁금했고, 여전히 아이의 얼굴을 한 박보영의 정통 멜로가 자연스러울지 어색할지도 궁금했다. 영화계의 흥분이 단순 호들갑인지 아닌지, 언론의 무더기 기사 폭탄이 배우에 대한 기자들의 단순 팬심인지 아닌지도.


마침 주말이었고 가능한 시간대에 자리가 있었다. 그래서 비가 오려고 날씨가 꾸물거리던 2012년의 어느 일요일 오후, 동생 부부와 함께 '늑대소년'을 보러 갔었다.  




두려움, 이제는 꺼내야 할 시간. 그 집으로 이사를 가다.


영화는 노인이 된 순이가 어릴 적 살던 집에 가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47년 전, 폐병을 앓고 있던 순이(박보영 분)는 가족과 함께 요양차 강원도의 어느 시골마을로 이사를 간다.  어딘지 모르게 음산하고 음침한 느낌을 주는 그 집이 순이는 싫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다.               

                    

                                                     

한창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민감할 나이. 가장 웃음이 많고 밝아야 할 여고생 시절. 하지만 순이는 웃음을 잃었다. 자신 때문에 가세가 기울고, 아빠의 사업을 가로채간 동업자 아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다,  밥풀을 여기저기 튀며 밥을 먹는 이웃들과 겸상하는 것도 화가 치민다. 무엇보다 학교에 다닐 수 없을 만큼 아픈 자기 자신이 너무 싫다. 아무 데도 쓸모없고 짐만 되는 폐병환자.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괴기스럽고 음침한 집은 순이의 그런 마음을 대변한다. 이사를 왔음에도 순이가 새로운 환경과 이웃에 대한 아무런 기대와 설렘이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요양차 온 그 곳에서 병이 나아 건강해졌으면 하는 지극히 당연한 기대와 바람을 품는 것조차 죄인 것 마냥, 순이의 일기장은 그녀 자신에 대한 저주의 글로 빼곡하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면서 순이는 새 집에서의 첫 밤을 맞는다. 마음의 휴식과 평안이 되어야 하는 그 집은 도리어 불편했고 추웠으며 어두웠다. 요양 왔다는 것을, 자신이 폐병환자라는 것을, 외면하고 싶어도 절대 외면할 수 없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을 그 집에 있음으로써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그랬다.


그래서 피곤에 취해 잠에 빠져버린 엄마와 여동생과는 달리, 순이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게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자니 공포가 밀려온다.

                                   

                             

그것은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순이의  마음속에 내재된 근본적인 공포이기도 하다. 영화에선 나오지 않았지만, 그 공포 때문에 순이는 집에 이사 오기 전에도  자주 잠을 뒤척였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내일 눈을 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 수도 있고, 미래를 잃어버린 소녀의 절규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순이의 그 공포는 집에 대한 공포로 발현되고, 남 몰래 꽁꽁 싸매어 두었던 그 공포는 새 집으로 이사 온 첫날부터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순이의 공포는 이제 본격적으로 치유되기 시작할 것이다. 집 밖에서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의해서.


창 밖으로 무언가 움직이는 느낌. 귀신이라도 나오는 것일까. 괴물일까, 아니면 산짐승일까.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밖에 있었다.



소녀, 소년을 만나다.

 

순이는 뜻밖의 존재와 만난다. 밤새 자신을 괴롭혔던 정체불명의 상대는 어떤 소년(송중기 분)이었다. 또래로 보이는 그 소년의 몰골은 영락없는 거지였다. 당시는 전쟁 고아가 흔했던 시절이었다.     


소년은 순이의 엄마가 건네주는 감자를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얼마나 오랫동안 굶었던 것일까. 그 모습에 순이의  가슴속에 일부러 꽁꽁 싸매어 두었던 "감정"이라는 것이 조금씩 싹을 틔우려 하고 있었다. 순이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잃어버린 따뜻한 마음이.


순이는 처음엔 소년이 싫었다. 소년은 어딘가 이상했다. 말을 전혀 할 줄 몰랐고 늑대처럼 으르렁 거리는 소리만 냈다. 아무리 오래 굶었다지만 밥상에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모습은 용서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구청에서 연락 올 때까지 잠깐만 데리고 살자는 엄마(장영남 분)의 말에 불같이 화를 내어 보지만, 소년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더럽고 냄새나고 말 못하고 어딘가 짐승 같은 느낌이 나는 그 아이. 밥상에서 그 녀석 때문에 수저도 들 수 없는 상황이 너무도 싫어, 순이는 소년을 훈련시킨다. 그게 시작이었다.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싶어서. 그게 표면적인, 그리고 순이가 생각했던 이유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순이 자신에 대한 치유의 시작이었음을, 그때의 순이는 전혀 알지 못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소년은 이 여자아이가 신기했다. 지금까지 봤던 사람들과 닮긴 했지만 이 여자아이는 뭔가 달랐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뭐라고 소리를 낸다. 저 여자아이가 있는 세계에서 그건 "말"이라고 한다는데, 자신의 입에서는 당최 저런 소리를 낼 수가 없어 답답하다.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다려!


처음엔 이 소리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감자 하나를 보여주면서 여자아이는 "기다려!"라고 했다. 암컷이 내는 소리려니 하고 넘겼다. 당시 소년에겐 눈앞에 있는 감자만이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이 여자아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신의 이빨에 할퀴어 손에 피가 나는데도 물러서지 않는다. 물론 일부러 상처를 낸 건 아니다. 그저 배가 고팠을 뿐, 소년은 소녀를 해칠 의도는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소년을 위험한 존재로 인식했었다. 그 전에 살던 주인은 소년을 어두컴컴한 곳에 가둬둔 채, 약물과 주사를 놓으며 늑대 아니, 괴물취급을 했었다. 소년은 그저 그가 던져주던 '먹이'만 받아먹으면 그만이었고,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지독히 외롭고 고통스러웠지만, 그것이 외롭고 고통스럽다는 것조차 몰랐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한없이 돌아오지 않는 주인이 주는 먹이를 기다리고 있어도, 그 방이 어둡다는 것조차 몰랐다.


빛이 있는 곳, 따뜻한 곳, 외롭지 않은 곳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


                                                                    

여자아이에게선 소년이 그동안 몰랐던 이 모든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소년은 이 여자아이가 이상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 사람이든 짐승이든 -,  빛과 따스함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지극히 당연한 본성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소녀를 따른다. "기다려!"라는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멈췄고, 그럴 때면 소녀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녀의 손길은 따뜻했고, 그 따스함은 소년의 머리를 타고 가슴까지 흘러내렸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그래서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지만, 소년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것이 "좋은 것"임을.


소년은 그렇게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존재임에도, 오직 감정과 본능으로 그것을 느낀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지만 "이것은 분명 좋은 것이야." 소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소녀가 웃는 것, 따뜻한 물로 소녀의 엄마가 등을 밀어주는 것, 소녀를 닮았지만 좀 더 작은 동네 꼬마들이 같이 놀자며 말을 걸어주는 것, "철수야"하고 불러주는 소리, 소녀의 기타와  노랫소리...       

                           

                                     

모든 오감을 통해서, 소년은 이 모든 것이 "좋은 것"임을 알게 된 순간, 이전의 자신은 춥고 외로운 존재였다는 것도 알았으리라.


그것은 전적으로 소녀 덕분이었다. 자신을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 처음 대해준 존재. 소년에게 소녀는 빛이고 구원이었으며, 세상의 전부였다.



소년과 소녀, 서로를 치유하는 존재. 그리고 사랑.  


'늑대소년'은 기본적으로 늑대소년과 소녀의 사랑을 다룬 멜로 영화다. 하지만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히 이성 간의 사랑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사랑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서로를 통해 자신의 아픔이 치유되는, 보다 숭고한 사랑이다.


소년은 소녀의 가족에게서 '철수'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름을 얻었다는 것은 더 이상 소년이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았음을 뜻한다.


인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프랑스 대혁명의 첫 번째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존중받을 수 있는 권리. 가장 기본적이고도 당연한 이 권리가, 철수에게는 완전히 배재되어 있었다. 설령 전쟁의 부산물로 태어난 체온 46도, 혈액형 측정불가의 돌연변이라 해도, 철수는 사람이었다.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고,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었다. 아무도 그를 감옥보다 더한 곳에 가둬놓고 온갖 비인륜적인 취급을 할 권리는 없었다.            

                      

                                                                                                        

그래서 순이는 가르친다. 인간의 존엄성이고 뭐고 같은 거창한 논리를 내세우지 않아도, 순이는 철수가 사람이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존재다. 이는 순이의 가족과 이웃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지극히 착하고 바른 사람들이 모여있는 마을. 그 마을에 사는 순이. 때문에 이제 순이의 집은 더 이상 공포스럽거나 괴기스럽지 않다. 관객에게도, 순이 자신에게도.


영화에서 처음 순이의 집이 등장했을 때와는 달리, 영화가  진행될수록 순이의 집은 점점 밝고 따뜻한 장면으로 나온다. 집안을 가득 채우는 빛은 물론이거니와, 그 어둡고 칙칙했던 곳에 "사람"의 흔적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이 놀러 오고, 그러다가 얼굴에 낙서하며 장난치고 있던 순이와 철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며,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는 순이의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기도 하는 집.

            


집의 변화는 순이의 마음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냉기가 감돌던 순이의 마음. 하지만 원래는 따뜻하고 밝았던 순이답게, 순이는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다. 따뜻하고 밝고 웃음 많은 아이로. 극 중 초반 "난 우리 딸이 웃는 모습 보고 싶다"던 엄마의 바람은 관객이나 극 중 인물들 모두가 미처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순이는 이제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더 이상 까다롭게 굴지도 않고, 비관적인 글로만 채워진 일기장은 더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공놀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면서 잃어버렸던 삶에 대한 희망과 미래를 조금씩 꺼내 드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 모든 것은 철수 덕분이었다.                                  

                      


안녕 철수야, 안녕 나야.                                                                  


순이와 철수는 서로에 대한 "유일한 존재"다. 순이는 철수가 평생을 바쳐 기다리는 "유일한 구원"이며, 철수는 순이의 모든 내적, 외적인 공포와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유일한 방패"이다. 또한 순이는 철수가 "유일하게" 순종하는 존재이며, 철수는 순이가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꿈을 꾸게 만든 "유일한 통로"였다.


이는 이성 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개념이다. 철수와 순이는 서로에게 있어 삶 자체였고,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서로의 존재가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다.


어릴 적 아빠가 사준 '눈사람 동화책'을 읽지 않은 순이를 대신해서 철수가 읽는 모습이나, 순이의 망가진 기타를 조각조각 다시 붙여서 보관하고 있던 철수의 모습은 순이의 지나가버린 세월, 잃어버린 그 시절의 순수함을 상징한다. 4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순이의 머리는 백발이 되었지만, 철수가 그 시절 모습 그대로 순이 앞에 나타난 것은 이 때문이다.


철수와 재회한 순이가 오열하는 모습은 철수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고, 더 깊게 들어가면 그것은 철수와  함께했던 그 시절의 자신을 잊고 살았던 것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다. 다시 말해, 철수는 순이가 잊고 살았던 인생의 어느 순간을 지났던 자기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과거에 순이가 철수 덕분에 애써 억눌렀던 미래를 다시 꿈꾸게 되었다면, 현재엔 철수 덕분에 봉인해두고 있던 과거를 꺼내게 된다.           



철수는 처음에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눈에는 알 수 없는 공포가 가득했었다. 하지만 순이 덕분에 철수는 깨끗해졌고,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으며, 눈빛은 평안해졌다. 철수의 눈빛은 그 자체로 순이의 성장을 의미한다. 철수의 눈빛이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관객은 세상과 담쌓고 있던 순이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되어가던 철수는 순이가 위험에 빠지자, '늑대'의 특징을 꺼내 보인다. 전적으로 순이를 지키려는 의도였지만, 늑대의 모습을 보인 이상 철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는 그들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철수는 위험한 존재이고 사령관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사살명령을 내린다. 그들에게 철수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닌, 반드시 죽여야만 하고 죽여도 미안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제거대상에 불과하다. 그 상황에서 철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은 오직 순이 밖에 없었다.                                  

                     

                                                                        

철수에 대한 사살명령은 사실 순이 자신을 향한 명령이기도 했다. 순이에게 철수는 순이 자신이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순수하고 아이처럼 솔직하며, 한결같이 자신을 따르는 철수는 설령 그가 늑대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괴물이라 할지라도, 순이에겐 세상 누구보다 착하고 소중한 존재였다.


철수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철수에게 모진 말을 하며 돌아서는 순이의 모습에서 가슴이 아프지 않았던 관객은 드물 것이다. 그것은 철수와 순이의 안타까운 이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순이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어린 시절의 나 자신. 늑대소년과도 친구가 될 수 있던 순수하고 계산적이지 않던 그 시절의 나를 찾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실제로 그랬다. 어릴 적에, 읽던 동화책에서 나왔던 동물친구들의 인상이 강해서, 동물원에 가면 그곳의 동물들이 마치 실제로 내게 말을 거는 것마냥 상상에 빠지곤 했던 시절이 있었다. 만약 늑대소년이 나타난다면 무서워서 울기 보다, 친구가 되어 함께 뛰놀았을 것이다. 무서워서 우는 것은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었다. 그 시절, 마을의 아이들은 철수와 함께 뛰고 공을 차며 놀았다. 순이도 함께.


너무도 순수해서 회상하면 오히려 아플 만큼 그리운 그 시절과의 작별. 그것은 철수와 헤어지며 엉엉 우는 순이의 모습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기다려, 다시 올게.


순이가 철수에게 다시 오기까지 47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순이는 철수를, 아니 그 시절의 순수했던 순이 자신을 잊고 살았다. 그 자리는 어른이 된 순이가 채웠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 순이는 어린 시절의 옷을 벗고  어른으로서의 옷을 입고 있었다.


어른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아는 것이 더 많아지는 것. 그와 더불어 생각도, 고민도 더 많아지는 것. 무엇보다 두려움이 더 많아지는 것. 그것이 어른이라는 증표일까. 노인이 된 순이는 그 시절의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진 손녀딸에게 말한다.


"나이 들어 어른이 되면 눈에 안 보이던 게 많이 보여. 그렇게 아는 게 많아지면 겁이 많아져서 못하는 게 많아져. 인생에 딱  한번뿐이야. 그때가 지나면, 다신 안와."



순이의 말을 듣는 순간 먹먹했다. 그렇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거다. 겁이 많아지는 것. 


더 많이 알아 갈수록, 나의 한계와 부족함도 더 많이 보이고, 그래서 더 많이 절망하고 더 빨리 포기한다. 흔들림 없이, 한결같이 살아가기란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믿음도, 신뢰도 점점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 '늑대소년'이 전하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프다. 그 시절의 웃음과 따스함 대신, 두려움과 아쉬움이 들어선 자리. 철수가 47년간 잊힌 채 홀로 차갑고 어두운 곳에서 외로이 살았던 것은 두려움이 많아진 어른의 시기를 살고 있는 순이의 모습이다.


어른 그런 존재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의 무게를 홀로 져야 하는 존재. 그래서 어른의 삶은 그 예뻤던 순이의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릴 정도로, 고달프고 힘겹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철수는 외로웠지만 예전처럼 어두운 곳에 있진 않았다. 철수의 공간은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빛이 가득하다. 죽음의 공간이었던 그곳은 이제 푸른 식물들이 무성한 생명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다 끝나버린 줄만 알았던 그곳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오히려 전보다 더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다.               

                    


여기서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비록 우리는 잊고 살았을지 몰라도, 그 시절의 순수함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 시절의 나 자신 또한 절대 없어지지 않았다고. 물리적인 시간은 되돌아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 시절 그대로의 모습이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반드시 남아있다고, 영화 '늑대소년'은 말하고 있다.


"똑같습니다. 손도, 입, 눈 여전히 예뻐요. 많이 기다렸습니다."


철수가 순이에게 한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길 소망한다. 우리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 나이가 들었고 예전처럼 꿈 많고 활짝 웃던, 순수한 시절의 나는 이제 없다고 외치는 우리 자신에게, 철수는 순이에게 그랬듯이 이 말을 건넬 것이다. 눈, 코, 입, 모두 똑같다고. 많이 기다렸다고. 그 시절의 순수했던 나를 만나기를. 기억 속에만 머물렀던, 마음 한 켠에 몰아둔 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잊고 있었던 나를 다시 만나기를 말이다.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이 순이를 기다리고 있는 철수. 그런 철수 앞에서 순이는 오열한다. 어른이 되면서 참아왔던 눈물을 모두 터뜨리던 순간, 순이는 비로소 47년 전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제는 철수가 전해주는 따뜻함에 편히 잠을 잔다. 그 옛날 문을 사이에 두고 철수와 함께 잠들었던  그때처럼.


47년 만에 찾은 그 집에서 다시 잠을 잘 수 없다가, 철수와 재회하고서 곤히 잠드는 순이의 모습은 어른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벗어내고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갔기에 가능하다. '늑대소년'이 희망을 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노년의 순이는 그 옛날 그랬듯이, 철수를 꼬옥 안아준다. 47년간 한결같이 자신을 기다려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그런 철수를 잊고 살았던 것에 따른 미안함 때문이었다. 또한 그것은 잊고 있던 자기 자신을 향한 위로이기도 했다. 이제 됐어. 더는 인생의 무게로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 그때처럼 웃고 행복해해도 돼. 그래도 돼.          

                      


영화는 지극히 동화 같은 이야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스토리가 아주 탄탄하다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한 때는 미래를 꿈꿀 수 없을 만큼 아팠던 어느 소녀가 무사히 어른이 되어, 인생의 노년기에 그 시절을 추억하는 감정선을 따라가보면, 이 영화는 아련하고 긴 여운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다시 올 테니까 기다리라"는 한 마디의 말을 붙잡은 채, 오랫동안 혼자 그 자리를 지켰던 소년이 겪었을 외로움의 시간들은 곱씹을수록 안쓰러운 감정을 배가 시킨다.


소녀는 변했지만 소년은 변하지 않았다. 소녀는 잊었지만 소년은 잊지 않았다. 한 때는 같은 것을 느끼고 나누었던 이들이 전혀 상반된  모습으로 서로의 앞에 섰을 때 전해지는 이질감. 그 불일치의 감정은 영화의 스토리에 녹아들면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와 감정의 폭발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아쉬운 부분은, 마지막에 순이와 재회한 철수가 대사를 하는 부분이었다. 47년간 홀로 글자를 배우고 공부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좋은데, 차라리 말보다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표현하는 모습이었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철수가 끝까지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로서 그려졌다면, 그럼에도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서 엉성한 글씨로 간신히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좀 더 강렬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많은 이들이 바랐던 해피엔딩과 상반되던 엔딩버전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철수를 남겨두고 순이가 다시 미련 없이 떠나는 설정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물리적인 시간을 표현하는 장치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철수는 순이가 떠나는 것을 보고서도 눈사람을 만든다.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돼."라는 순이의 말대로 기다리지 않는 걸까. 그래도 마음으로는 계속 순이를 품고 있을 거다.


늑대는 평생 한 마리의 암컷만 사랑하고 그 암컷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유일한 포유류라고 한다. 신뢰와 믿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서로 간의 존중과 약속이 사라져가는 시대다. 이런 점에서 보면 늑대가 인간보다도 더 존중받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 '늑대소년'의 철수가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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