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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비키 Sep 16. 2015

아버지, 그 존재의 의미 (1)

드라마 '추적자 더 체이서'

                        

 

우리나라가 드라마 왕국이라는 것은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아침드라마부터 미니시리즈까지, 매일 채널별로 최소 5-6편 이상의 드라마가 방영되는 나라는 흔치 않다.  


너무 많은 드라마가 매일 새롭게 방영되다 보니, 퀄리티 면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불륜, 출생의 비밀, 불치병 등 뻔한 소재와 말도 안 되는 황당 스토리 전개로 '막장 드라마'라는 용어가 등장했지만, 이제는 아예 국내 드라마의 어엿한(?) 한 장르로 자리를 잡은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


그러다 보니  방영되는 종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명품'이라고 불릴 만한 작품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는 유독 일회성 소비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방영 당시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라 해도, 시간이 지나서 다시 회자되는 경우는 드물다.


방송 콘텐츠가 본디 트렌드성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드라마 한 편당 들어가는 제작비와 인력을 생각하면 일회성에 머무는 것은 너무도 아깝다.


그래도 어쩌랴. 시청률이 절대적인 방송 환경에서는 막장 드라마가 팔리는 것이 현실인 것을.


하지만 이러한 막장드라마의 러시 속에서도 '명품'은 탄생한다. 대표적인 한류 콘텐츠로 자리 잡은 '대장금'처럼, 시간이 지나도 두고 두고 기억하고 싶은 드라마 말이다. 그런 드라마를 만날 때면 사람들은 너나 없이 환호를 보낸다.


이때 사람들의 환호는 그 어느 나라보다 열정적이고 열광적이다. 마치 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2012년, SBS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추적자 더 체이서' (이하 '추적자')를 기억하는가.


용두사미가 되기 쉬운 국내 드라마에서는 드물게, 마지막까지 중심을 잃지 않고 높은 퀄리티를 자랑한 드라마였다. 덕분에 많은 이들이 이 드라마를 "명작"이라고 평가할 뿐 아니라, 역대 최고의 드라마에도 포함된다는 보는 의견이 많다.


그만큼 '추적자'는 뛰어났다. 대본, 연출, 연기의 삼박자는 더 이상 말해봐야 입 아프고, 작품이 남긴 메시지 또한 그 어느 드라마보다 강렬했음은 물론이다.

                                 


드라마 '추적자'가 방영된 다음 날이면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등장 인물 한 명 한 명이 남긴 대사는 마치 순수 문학작품을 읽는 듯한, 아니 어쩌면 문학책을 뛰어넘는 무게감과 깊이를 보여주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극 중 캐릭터인 서회장 (박근형 분), 백홍석(손현주 분), 강동윤(김상중 분)의 입에서 나온 대사들은 "추적자 어록"이 되었고, 그 어록들은 수많은 리뷰들과 기사를 통해 드라마 밖 우리가 사는 현실에 적용되며 재해석되었다.


당시 드라마를 보는 재미만큼이나 <추적자>에 대한 다양한 리뷰를 읽는 재미도 만만찮아서, 매주 화, 수요일이 되면 <추적자>에 대한 글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다시 생각해도,  '추적자'는 사골의 국물이  끓일수록 맛이 진해지듯,  곱씹을수록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2012년, 이 드라마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드라마의 퀄리티에 버금가는 좋은 리뷰들이 이미 너무 많이 나왔지만, 쉽게 가시지 않는 드라마의 여운과 극 중 캐릭터들이 던지는 다양한 질문은 머리를 계속 맴돌았다.


그중에서도 이 드라마의 원제였다는 "아버지"라는 테마가 각 캐릭터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부분은 마지막까지 <추적자>가 내게 던진 질문이었고, 이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나만의 기록으로 정리해두고 싶었다.



1. 백홍석 - 아버지는 꿈이었다.

  

캐릭터 백홍석이 말하는 아버지는 "꿈"이다. 세상이 말하는 돈과 권력 중 홍석이 가진 것은 없다. 대신 홍석은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라는 따뜻한 가정과 단짝 친구, 든든한 동료들이 있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가진 것이 돈과 권력보다 훨씬 낫다고. 하지만 동시에 이 말은  이상일뿐이라는 것도 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돈과 권력이라고.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향해, 권력을 향해 매일 달려간다. 남녀노소, 빈부/학벌 차이에 상관없이, 돈과 권력을 좇는 것에 예외인 사람은 별로 없다. 그에 따른 보상과 결과(권력이나 돈을 얼마나 얻느냐)는 달라지겠지만.           

                       


돈 없고 권력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이미 낙오자다. 홍석은 낙오자다. 그는 돈과 권력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심지어 돈과 권력을 추구해야만 마땅한 세상의 법칙을 거슬러 그럴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낙오자 중에 낙오자다.


세상은 낙오자에게 관대하지 않다. 그가 갖고 있는 유일한 것. 가족과 친구를 빼앗고 가장 믿었던 동료 중 한 명도 등 돌리게 만들었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지 않은 대가는 처절하리만큼 아프고 가혹했다.


세상의 법칙대로라면, 홍석의 존재 의미는 여기까지다. 처절하게 패배한 낙오자. 가진 것이라고는 별 볼일 없는 "사람"뿐이면서, 그것을 뺏기지 않겠다고, 되찾겠다고 매달리는 홍석을 향해 세상은 "찌질하다"는 조소를 보낼 뿐이다.


강동윤과 서지수, PK 준만이 그를 조롱하는 것은 아니었다. 국민들 모두가 홍석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을 사고로 하루아침에 잃어야 하는 아비의 찢어지는 가슴은 관심이 없었다.


그 딸이 마약과 원조교제를 한 문제아였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이었다. 그 내용이 왜곡되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설령 홍석의 딸이 진짜로 마약과 원조교제를 한 아이였다 해도,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는 법이다. 죽어도 마땅한 생명은 없으며, 자식을 잃었는데 마음 아파하지도 못할 부모는 없다. 죽은 아이가 어떤 아이였든 (모범생이었든 문제아였든), 딸을 잃고 울부짖는 아버지의 눈물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돈 없고 권력 없는 아버지는 딸을 억울하게 잃어도 아파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잔인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법칙이자 현실인 것을, 우리 모두는 안다. 우리 자신도 이런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일부니까. 그래서 돈과 권력 대신 "사람"이라는 외침은  이상일뿐이다.


그러나 홍석은 이상을 현실로 만든다. 돈과 권력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기존의 패러다임을 기어이 바꾸고 만다. 그럼으로써 이상은 현실이 되고, 꿈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따라서 홍석은 "꿈"을 상징한다. 극 중에서 꿈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말한 인물은 동윤과 혜라였지만, 그들이 말한 꿈은 "돈과 권력으로 치장한 일그러진 세상에서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홍석의 꿈은 달랐다. 내년에 적금을 타서 딸의 방 도배를 바꿔주고, 아내는 가을에 커튼을 새로 달고, 딸은 전교 50등을 하는 것. 이들의 꿈 중에 돈과 권력의 세상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내와 딸이 죽고 자신만 남은 후에도, 홍석의 꿈은 여전히 돈과 권력의 세상에 융화되지 못한다. 돈과 권력 바깥에 있는 근원적이고 이상적인 세계. 현재의 왜곡된 세계를 허물고 이상의 세계를 끌어오는 건 어쩌면 영원히 "꿈"으로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꿈"을, <추적자>의 작가는 홍석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극의 전면에 배치한다.

 

홍석은 결국 승리했다. 징역 15년형을 받은 것이 언뜻 보면 실패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돈과 권력으로 왜곡되어 버린 세상에서 만의 이야기다. "사람"이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이상적인 세상에서는 홍석은 진정한 승리자다.


돈과 권력이 없는 사람도 그 존재만으로 귀하게 여겨지는 세상. 딸이 모범생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딸"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울 권리가 있다. 수정이의 누명이 벗겨진 것도 물론 필요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수정이가 어떤 아이였든, 수정이는 홍석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돈과 권력 따위로 감히 바꿀 수 없는.

 

수정이에게 홍석은 어떤 아버지였을까. 돈과 권력만이 전부인 세상에서,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물려주는. 타락한 현실에 가려져 꼭꼭 숨어버린 진짜 세상을 되돌려준 아버지. 감히 꿈꿀 수 없었던 꿈을 꾸게 해 주고, 우리 모두의 꿈을 이루어준 아버지.


홍석은 그런 아버지였다. 자식에게 진정한 꿈을 물려주는 그런 아버지.



2. 강동윤 - 아버지는 아픔이었다.                                   


동윤은 극 중에서 홍석과 대칭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돈과 권력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타락한 세상의 규칙을 그대로 답습하다 못해 동경하기까지 한다.


대통령을 정거장 삼아, 국내 최고 그룹의 회장 자리를 목표로 하는 동윤. 그는 극 중 누구보다 "꿈"이라는 단어를 많이 언급하지만, 그가 말한 꿈은 돈과 권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다시 말해서 "돈+권력=  꿈"일 뿐이다.


때문에 동윤의 캐릭터는 돈과 권력 앞에서만 그 존재 의의가 있다. 동윤은 앞서 홍석이 복원시킨 인간 자체만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는 설 자리가 없는 인물이다.


"저 강동윤은..." 이라며 그가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더없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결과 동윤은 '강동윤'이라는 인간으로서의 존재감 자체를 잃어버린, 껍데기만 남아버린 허상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동윤의 알맹이가 비어버린 것을 '아버지'의 테마로 풀자면, 동윤에게 아버지는 "아픔"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윤은 가난한 이발사의 아들이었다.


어릴 때는 배를 곪는 날이 빈번했고, 엄마 같던 누나가 산업재해로 죽었을 땐 보상금으로 대학 등록금을 내기 바빴던 시절을 겪었던 그였다. 넉넉하지 않은 것은 홍석의 집안도 마찬가지지만, 시대적인 배경까지 더해진 동윤의 집안이 더 가난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동윤은 어린 시절 이발소 건물 주인 아들에게 받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자라났다. 자신과 동갑이던 주인 아들보다 자기가 공부를 더 잘한 것도 자랑할 수 없었고, 주인 아들과 싸웠을 때 자기가 더 많이 맞았는데도 주인집에 사과해야 했던 기억. 그것은 어린 동윤에게 상처가 되었고, 치유하지 않은 상처는 썩을 대로 썩어 그의 영혼을 망가뜨렸다.


처제인 지원에게 "어른들의 싸움"을 언급하지만, 정작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캐릭터는 동윤이다. 어린 시절의 서러웠던 기억은 유력한 대통령 후보까지 된 상황에서도 집요하게 동윤을 괴롭힌다.


그런데 동윤에게 그 아픈 기억을 선물한 사람은 동윤이 누구보다 각별히 여기는 아버지였다. 동윤이 유일하게 인간미를 드러내는 사람은 아내인 지수도, 아들인  민성도 아닌, 늙은 이발사 아버지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현재 이발소 건물의 주인이 되었다.


당시의 건물주 가족은 이발소 건물의 지하 단칸방에서 산다. 아들은 한오그룹 사위이자 정치계 거물인사다. 예전과는 모든 면에서 달라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이발사"'이다. 동윤이 어렸을 때처럼. 이는 동윤이  어린아이에서 멈춰버렸음을 상징하는 코드다.


동윤은 홍석이나 서회장과 대립할 때, 언제나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무기로 삼는다. "어른들의 싸움"을 하려면 어른의 무기가 필요한데 동윤이 들고 있는 것은 어린아이용 무기다.


동윤의 아버지가 홍석처럼 동윤에게 진정한 꿈을 심어줬더라면 어땠을까.


돈 없고 권력이 없어 서러운 시간을 보내고는 있지만, 너는 인간 강동윤으로서 여전히 가치 있고 귀하다. 네가 어른이 되면 인간 강동윤이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다오. 그것이 내가 너에게 바라는 유일한 것이다.


이렇게 말했더라면 동윤은 진짜 어른으로 자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발소 건물을 사 달라는 것은 얼핏 보면 소박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복수의 스킬이다. 그로 인해 동윤은 '인간 강동윤'을 스스로 죽이며 자라 버렸다.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동윤에게 아버지는 아픔이었다. 돈과 권력으로 점철된 세상에 동화되기 위해 인간 강동윤으로서의 존재감을 버리는, 아픈 선택을 하도록 가르쳐준 그런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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