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추적자 더 체이서'
(1편에 이어서)
최정우 검사(류승수 분)는 정의를 위해 아버지의 손에 수갑을 채웠던 인물이다. 돈과 권력으로 뒤틀려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홍석과 마찬가지로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만인 앞에 법이 평등한 정의로운 세상이다. 하지만 '추적자' 초반부에서 정우는 홍석과 달리, 인간이기에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유토피아적인 세상까지는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개념을 규정한 것이 그 자신이 몸담고 있는 "법"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홍석이 꿈꾸는 세상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상처 때문이다.
최정우가 갖고 있는 상처는 동윤이 지닌 아픔과는 모든 면에서 다르다. 동윤에게 아버지의 의미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것임에 반해, 정우의 경우는 어른이 되었을 때다. 이는 신체적인 나이뿐 아니라 정서적인 나이까지 포함한다. 정우의 아버지는 정우처럼 법관이었다.
극 중에서 최정우가 왜 검사가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분명 아버지를 존경했고, 그래서 아버지가 몸담고 있는 법조계의 일원이 되는 것을 갈망했을 것이다. 최정우가 법조인의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루기까지, 그의 아버지는 정우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최정우가 꿈꾸던 세상이 "법 앞에 평등"이라는 것에서도 증명된다. 때문에 정우는 동윤과 달리 "진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극 중 동윤이 말한 "어른들의 싸움"을 "짐승들의 싸움"이라고 비웃을 수 있던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우는 그토록 존경했던 아버지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아버지 덕분에 정의가 살아있는 세상을 꿈꿔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그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현실과 아버지가 만들어준 꿈.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이보다 고통스러운 선택은 없다. 정우는 결국 아버지가 전해준 꿈을 선택한다. 그 대가는 아버지 손에 수갑을 채워야 하는 거였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꿈을 꾸는 방향을 잡아준 것은 아버지였지만, 그 꿈을 선택하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만든 것도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에게 아버지는 상처였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꿨던 꿈도, 아버지를 존경했던 마음도, 아버지와의 모든 추억도, 그에겐 결국 상처로 남고 말았다.
정우와는 다른 의미지만, 아버지가 상처로 남은 인물은 또 있다. 바로 신혜라다. 극 중 동윤의 보좌관으로 나오는 신혜라(장신영 분)는 명석한 두뇌와 정치적인 야망을 품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도 정우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페어 한 세상"을 꿈꾼다. 그 꿈을 위해 정우가 법조인의 길을 선택했다면, 혜라는 정치인의 길을 선택했다. "모두"가 페어 한 세상에서는, 법조인도 정치인도 똑같다. 따라서 정치를 하고 싶은 혜라의 소원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혜라는 페어 한 세상을 위해 페어 하지 않은 방법을 선택한다. 최종적으로 꿈꾸는 세상을 위해, 현재의 타락한 세상을 용납하는 모습.
목적과 수단이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은 '추적자'에서 혜라가 유일하다. 때문에 신혜라라는 캐릭터는 <추적자>에서 가장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그녀가 "배신의 아이콘"이 된 근본적인 원인은 그녀가 꿈꾸는 세상과 그녀가 받아들이고 있는 세상이 전혀 다른 때문이다.
혜라는 왜 이런 모순적인 인물이 되었을까. 원인은 그녀의 아버지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오그룹의 월급사장으로서 회장인 서동윤에게 평생을 충성했다.
하지만 한오그룹의 비리를 뒤집어쓰면서까지 충성한 대가는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것"이었다. "꼬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 그리고 꼬리는 꼬리를 낳을 뿐, 머리가 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숙명.
그녀는 동윤처럼 아버지를 위한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서회장이 언급했듯, 혜라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서회장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니까. 자신에게 몸통으로서의 운명을 주지 못한 사람. 그러면서 아버지 자신이 꼬리로서 이용만 당한 덕분에 딸의 꿈까지 막아버렸다.
동윤이 가난이 대물림 되는 것이 싫어 돈과 권력을 꿈꿨다면, 혜라는 꼬리로서의 신분을 벗어나고자 권력을 꿈꾼다. 페어 한 세상에서라면 꼬리든, 몸통이든 모두 평등할 것이다. 하지만 혜라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혜라는 사실 모두가 페어 한 세상에 대해 꿈을 꾼 적이 없다는 뜻이 된다.
모두가 페어 한 세상을 꿈꾸기에는 혜라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그 상처를 진지하게 대면하고 치료를 했어야 했지만, 혜라는 그 상처를 외면하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모두가 페어 한 세상. 나는 이런 세상을 원한다고.
하지만 그녀 자신이 진짜 원했던 건 "꼬리의 숙명을 벗어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 자신이 그걸 몰랐을 뿐이다.
꼬리의 신분만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한다. 사람을 죽이더라도 상관없고, 17살 소녀가 억울하게 죽은 진실도 기꺼이 은폐한다. 페어 한 세상을 위해. 그러나 실은 "꼬리"로서의 숙명을 떼어내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꼬리의 신분을 물려준 아버지와의 관계를 떼어버리기 위해.
안타깝게도 혜라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꼬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세상이 돈과 권력으로 타락했기 때문도 있지만, 그 세상에 그대로 동조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혜라 자신의 무지함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혜라는 이 모든 것을 아버지의 탓으로 돌린다. 영원히 꼬리로서 살아야 하는 운명. 자신의 꿈이라고 속고 있는, 하지만 진짜 꿈은 아닌, 페어 한 세상을 만들 기회도 앗아가 버린 아버지. 때문에 혜라에게 아버지는 상처다.
<추적자>에서 가장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인물은 단연코 서동환 회장이다.
흰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서 말 한 마디로 상대를 제압해버린다. 감정 기복을 표출하지 않은 채,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제압할 때도 부드럽게 이름을 불러준다.
그러나 이런 서회장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동윤, 정우, 혜라 등 많은 이들이 서회장을 두려워하지만, 그중에서도 서회장을 가장 두려워한 이들은 바로 서회장의 친 자식들이었다.
가장 가까워야 할 이들로부터 가장 많이 마음을 얻지 못한 서회장은 극 중에서 사실 가장 불쌍한 인물이다. 홍석보다도 더.
이는 돈과 권력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든 일등공신이면서도 그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마는, 또 다른 의미의 "꼬리" 인생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자신이 혜라의 아버지를 꼬리로 만들었듯이. 아니면 인간이 존중받는 꿈의 세상을 돈과 권력의 세상으로 타락시킨 대가일지도.
서회장의 세 자녀들에게 서회장은 어떤 의미일까. 영욱, 지수, 지원에게 아버지 서동환이 지니는 존재감은 엄청나다. 넘을 수 없는 산으로, 오염된 야망으로, 진실을 가려버리는 커튼으로, 서회장은 자식들에게 다가간다.
이것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자식들에게 서회장은 "거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세 자녀가 그 거울을 통해 반영하는 것들은 저마다 다르다.
서영욱(전노민 분)은 서회장의 장남이자 한오그룹의 후계자이다. 하지만 그가 뛰어난 후계자 재목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자타공인 무능력의 아이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대놓고 무시하고 그 자신도 한없이 나약해져만 간다.
사실 영욱에겐 다른 꿈이 있었다. 시인이 되는 것. 아버지의 문학적 기질을 이어받은 영욱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다른 아이들은 쓸 수 없는 뛰어난 시를 써서 상을 탄 적도 있었다.
시인이 되고자 했던 만큼 감수성도 풍부한 그다. 20대 시절 만났던 동사무소 여직원은 그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꿈도, 사랑도 모두 용납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에게 요구한 것은 한오그룹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착각하고 있었다. 막강한 재력과 한오그룹의 후계자라는 자리는 아들의 찬란한 미래가 된다는 것을.
하지만 한오그룹 회장의 장남이라는 타이틀은 영욱에게 날개는커녕 짐만 될 뿐이다. 아버지도 영욱처럼 한때 문학가를 꿈꿨으나 가족을 위해 꿈을 버렸다고 했다. 대신 아버지가 선택한 길은 돈을 벌어 한오그룹을 세운 것이었다.
아버지가 걸어온 길. 그것을 아들도 걸어야 한다. 아버지가 명령했고, 아들은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중이다.
영욱은 아버지의 길을 가는 것이 두려웠다. 아버지와 똑같은 꿈을 꾸었던 덕분에 영욱은 그 결말이 어떤지 누구보다 확실하게 직감한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사실은 자신에게 허락된 길이 아님을.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다. 그 길의 결말은 비극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길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길을 탐낸 것에 대한 벌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이미 보여주지 않았던가.
꿈을 버리고 택한 기업인의 삶을 살아오면서 아버지는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끔찍이 생각하는 가족에게서도 마음을 얻지 못하는 아버지. 그럼에도 그 길을 포기하지 못하는 아버지. 그리고 자신에게 그 길을 가라고 강요하는 아버지.
영욱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외로운 존재다. 누구보다 강해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여린 사람이다. 어쩌면 포기해야 했던 꿈 때문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하지 않을 텐데, 하는 후회가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영욱은 그걸 볼 수 있는 유일한 자식이다. 아마도 같은 꿈을 꾸었기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욱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고, 아버지는 영욱의 모습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꿈을 찾는다.
반면, 둘째 딸인 서지수(김성령 분)는 어떤가. 영욱이 아버지의 과거라면, 지수는 아버지의 현재다.
지수는 서회장의 자식 중 서회장을 가장 많이 닮았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점, 약자를 처절히 밟으면서도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점, 뛰어난 상황판단과 거래능력, 심지어 배우자로부터 마음을 얻지 못해 아파하는 점까지 아버지와 판박이다.
세 남매 중 가장 화려한 외모를 타고났지만, 가장 피폐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지수다. 절대 권력을 지닌 아버지가 마음은 상처투성이로 얼룩져있는 것과도 닮았다.
어쩌면 이렇게 닮을 수가 있을까. 재밌는 건, 아버지 서회장과 가장 많이 대립하는 자식은 바로 지수라는 점이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딸. 상식적이라면 가장 끈끈해야 할 관계지만, 이들은 서로 너무 닮았기에 가장 대립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와 마주 할 때면, 외면하고 싶은 자신의 추악한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가 투영하는 자신의 추함을 직면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때문에 지수는 아버지가 싫다. 피를 나눈 아버지이기에 연민을 느끼기도 하지만, 지수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아버지에 대한 근본적인 감정은 "증오"와 "원망"이다.
아버지를 믿지 말라던 어머니의 유언이 그녀의 가슴속에 깊이 박힌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유언은 자신을 향한 유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배 아파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가 유언으로 남긴 말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리고 그 아버지를 쏙 빼닮은 지수 자신을 향한 탄식이라니. 지수에겐 상처이자 충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살아있고 계속 지수의 눈 앞에 존재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그랬듯, 아버지는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에게도 상처를 준다. 그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지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욱과는 또 다른 의미로, 지수는 아버지를 마주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마주해야 하기에.
서회장의 막내딸인 서지원(고준희 분)은 서회장에겐 단비 같은 존재다. 현실의 괴로움을 싹 잊게 해주는 아이. 늦은 나이에 태어난 자식인 만큼, 서회장의 막내딸을 향한 사랑은 금지옥엽이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인지 지원은 밝고 싱그럽다. 오빠와 언니와는 달리, 지원의 얼굴엔 그림자가 없다. 싹싹한 성격과 웃는 얼굴은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든다.
밝고 씩씩한 지원을 만든 사람은 아버지였다. 영욱과 지수는 상상할 수 없는, 사람 좋고 인정 많은 아버지의 모습은 오직 지원만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지원이었기에 아버지의 인간적인 면을 끌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원은 그동안 아버지 서회장을 통해 세상을 봤었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서회장이 보여주는 인자함과 미소에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맡겼다.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 세상을 움직이는 돈과 권력을 가졌지만, 지원은 그것에 관심이 없다. 돈과 권력을 갖기 위해 주변 사람들이 그토록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데도, 그녀는 한 번도 그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는다.
대신 지원이 동경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마음"이다. 아버지가 만든 세상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 지원이 결국엔 아버지의 세상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버지의 인자한 미소 뒤에 숨겨진 진짜 모습을 보았을 때 지원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이는 그녀가 한오그룹의 사람이지만 한오그룹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버지를 통해 바라본 세상은 아름다웠고 행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지원은 몰랐다. 아버지가 보여준 세상은 돈과 권력으로 왜곡된 "비정상의 세상"이었음을.
아버지의 본 모습을 알고 난 뒤, 지원은 아버지를 통해서가 아닌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동안 아버지를 통해 바라본 세상과 아버지에 가려져 있던 진짜 세상의 차이는 엄청났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세상.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도리어 벌을 받는 세상. 자신이 그동안 보았던 세상은 모두 가짜였던가. 자신이 꿈꿨던 세상을 막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아버지라니.
지원은 그동안 자신이 보고 싶었던 것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이 봤던 것은 실은 아버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아버지의 손에 의해 철저히 가공된 가짜의 세상.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세상.
지원은 아버지가 실재가 아닌 허상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순간, 지원은 "진짜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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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