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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비키 Sep 19. 2015

치유의 레시피로 기적을 선사하는 마법의 식당

소설 '달팽이 식당'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 토마스 모어는 저서 <유토피아>에서,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인 '유토피아' 이론을 제시했다.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 유토피아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잠깐 답을 보류하고 아래 단락을 읽어보자.
 

하루에 한 팀만 받는 곳. 테이블은 하나. 예약은 필수. 

정해진 메뉴는 없다. 손님의 상황에 맞게, 또는 전적으로 주방장의 판단에 따라 그날 그날의 메뉴가 달라진다. 음식 만드는 소리와 자연의 소리 외에는 일체의 음악도 없고. 

식사는 문 닫을 시간 전까지는 손님 맘대로 얼마든지 여유롭게. 모든 음식재료는 식당 부근에서 나는 천연 재료들이며, 제공되는 음식은 천연재료의 맛을 온전히 살려서 조리하는 곳.


요즘 세상에 이런 식당을 개업하면 망하지 않는 게 이상할 거다. 주변에서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또는 농담하는 거라고 치부해버릴지 모른다. 


당연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업성"을 고려해야만 하는데, 이런 식당은 상업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 이런 곳은 그냥 우리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낫다.
 
그래서 소설이 존재하는가 보다. 그저 속으로만 바라는 것이 최선인 유토피아의 세계. 그곳을 글로 조금씩 풀어내고, 캐릭터를 창조하고 거기에 스토리를 부여하면, 어느 새 우리 맘에 간직했던 유토피아는 구현되어 있다. 그것이 비록 종이 위에서만 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읽는 동안 우리는 더없이 행복해진다.
 
그렇다면 다시 위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 유토피아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정답은 예스! 그것이 꼭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이든 가상이든 실현만 되면, 다시 말해 충분히 그럴 듯하게 구현해내기만 하면 되는 거다. 오케이?



일본 작가 '오가와 이토'의 소설 <달팽이 식당>은 바로 우리 모두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식당을 글로 구현해낸 소설이다. 


세상 물정 모른다고 주변에서 쓴 소리를 듣기 십상인 그런 식당. 상업성을 따질  수밖에 없는 현실 따위는 기꺼이 무시할 수 있는 그런 식당. 그럼에도 바쁜 일상 속에서 이리저리 치인 현대인들이 한 번쯤은 꼭 가고 싶기 때문에, 의외로 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마구 믿고 싶어 지는 그런 식당. 


여주인공 린코가 꿈꾸고, 우리 모두가 반기는 '달팽이 식당'이다.
 





<달팽이 식당>은 제목처럼, 달팽이 식당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제공되는 갖가지 음식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푸드 소설'이다.  


주인공 린코는 알바를 하고 돌아온 어느 날, 이 갑자기 텅 비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인도인 애인이 모든 걸 가지고 야반도주한 탓이다. 애인 놈은 심지어 가구며 온갖 살림살이까지 싹 다 훔쳐갔다. 남겨 놓은 것이라곤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겨주신 겨된장 (일본식 발효반죽) 뿐이다.
 
그 충격으로 린코는 실어증에 걸려 버렸다. 그래도 살긴 살아야겠어서, 엄마가 있는 고향집으로 내려가기로 하지만, 이런! 


10년 만에 고향에 가는 건데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할머니의 겨된장과 의사소통을 위한 필담노트가 전부다. 그렇잖아도 엄마와 사이가 좋지도 않은데 말이다. 10년 만에 만난 엄마는 딸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키우는 암퇘지 '엘메스'를 돌봐줄 것을 요구했다. 식비, 난방비, 월세는 물론 별도다. 


비참하다. 돈도 없고,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실어증에 걸렸고, 유일한 가족인 엄마라는 사람은 조건을 내세운다. 이보다 상황이 나쁠 수 있을까. 불행이란 게 원래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그것도 도미노처럼 한꺼번에 닥쳐오는 습성을 가졌다지만, 심술궂게도 불행은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유독 더 가혹하게 군다. 


그래서 아무리 강한 의지와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뜻하지 않은 불행을 만났을 때, 절대적으로 치유가 필요하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그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결국에는 본연의 모습까지 왜곡시키는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린코도 마찬가지였다. 나약하고 의존적인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린코에게는 치유가 필요했고 절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잠깐의 실어증은, 어쩌면 영원한 재갈이 되어 린코에게 침묵을 강요하게 될 지도 몰랐다.



'달팽이 식당'은 그런 이유로 계획되었다. 엄마에게 월세를 내기 위해, 그리고 아픔을 잊기 위해, 린코는 무엇이든 해야 했다. 


다행히 할머니에게서 배운 레시피가 머리 속에 있었고, 도시에서 살 때 여러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요리를 만드는 그녀의 몸은 건재했고, 할머니의 유품인 겨된장도 있었다. 마침 집 주변은 식당으로 쓰일 장소인 창고와, 시골인 덕분에 각종 천연 음식재료들도 즐비했다. 요리는 린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자 그 순간에 제공된 유일한 기회였던 셈이다.

 
린코는 식당의 이름을 '달팽이'로 정한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행복한 식당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고, 그 순간 '달팽이'가 떠오른 때문이었다. 그래서 린코의 식당은 '달팽이 식당'이라고 정해졌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음식을 맛보게 할 수 있는 곳.  
그럼으로써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곳.
  


요리는 만드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추억이 되기도 하고, 아픔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요리는 소통의 수단이다.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통로. 그래서 요리에는 단순히 '맛'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 먹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달팽이 식당'은 이 '맛' 이외의 플러스 알파를 가진 식당이었다. 개업 첫날부터 달팽이 식당은 치유의 레시피로 수많은 기적을 일구어낸다. 첫 손님이었던 구마 씨를 필두로, 두 번째 손님이었던 구마씨의 옆집 할머니, 짝사랑하던 남학생과 함께 온 여고생, 식성이 정반대인 노총각과 노처녀 등은 모두 '달팽이 식당'의 음식을 먹으며 저마다의 기적과 치유를 맛본다.  


심지어 동물도 '달팽의 식당'이 제공하는 마법의 수혜를 입었다. 주인에게 버림받아 거식증에 걸린 토끼는 린코가 만든 비스킷을 먹고 원래의 쌩쌩함을 회복했다. 이는 린코가 토끼가 담겨있던 상자에 쓰인 글씨체, 전 주인이 쓴 편지 내용, 토끼의 생김새 등을 통해 토끼의 과거와 마음 상태를 추론하여 비스킷을 만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음식은 요리 실력이 전부가 아니다. 그보다는 먹는 이의 마음과 생각, 나아가서 그 사람이 상처를 받았다면 그 상처를 받기까지의 과정까지 모두 고려하는 자세. 즉, 먹는 이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고려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건 다시 말하면, "음식=그 사람"이라는, 음식 하나에 그 사람을 위한 모든 것을 담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진부할 수 있는 명제가 각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에피소드를 통해 신선하면서도 임팩트 있게 그려지는 건, 작가 오가와 이토가 지닌 힘일 것이다.


달팽이 식당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식당이었지만 동시에 린코 자신을 위한 치유의 장소였다. 표면적으로 린코의 아픔의 원인은 말도 없이 도망가버린 애인에게서 받은 배신과 상처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아픔은 엄마와의 관계에 있었다. 


엄마는 린코(倫子)의 '린(倫)'이 불륜을 통해 낳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궁여지책으로 내뱉은 엄마의 거짓말은 딸이 줄곧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고통 속에 자라오도록 만들었다. 


떳떳하지 못하게 태어난 아이. 그래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라 왔지만, 정작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은 딸을 나몰라라 한 아버지가 아니라, 무책임하게 자신을 낳아놓고도 미안해하지 않는 엄마였다.

아무리 쑥스러워 그랬다해도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엄마도 그때는 어렸고 아팠기 때문이라는 것을, 린코는 알지 못했다. 할머니가 사랑을 찾겠다며 엄마가 어린 시절에 집을 나가버렸다. 사랑을 거절당한 채 자라왔던 엄마는 그래서 자신의 딸인 린코에게는 그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지만, 어떻게 사랑을 주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숙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린코는 이런 엄마의 상황을 알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린코에게 엄마의 존재는 미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을 감싸주고 사랑해주는 장점을 가진 린코였지만, 엄마만큼은 사랑할 수 없다. 애인에게 차이면서 생긴 실어증은 사실 엄마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완전히 단절된 (그리고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는) 린코의 마음을 대변하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영화 '달팽이 식당'의 한 장면


달팽이 식당이 주는 치유와 기적의 마법이 엄마에게도 통할까. 한없이 밉기만 했던 엄마. 하지만 알고 보니 그동안 린코 자신이 살아왔던  순간순간마다, 그리고 삶의 곳곳에 엄마의 사랑이 녹아있었다. 


엄마는 어린 린코가 혼자 집에 있으면 무서워할까 봐 자명종을 '부엉이 영감'이라고 말해줬었고, 진지하게 열심히 윤리를 지키며 살라는 의미로 그녀에게  린(倫)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사랑을 찾겠다고 할머니가 집을 나간 탓에 엄마는 어린 시절 친척집을 전전했고, 그래서 딸인 린코에게는 그런 아픔을 주지 않으려고 시골 집에서 억척스레 일하면서 꾸역꾸역 버티고 살아왔다는 것을, 그러다 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을, 린코는 몰랐었다. 

 
너무 늦게 엄마의 사랑을 알아버렸다. 그렇게 미워했는데.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엄마의 품에 실컷 안겨보지 못한 후회로,  소설 후반부에서 린코는 많이 운다. 


애인의 배신을 비롯한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던 린코였다. 하지만 엄마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순간, 린코는 운다. 이는 린코가 자신의 아픔을 직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게 된 것을 뜻한다.   


달팽이 식당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음식을 먹는 곳이었다. 린코가 엄마에 대한 오해를 풀고 걸어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다시 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엄마는 재촉하지 않았다. 천천히 기다렸다. 달팽이는 느리게 움직이는 생명체의 대명사다. 꿈틀대며 쉼 없이 움직이긴 하는데, 별 진전은 없다. 그래도 달팽이는 멈출 수 없다. 멈추는 순간, 그 달팽이는 죽는다.




린코와 엄마는 달팽이였다. 당장 변화가 없었더라도, 두 모녀는 계속해서 꿈틀대며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희미하게만 보였던 상대의 얼굴이 이제는 비교적 선명하게 보이는 수준까지 가까워진 것이다. 


린코는 엄마가 오래 기다렸던 고교시절  첫사랑과 결혼하는 날, 엄마를 위해 피로연 음식을 만든다. 아픈 엄마를 위해 세계 여행을 대신할 수 있는 세계 각국의 요리들로.  할머니와 달리, 자녀를 위해 사랑을 포기했던 엄마는 이제 사랑을 선택해도 되었다. 


작가는 왜  식당이름을 '달팽이'로 했으며, 그곳에서 치유받은 존재로 '집 나간 토끼'를 언급했을까. 


달팽이와 토끼는 모두 린코였다. 주인에게 버림받고 거식증에 걸렸던 토끼는 가족과의 관계 단절로 상처입고 실어증에 걸린 린코와 닮았다. 하지만 토끼는 사실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해 정성스레 편지를 썼던 주인의 마음을, 토끼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토끼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집을 나간' 것이었다. 10년간 엄마와 단절하고 살았던 린코는 엄마의 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했었다. 불륜의 자식. 잘못 태어난 자식이라고 여겼을 테니까. 


그러나 린코의 음식에 담겨있는 사랑이 전해졌을 때, 집 나간 토끼는 다시 건강해졌다. 오해로 비롯된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었기에 가능했다. 토끼의 변화는 린코의 변화와도 같다. 엄마와의 오해를 푼 린코는, 그 순간 오랫동안 간신히 몸만 움직이던 '달팽이'로서의 모습을 벗고, 건강한 토끼가 되어 엄마를 향해 뛰기 시작한다. 


엄마 결혼식의 피로연 음식을 만드는 것은 린코의 소극적이었던 자세가 이제는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토끼처럼 껑충껑충, 빠르게 말이다.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요리에는 젬병인 나로서는, 온갖 음식을 만드는 것이 취미인 사람들이 그저 신기하고 부럽고, 때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만드는 시간에 비해 먹는 건 너무 순식간이라, 효율성이 가장 떨어지는 것이 음식 만들기 아니냐고 생각할 정도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안다. 음식은 단지 '미각'을 충족시켜주는 용도만은 아니라는 것을. 음식에도 철학이 있고 예술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지만 (모순이지만 솔직히 그렇다. 이해가 되고, 또 이해가 안 되는 심정이다), 음식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가장 효과적인 통로라는 데에는 한 번도 이의를 가져본 적이  없다.
 
소설 속 린코가 한 말 중에 "싫어하는 감정은 반드시 맛에 반영되니까, 어쨌든 마음도 머리도 비우기로 했다"(P.176) 구절이 있다. 


요리는 요리사의 요리실력이 아니라, 요리사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맛을 결정하는 것은 식재료가 아니라 요리사의 사랑이다.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한동안 요리에 대한 의욕마저 잃고 달팽이 식당을 접으려고 했던 린코가 다시 달팽이 식당 테이블에 식탁보를 깔고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먹는다. 


음식은 린코의 식욕을 돋구었고, 마음을 만져주었으며, 그 결과로 잃었던 목소리까지 되찾게 해주었다. 그동안 어쩌면 고통과 상처의 감정이 배었을지도 모른 그녀의 요리는 이를 계기로 한층 더 성숙할 것이다. 이제부터 그녀의 음식은 기쁨과 웃음, 행복, 사랑이 좀 더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시 요리를 시작하자.
내 주위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요리를 만들자.
먹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요리를 만들자.
먹고 나면 아주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는 요리를, 앞으로도 계속 만들자.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이곳, 달팽이 식당에서. (P.236)


영화 '달팽이 식당'의 한 장면


행복한 표정으로 활짝 웃고 있을 린코의 모습이 떠올라, 마지막 장을 읽는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소설 <달팽이 식당>에서 작가인 오가와 이토는 반짝 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가령 "끓는 물에 살짝 데친 신선한 브로콜리처럼 건강한 숲의 나무들(P.230)", "어시장에 뒹구는 참치의 배처럼 반짝인다(P.76)", "굵은 눈물방울은 마치 해변에 올라가서 산란을 하는 바다거북의 알처럼 뺨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P.74)", "아름다운 석양은 마치 지구를 그대로 거대한 물병에 담가놓은 것 같았다(P.80)" 등이다.
 
수식어가 많으면 자칫 미사여구의 남발로만 이어지기 쉽다. 실제로 엉성한 스토리를 미사여구로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내놓은 소설들도 종종 봤다. 그럴 때면, 맛있는 것 같지만 결국엔 느끼해서 체하고 마는 음식을 먹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런데 오가와 이토의 글은 예쁘면서도 체하지 않을 만큼 담백하다. 화려한 수식어구들이 많이 사용됐지만, 전반적인 톤은 담담하다. 무엇보다 1인칭 시점임에도 주인공의 감정과잉이 별로 없다. 후반부에 가서 엄마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우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그때조차도 소설의 문체는 차분하다.


그 때문인지 소설 <달팽이 식당>은 읽는 내내 부드럽고 따뜻하며 편안한 느낌을 전한다. 따뜻한 수프를 먹는 것처럼, 맛있고 부드러우면서도 속을 편하게 달래 주는 느낌. 크림과 버터, 설탕이 가득 들어가 느끼하고 결국 토하고 싶게 만드는 글이 아니라는 점에 기분 좋았다. 동시에 아름다운 직유의 표현들을 살펴보는 기분도 좋았고.

 


현실에도 저런 식당이 있을까.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언젠간 해보고 싶다. 내가 요리를 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그런 장소만이라도 제공할 수 있는 곳.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해도 좋다. 어차피 유토피아의 공간 아닌가.
 
<달팽이 식당>. 치유의 레시피로 기적을 선사하는 마법의 식당을 완벽히 재현해낸 오가와 이토에게 새삼 고마웠다. 더불어 책을 통해 달팽이 식당의 손님이 되어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경험 삼아 나도 오늘은 수프를 만들어볼까. 그래 봤자 오뚜기 3분 요리 인스턴트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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