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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비키 Sep 17. 2015

삶의 매 순간을 언제나 찬란하게!

소설 '두근 두근 내 인생'


                                                                                                                                                                                                                                                                                                                   

'두근두근 내 인생'.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작가 중 한 명인 김애란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이다.


첫 단편집이었던 '달려라 아비'를 읽고 관심을 갖게 된 작가였기에, 그녀의 첫 장편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척이나 반가웠었다. 하지만 밀렸던 책들이 많아서 출간한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읽었던 책이다.

                                                                           

                                                              

매 순간을 찬란한 인생으로 완성시킨 한 아이의 이야기.                                                     


'두근두근 내 인생'은 조로증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17살의 아름이의 이야기다.


초반부는 17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아름이와, 그런 아름이를 17살에 가졌던 아름이 부모의 과거 시절이 챕터마다 교차되며 전개된다. 이때 부모의 과거 이야기는, 소설이 아름이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취하고 있는 관계로,  아름이가 어른들의 대화를 들었던 기억을 살려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동갑내기 한대수와 최미라는 고교시절에 부모가 되었다. 17살의 철없는 그들에게 아기는 엄청난 변화였다. 철없는 나이에 벌인 불장난으로 갑작스럽게 그들에게 덜컥 찾아온 아기, 한아름.


17세의 어린 부모 대수와 미라는 그렇게 아름이로 인해 부부의 연을 맺고 서툰 부모의 삶을 시작한다. 순식간에 17년의 시간이 흘렀고, 아름이는 그들이 처음 부모가 되었던 나이인 17살의 소년(?)이 되었다. 그리고 대수와 미라는 여전히 젊은 34세의 나이에, 17살 아들을 둔 부모로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나이는 말 그대로 숫자일 뿐이다. '17'이라는 숫자로 얽힌 가족임에도, 이들에게 숫자는 더없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7세의 아름이는 조로증에 걸렸다. 빨리 노화가 일어나는 이 병 때문에 아름이는 17세의 신체가 아닌 심하게 늙은 노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글의 프롤로그에서 아름이의 입을 빌려, 작가는 이렇게 서술한다.



"아버지는 자기가 여든 살이 됐을 때의 얼굴을 내게서 본다.
나는 내가  서른넷이 됐을 때의 얼굴을 아버지에게서 본다.
오지 않은 미래와 겪지 못한 과거가 마주 본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는다.
열일곱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서른넷은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중략)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책의  제목뿐 아니라 전체적인 스토리를 아우르는 프롤로그다. 책장을 처음 펼친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중심 동기를 제대로 요약하고 있다.


이 책은 일차적으로는 나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보다 깊게는 '삶의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고 꿈꾼 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을 때, 그럼에도 그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사고를 쳐서 태어난 아이가 조로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렸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만 보면 끔찍하리만큼 불행하고 우울하다.


그런데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슬픔을 슬픔으로 표현하지 않고 담담하고도 침착하게, 심지어 때로는 너무도 발랄하고 유쾌하게 그려냈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 과잉이나 미사여구로 흐르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삶에서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지극히 사소한 것들을 간절히 바라는 아름이었기에, 그 아이가 표현하는 단어들은 일상어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특별히 화려한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면서, 소박한 언어로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창조한 점은 이 소설의 매력을  높인다. 아름이가 처한 상황은 누가 보아도 슬프고 고통스러운 상황이기에 그렇다.


17세의 한창일 나이에 조로증에 걸렸다는 것. 싱그러운 젊음과 그런 젊음이 완전히 지나가버린 노년은 극과 극으로 상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상의 젊음과 최악의 노년이 한 몸에 동시에 존재한다. 아름은 그 자체로 모순이고 부조화이며 부조리한 존재다. 신이 '실수' 혹은 '실패'한 창조물. 잘못된 존재. 한 마디로 '돌연변이'와 다름없는 셈이다.


그러나 아름이는 자기연민, 자기동정 같은 것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것들과 할 수 없어서 그리운 것들을 차분히 정리하고 그것을 충분히 표현한다.


아름이 가장 그리워하는 순간은 바로 자신이 태어나기까지의 시간이었다. 17살의 부모가 만나 서로에 대해 설레어하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답답해하기도 하고, 청소년기의 열정으로 (비록 사고를 치긴 하지만) 불같은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일도 하고, 사업 실패도 하고, 아기도 낳고, 부모가 되는, 이 모든 과정이 아름은 너무도 "그립"다.


17살이지만 17살의 모습을 가진 적도, 아니 그 이전부터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실제 나이로 살아본 적이 없었던 아름으로선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자신과 같은 나이인 17살에 부모가 된 엄마, 아빠. 17살의 부모는 결국 아름이 자신이었고, 그랬기에 아름에겐 그 시절이 가장 그립고 행복했던 과거이자, 절대 겪을 수 없어 가장 궁금한 미래였다.


따라서 그가 그리워했던 과거는 부모의 과거이자 현재였고, 그것은 실제로 존재했던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미래는? 과거는 부모를 통해 찾았다 치고, 미래는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오래 살고 싶다는, 생에 대한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아주 잠시라도, '미래'라는 시간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맙게도, 잠깐이나마 그 미래를 꿈꿀 수 있던 기회가 왔다. 17살 동갑내기 이서하. 여자아이이고, 자신처럼 불치병을 앓고 있다. 동갑내기이고 같이 방황하던 엄마와 아빠처럼.


동갑내기의, 같이 고통받고 있던 그 여자아이는 서슴없이 아름에게 다가와 주었다. 아름은 가슴이 뛰었다. 처음 경험하는 감정이었지만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서하는 아름에게 첫사랑이었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랑이었다.


그 옛날 엄마, 아빠도 이랬을까. 비록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지만, 이메일을 통해 마음을 나누는 동안, 아름에게 허락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미래'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꿈. 앞으로 하고 싶은 것. 가치관. 소소한 일상. 아름이 서하와 나눈 이야기들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평소에 흔히 나눌 수 있는 그런 보통의 이야기들을 나누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내용들이 모여 순간을 이루고, 순간들이 모여 개인의 삶을 완성한다. 삶은 대단한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그래서 때로는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OECD 국가 중 국민행복지수가 최하위를 기록한다는 보도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주변을 돌아봐도, 나 자신만 보아도, 특별한 삶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도 평범하다 못해 며칠 정도는 지워버려도 별 차이 없을 것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매일 거의 똑같이. 개성 없이. 정신없이 달렸는데 별로 나아진 것이 안 보이고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머물러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보니 종종 허무함에 사로잡히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게 삶의 본질 아닐까. 특별한 것이 없어도, 지극히 평범하고 별 것 없어 보이는 그 일상 속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사귀고, 일과 공부를 하며, 먹고 마시고 휴식한다.


많은 돈을 벌지 못해고, 뛰어난 외모나 능력이 없어서 현실에서는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이런 우리들이 모여서 사회를 만들고 나라를 만들며, 나아가 인류의 발전을 이끈다.


사람들의 불만이 커져가는 시대다. 연일 보도되는 뉴스들을 보면, 자신들의 현 상황을 한탄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댓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주된 요인들을 보면 주로 돈, 연애, 일자리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


풍요의 시대에 수중에 있는 물질의 분량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70억 인구를 기록하며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인구 대폭발 현상이 나타났는데도 내 짝을 만나기는 점점 더 힘이 들어서, 고스펙으로 무장했는데도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어서. 그래서 사람들은 괴로워하고 분개한다.


분노하고  슬퍼할수록 잃게 되는 것은 꿈이다. 그리고 내 삶이다. 구질구질해 보여도, 찌질해 보여도, 내 삶의 순간을 구성하고 있는 지금의 힘든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잊어버렸다.


아름이는 누구보다 분노하고 슬퍼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가장 예쁠 나이에, 완전히 늙어버린 노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니. 그 자체로 거대한 모순덩어리일 수밖에 없는 아름의 육체는 추함의 표본이다.


그러나 추한 육신을 입고서도, 아름의 생은 찬란하게 빛났다. 매 순간, 추한 얼굴로 숨을 쉬고 살아가지만, 소소한 일상이 과거부터 미래까지 계속되는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아름의 삶은 아름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 조로증 걸린 아름은 더 이상 없다. 대신 첫사랑에  설레어하고, 그 사랑과 소박한 미래를 일궈나갈 상상에 빠져보기도 하며, 그래서 자신만의 꿈을 꾸기 시작하는 17세의 풋풋한 소년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아름이 '조로증'을 겪는다는 설정은 당위성을 갖는다. 아름의 조로증은 단지 얼굴이 늙어버리는 '추함'의 도구가 아니다. 숫자적으로는 아름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들조차 너무나 쉽게 간과하고 있었던, 부족한 것 투성이인 일상을 즐기고 감사할 줄 아는 여유와 지혜를 주는 '성숙'과 '연륜'의 수단인 것이다.


'조로증' 설정에 이 같은 중의적 의미를 부과한 것이 처음부터 계산된 것이라면, 김애란은 무서우리만치 영리한 작가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작가는 부족해 보이는 삶이라도 사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 아름의 '조로증'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하와의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소설의 중반 이후부터는 전체적으로 신파의 느낌이 강하게 배어난다. 책의 밝고 긍정적인 어조를 방해하는데다, 뻔한 느낌마저 전달해 전체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부분이라 개인적으로는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서하와의 스토리가 없었다면, 이 소설은 지극히 아름이의 과거(부모의 과거)에만 집중하는 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두근 두근 내 인생'이라는 제목에 담긴 문자 그대로의 뜻처럼, 삶이란 과거와 현재 외에 미래도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작가는 불치병 소년이 그리도 살고 싶었으나 살 수 없었던 미래가 무엇이었는지를 표현해야만 했을 것이다. 불치병과 미래가 엮이는 순간은 대부분 '신파'의 구성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서하와의 스토리를 포함한 작가의 선택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서하는 가짜였다. 17살의 불치병 소녀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37살의 시나리오 작가 아저씨가 있었다. 서하가 가짜라는 설정은 "뻔하게 여겨지는 반전"으로만 다가와서 아쉽긴 했다. 불치병에 걸려 중환자실에서 오늘 내일 하는 아이가 그렇게 메일을 잘 쓰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 너무도 성숙하고 의젓하게 메일을 쓴다는 것도 그렇다.


아름이도 사실 17살 답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조로증'에 걸렸고, 부모의 모습과 겹쳐지는 상징으로 해석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주인공이기도 하고!


하지만 서하마저 너무 어른스럽고 (심지어 너무 어른스러워서 징그럽기까지 했다) 의젓한 모습은, 반전을 알기 전에도 "과연 이게 17살 소녀의 말투 맞아?"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서하 캐릭터의 부재"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서하와 아름은 성격이나 말투, 설정 등 모든 면에서 캐릭터의 차별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이 소설은 아름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들은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단점을 갖고 있긴 하다.)


하지만 서하와의 에피소드는 아름에게 공란으로 남았던 '미래'를 채워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삶은 과거와 현재에 "미래"가 공란을 채울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렇기에 아름은 자신이 살 수 없었던 미래를 잠시라도 살 수 있게 해주었던 '서하'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비록 그 아이가 가짜였다 해도, 아름에게는 난생 처음 설렘을 느껴보았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으며, 유일한 또래 친구였으니까.


질투도 느껴보았고 분노도 느껴본 것은 서하에 대한 마음 때문에 가능했다. 자신의 첫사랑이 가상의 존재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난생 처음으로 가슴 아파 울어보기도 했다.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지만, 아름은 실패를 겪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실패했다. 첫사랑을. 그래서 아팠고 괴로웠다. 하지만 덕분에 찬란한 미래를 겪어 보았다.


아파서 나쁠 거라고만 느껴진 실패는 아름의 짧은 생에서 '슬픈 순간'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아름의 삶을 보다 풍요로운 경험으로 채워주었고 결과적으로 아름의 생애가 반짝거리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네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어쩌다 여기까지 찾아오게 됐는지도 모르겠고. 너는 아마 지금 내가 무척 화가 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 그래, 맞아. 원망했던 것도, 미워하고 저주했던 것도 사실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 몰라."


(중략)


"그래도 한 번쯤은 네게 이 얘기를 전하고 싶었어. 우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 직접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고,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만날 수 없을 테지? 하지만 너와 나눈 편지 속에서, 네가 하는 말과 내가 했던 얘기 속에서, 나는 너를 봤어."


(중략)

"그리고 내가 너를 볼 수 있게, 그 자리에 있어주었던 것, 고마워."  (P.308-309)



소설은 장편임에도 많은 인물들이 나오진 않는다. 대여섯 명의 소수의 인원인지만 그들의 모습은 평범한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름이, 아빠, 엄마, 장씨 할아버지, 승찬 아저씨, 그리고 서하. 이들 모두는 그리운 과거가 있고, 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으며, 설렘과 아픔을 안고 열심히 현재를 살아간다.


심지어 서하를 가장했던 37살의 아저씨마저도 꿈은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의 꿈. 그 아저씨도 17살을 지나왔겠지. 그 아저씨는 자신의 17살을 어떻게 회상하고 있을까. 17살 아름이의 사랑과 미래를 앗아간 그도 한때는 꿈을 꾸며 미래를 그렸던 시간이 있었을 텐데. 자신이 훗날 어떤 가여운 아이의 미래를 의도적으로 망가뜨리는 삶을 살게 될 거라고는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 모두는 그리운 과거가 있고 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현재를 위해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혹시, 나는 오늘을 살면서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꿈을 망쳐놓지는 않았는지 반성을 해본다.


그리고 나의 17살.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려본다. 난 그때 어떤 삶을 기대하고 있었던가. 주변의 사소한 것에 두근거릴 줄 알던 아이였던가. 과거, 현재, 미래 모두 감사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어느 하나만 집중하느라 나머지를 잊고 살았는지.


많은 생각을 던져준 책이었다. 쉽고 간결한 문장이면서도 밀도감이 깊었고, 구구절절한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는데도 표현력이 좋았다. 하나같이 착하고 의젓한 사람들만 나온데다 인물 간의 뚜렷한 특징이 구분되지 않는 것은 살짝 아쉬웠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두근두근 내 인생'. 단편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김애란 작가가 첫 장편에서 보여준 재능은 놀라웠다. 보편적이긴 했지만 '조로증'이라는 설정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힘 있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뚝심도 맘에 들었다.


지금 이 순간도 내 삶은 보잘 것 없다. 나만의 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하고 대단한 일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어제처럼, 또 남들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무색무취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그래도 내 삶을 사랑하련다. 무색무취의 순간들이라도 모이면 찬란한 빛을 띤다. 조로증에 걸린 아름의 삶도 그랬다. 그래서 너와 나, 주위의 평범하다 못해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삶도 찬란할 것이다.


돈이 조금 없다고 해서,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시도한 것이 전부 실패로 끝났다고 해서, 반짝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모두의 삶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빛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두근거려' 하면서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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