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문화 2022년 1월호 기고글
본 글은 <출판문화> 2022년 1월호에 실린 원고 전문입니다. 칼럼 형식으로 가볍게 썼으니 편안하게 읽어주세요. 제안해주신 출판문화 편집자님께 감사드립니다.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다. 그 옛날 구텐베르크의 활자술이 발명된 이후 ‘글’은 인류 역사를 이끄는 강력한 수단이자 장치였다. 그러나 20세기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정보와 오락 측면에서 인류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 수단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글’이 아닌 ‘영상’이다.
기술의 발전은 영상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영상을 담아내는 ‘그릇’마저 바꾸어놓았다. 인터넷과 모바일의 발전으로 영원할 것 같았던 TV 시대는 종말의 단계에 접어들었고, TV가 떠난 자리는 ‘구독기반의 OTT 스트리밍 플랫폼들(SVOD)’ 차지가 되었다. 매일 수십 건씩 쏟아지는 OTT 관련 뉴스는 OTT 시장의 치열한 경쟁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의 대결은 세계대전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여기에 웨이브, 티빙 등 국산 OTT 사업자들 또한 연합과 반목을 반복하며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자 몸부림치고 있다.
OTT 플랫폼 시장의 대혈투는 영상 콘텐츠 사업자들에겐 희소식임에 분명하다. 문제는 출판 시장이다. 2014년 도입된 도서정가제는 책이 지닌 ‘콘텐츠’의 가치를 제대로 반영한다는 취지를 살리기는커녕, 책의 ‘콘텐츠’ 가치를 대중이 외면하게 만들며 오히려 책에 대한 거부감을 높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미쳤다. 여기에 영상에 익숙해진 세대가 증가하면서, 책에 대한 인식은 어느덧 ‘고리타분 또는 지루함’ 같은 이미지로 고착화되고 있다. 18세기 근대적 ‘시민’을 탄생시키며 대혁명을 이끌었던, 찬란했던 책의 역할이 불과 3세기 남짓 지난 21세기에 들면서 허공 속 외침처럼 희미해진 느낌이다.
그럼에도 영상시대로의 전환을 맞이하는 출판계의 미래가 비관적이지 않은 것은 다행인 일이다. OTT의 오리지널 콘텐츠 경쟁이 심화되면서, 책으로부터 IP를 발굴하려는 움직임이 증가된 덕분이다. 대중의 지적욕구를 충족시키는 책의 역할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최근의 책은 영화, 드라마, 게임, 만화, 뮤지컬 등 다양한 콘텐츠로 가공되는 원천 IP로서의 역할이 더 강해졌다. 비록 ‘소설’ 분야에 한정된 부분이긴 하나, 출판시장이 빠르게 쇠퇴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천 IP’로서의 책의 가치가 새롭게 부상한 것이다.
이제 책은 이제 OTT라는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영상화’되거나 웹콘텐츠 형태로 온라인 플랫폼에서 유통될 때 본격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한다. B2C 콘텐츠에서 B2B 콘텐츠로 자연스럽게 바뀐 것이다. 그에 따라 본고에서는 OTT 전성시대가 출판계에 미치는 영향과 함께, 출판계가 앞으로 주력해야 할 과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B2B 영역에서 출판계와 OTT 사업자의 활발한 협업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오리지널 콘텐츠’가 치열한 OTT 경쟁을 이끄는 핵심 요인으로 부상한 것 또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자연스럽게, ‘원소스 멀티유즈(OSMU)’가 콘텐츠 IP 비즈니스를 하기 위한 필수 방법론이 된 것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독점 콘텐츠를 소유하기 위한 OTT 사업자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흥행성이 있는’ IP를 찾는 것이다.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까지 투자 대비 효율(ROI)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콘텐츠 사업의 특성상, 오리지널 콘텐츠의 제작은 사업자들에게 ‘모’ 아니면 ‘도’가 될 수 있는 위험부담이 높은 영역이다. 따라서 OTT 시장이 커지고 있는 작금의 미디어 환경에서, OTT 사업자들과 출판 사업자들 간의 협업은 갈수록 활발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OTT 사업자들에게는 검증된 IP를 발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출판 사업자들에게는 IP 판매를 통한 새로운 수익모델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양 측의 협업은 더없이 중요하다.
특히 갈수록 침체기를 겪고 있던 출판계로서는 OTT와의 협업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첨단 IT 기술의 도입이 미디어 시장을 영상 위주로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지만, ‘글자’ 기반의 ‘책’이 이러한 흐름에 부합하기는 쉽지 않은 탓이다. 사실 출판계는 전자책 사업을 통해 멀티미디어의 적극 도입을 일찍부터 시도했었다. 그러나 ‘글자 기반 콘텐츠’라는 책의 본질적 특성 때문인지 좀처럼 국내외 출판시장은 그 자체로는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머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유 IP를 ‘영상화’하는 작업은 책을 읽지 않은 이들(non-reader)을 잠재적 독자(potential reader)로 바꿀 뿐 아니라, 그 중 일부를 원작을 읽는 ‘실 독자(actual reader)’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출판사업자들 입장에서 OTT 사업자들과의 협업은 B2B 수익모델 발굴 및 신규 독자를 확보할 수 있는, 성장 또는 생존을 위한 사업 전략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B2B와 B2C의 수익모델 구조는 근본적으로 결을 달리 하기 때문에, 두 비즈니스를 동시에 안정적으로 수행하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그러나 OTT 전성시대가 되면서 출판계는 ‘도서’라는 기존의 수익모델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영상’이라는 새로운 사업으로의 안정적인 진출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OTT 사업자와의 협업은 신작뿐만 아니라 구작 또는 고전 작품들의 부흥을 이끄는 데도 효과적이다. 유튜브나 네이버 등에서는 책을 읽어주는 ‘오디오북’ 채널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이들 채널들은 주로 예전의 유명한 작품들을 읽어주는 사례가 많다. 고전은 독자들이 친숙함을 느낄 수 있는 소재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지 않는 현대인들의 특성상 정확한 내용을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과 내용을 제공하는 채널 수요도 빠르게 늘고 있다.
웹툰과 웹소설이 오디오북으로 재탄생하는 경우도 많다. 양대 포털이자 국내 웹콘텐츠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네이버와 카카오는 자사의 인기 웹툰⋅웹소설 IP를 영상화하는 것 외에도, 종이책 출간과 오디오북으로 제작하는데 매우 적극적이다. 이럴 경우 종이책은 소위 ‘덕후 팬’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기 때문에 ‘프리미엄’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플랫폼 사업자들과의 협업은 단순히 개별 IP의 <책-영상-오디오-웹콘텐츠-게임 등>으로 확장만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독자를 발굴하고, 책의 가치를 높이는데도 효과적이다.
인재풀도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국내 기준으로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신춘문예’는 작가로 등단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코스였다. 90년대 중반 이후 PC통신이 활발해짐에 따라 ‘웹소설’의 전신인 ‘사이버 문학’(또는 ‘디지털 문학’)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작가군이 등장하긴 했지만, 출판계의 오랜 관행과 편견으로 인해 이들 작가군은 출간 이후에도 ‘비주류’ 또는 ‘아마추어’라는 인식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디지털 중심의 미디어 환경 개편, 양대 포털의 본격적인 웹콘텐츠 사업 시작,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부상 등 외부적인 요인들이 더해지면서, ‘정식 작가’가 될 수 있는 다양하고도 새로운 길이 열렸다. 자유롭게 콘텐츠를 올리고 대중의 직접 평가를 받는 시스템이 확립되면서 대중성을 확보한 인기 IP들의 숫자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인기 IP들이 소수의 일부 스타작가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실험정신을 가진 새로운 작가들이 꾸준히 등장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출판계는 물론, 국내 콘텐츠 시장 전망을 매우 밝게 한다. 더구나 이들 중에는 영상과 작화, 텍스트에 모두 능한 작가들도 많아서 IP의 OSMU 추진은 더욱 수월해질 수 있다.
활발한 IP 사업의 전개는 콘텐츠 시장을 넘어 사회 전반적으로도 ‘일자리 창출을 통한 경제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일차적으로는 작가는 물론이고, 오디오북 활성화에 따른 성우 수요 및 웹콘텐츠에 대한 일러스트 수요 증가, 유튜브 북채널 확대 등 크리에이터 경제가 그것이다. 여기에 OTT 플랫폼의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경쟁은 영상 제작, 유통, 기획 등 관련 인재들의 수요를 대거 창출하는 중이다. 이런 점에서 출판과 영상의 결합은 시대적 당위성을 띤다. 출판계가 OTT 사업자들과의 협업을 필수 전략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밖에도 다양하다.
OTT와의 협업이 필연적이라면, 이제는 출판 시장의 장기적 부흥을 이끌 수 있도록 좀 더 다양한 전략적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3가지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먼저, 뉴미디어 환경에 맞는 ‘작가 역량 강화 시스템 도입’이 중요하다. 특히 앞으로의 작가들은 필력 외에도,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플랫폼과 IT 기술을 자신의 창작물에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다. 가령 OTT 플랫폼 뿐 아니라, 최근 부상하고 있는 메타버스, NFT 등 첨단 IT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장르와 소재를 개척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또한 기성 작가들에게도 뉴미디어 환경에 맞는 작법을 교육시킴으로써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역량 개발을 위한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좋은 아이디어와 필력을 가졌음에도 뉴미디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작가들을 방치하는 것은 강력한 IP를 놓치는 잠재적 손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인문⋅사회⋅과학 등 교양 관련 출판물의 활용방안에 개발에 힘써야 한다. 원천 IP로서 출판 콘텐츠 수요가 높아지는 것은 소설, 만화 등 ‘스토리’ 장르에 한해서일 뿐, 지식정보 서적들의 활용방안은 아직 미진한 상황이다. 유튜브 중심으로 북리뷰 또는 전문 채널들의 증가는 지식정보 콘텐츠의 활용을 높이는 기회가 되고 있지만, 관련 콘텐츠의 확산과 판매량 증가로 이어지는 것은 소수다. 출판물의 장르 다양화를 위해서라도 이러한 지식정보 서적들의 IP 활용은 더욱 활발해져야 하며, 이에 대해 유튜브 크리에이터 또는 OTT 사업자들과의 새로운 협업 방안 또한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OTT 사업자들 입장에서도 다큐, 교양, 지식 등 인문콘텐츠는 상대적으로 드라마보다 제작비도 저렴하고 부담도 덜하기 때문에, 실험적인 포맷이나 영상 문법을 고려하는 것이 좀 더 수월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의 취향을 고려한 ‘개인화’ 서비스를 확대할 수 있도록 ‘고객의 행동 데이터 확보’에 주력해야 한다. ‘개인화’ 서비스는 출판계에서도 ‘전자책’ 서비스를 통해 시도한 바 있지만, 구매 또는 읽은 책 위주의 통계형 기반의 추천 서비스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산업 분야를 막론하고 타겟을 ‘1명의 개인이 될 때까지’ 최대한 세분화하여 맞춤형 마케팅을 하는 것에서 비즈니스의 승패가 결정될 것이다. 더욱이 AI 기술 발전에 따른 빅데이터의 효율적 활용이 중요해지고 있는 만큼, 이제는 검색어, 페이지 이동, 스크롤 이동, 완독률, 독서 시간대(시간, 요일), 방문 횟수 등 독자 개개인들의 다양한 ‘행동데이터’ 기반의 ‘보다 고도화된 개인화 서비스’가 필요하다. 그에 따라 앞으로는 출판계와 OTT 사업자들의 제휴가 IP 활용을 넘어, 공동 플랫폼 구축 또는 ‘데이터 제휴’ 등을 논의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출판계와 OTT 사업자들 모두에게 시너지를 제공할 수 있으며, 다양한 산업군으로도 확장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용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플랫폼을 출현시키며 미디어 시장을 단번에 바꾸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기는 ‘콘텐츠’의 가치는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굳건하다. 전통적인 출판시장이 줄어들고 있다고 해서 ‘책’이 갖는 힘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책에 담겼던 ‘콘텐츠’가 이제는 책과 분리되어, 콘텐츠 IP 그 자체로 힘을 갖는 시대가 되었다. OTT 시장의 발전은 책에 담겼던 콘텐츠가 뉴미디어 환경에 맞게 변화하면서도 여전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텍스트 기반의 콘텐츠와 영상 콘텐츠는 쌍방향적으로 유기적인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렇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출판계는 OTT 사업자들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한 보다 다양한 전략을 시도해야 한다. 본고에서는 뉴미디어 환경에 맞는 작법과 새로운 소재 개발을 위한 작가 역량 강화 시스템의 도입과, 지식정보 서적들의 IP 활용 방안, 그리고 데이터 제휴를 통한 ‘개인화 서비스’의 강화의 3가지 방안을 제안하였다. 아무쪼록 출판계와 OTT 사업자들 간의 협업이 원천 IP로서 ‘책’이 지니는 가치를 잘 보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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