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낚싯대 하나 메고 달밤에 찾고 싶은
여자도(汝自島)를 알기 전에 ‘여자만(汝自灣)’을 먼저 알았다. 장인 어르신은 고향에서 조카가 계절별로 보내온 서대니 양태니 방사륵이 굵고 깊은 참꼬막을 드실 때면 “역시 여자만이여” 하시곤 했다. 여자만이라는 고유명사는 서울의 종로나 충무로의 음식점에서도 종종 마주할 수 있었다. 여자만의 상차림은 목포나 광주 등 남도 음식과는 또 다른 풍미가 있었다.
전국 새꼬막 생산량의 70% 이상, 여자만을 아시나요
지도를 펼쳐보면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의 해역을 순천만으로만 표기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순천만 아래에 여자만으로 별도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여수관광공사는 '순천 해룡을 기점으로 위쪽 해역은 순천만, 아래 해역은 여자만으로 구분하면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을 밝힌다.
여자만 바다의 수심은 평균 3~5m 정도로 비교적 낮다. 순천과 벌교 지역에서 수많은 세월에 걸쳐 흘러내린 미세한 흙 알갱이는 이곳에 일급수 갯벌을 만들었다. 어패류들이 서식하기에 최적의 조건인 것이다.
여자도는 이러한 여자만의 한가운데 떠 있다.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자만을 ‘텃밭’처럼 여기며 연중 새꼬막을 양식하고, 5~7월에는 낙지잡이, 8~10월이면 전어잡이로 분주하다. 그 외에 피조개, 문어, 새우도 많이 난다. 일제 강점기엔 중간크기의 새우와 대하가 많이 잡혀 '여자도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여자도 섬들의 배열이 공중에서 보면 ‘너 여(汝)’ 자형이고, 육지와 거리가 멀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한다는 뜻에서 ‘스스로 자(自’)를 써서 여자도(汝自島)라 했다 한다. 여자도는 2개의 유인도와 5개의 무인도가 있는데 유인도 중 큰 섬은 대여자도, 작은 섬은 송여자도라 부른다.
여수시 화양면 섬달천에서 출발하는 '차 없는 섬'
여자도에 가려면 여수시 화양면 섬달천 선착장으로 가야 한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수항을 출발한 여객선이 여수시 서남쪽 가막만을 거쳐 화정면 둔병도, 조발도 등의 섬들을 돌고 돌아 다섯 시간 정도 걸려 도착하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러나 1981년 섬달천(달천도)과 육지를 연결하는 연륙교가 놓이고, 인근 도로 사정이 좋아지면서 지금은 섬달천에서 도선으로 20분이면 갈 수 있다.
봄을 맞은 여수의 산들은 짙푸른 물감을 흩뿌려 놓은 한 폭의 수채화다. 사방 그 어디를 둘러봐도 소외받은 생령은 없다. 섬달천으로 들어가는 연육교는 현대적 디자인 감각을 감안하지 않고, 다리 군데군데 바닷물이 흐를 수 있도록 만든 시멘트 다리여서 투박하기 그지없다.
정원 45명의 여자호는 오전 8시 40분, 승객 30여 명을 싣고 섬달천 선착장을 떠나 여자도로 향한다. 배 삵은 왕복 1만 원인데 배가 출발한 후 선장이 선실을 돌며 받는 아날로그 방식이다. 선창 좌측으로는 고흥의 명산 팔영산의 산그리메가 선명히 드러나 있고 우측으로는 여수반도의 크고 작은 산들이 병풍을 이루고 있다. 북동쪽 끝에 국가정원과 순천만 습지로 유명한 순천만이 아스라이 조망된다.
배는 송여자도를 경유하여 대여자도 마파지마을과 대동마을 선착장 순으로 운항한다. 섬달천으로 나올 때는 그 반대 방향이다, 통상 트레킹은 송여자도에 내려 시작한다. 선착장 우측으로 해안가를 끼고도는데 산악회의 이런저런 리본들이 달려있다.
길은 어린아이라도 아장아장 걸을 수 있을 만큼 편안하다. 하긴 이곳에서 가장 높은 지대의 해발이 46m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바람 탓인지 진달래들은 아주 키 작은 모습이다. 정자를 지나니 평탄한 소나무 숲길이다. 소나무들이 많아 이곳을 송여자도라 했다는데 그 이유를 알만하다.
이색적인 비파나무, 철썩이는 파도 너머 여수반도
소나무 숲길 지나 나무계단을 내려서니 좌측 비탈에 처음 보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마침 지나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있어 물어보니 비파나무라고 한다. 원래 중국 서남부가 원산지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남해안에서 자란다는데 행운이다. 잎이 악기인 비파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겨울에 꽃이 피고 여름에 살구보다 약간 작은 열매가 하늘을 향해 열리는데 맛이 달고 향기가 좋다고 한다.
우측 해안가를 따라 걷는 풍광은 문자 그대로 봄날의 왈츠다. 여기저기 막 피어오르는 나뭇가지 싱그런 애채들 사이사이로 무인도 납계도가 보인다. 옥빛 바다 위에 고즈넉이 떠 있는 납계도를 바라보노라니 마음은 평온의 바다로 흘러간다.
바닷가 해안 길을 따라 내려서면 민박집이다. 이곳은 예전 소라초등학교 송여자분교다. 1968년 개교하여 40여 년간 섬마을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2007년 간판을 내렸는데 그 건물을 개조하여 민박집을 하고 있다. 갯바람 벗 삼아 하루 쉬어가기에 좋을 것 같다.
이윽고 송여자도와 대여자도를 연결하는 붕장어다리(560m)다. 다리의 모습이 마치 붕장어가 꿈틀대는 모습처럼 역동적이다. 일렁이는 파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2011년 전라남도와 여수시가 국가의 지원을 받아 ‘가슴 설레는 생태예술의 섬’으로 만들기 위해 조성한 인도교다. 교량 위에서 곧바로 낚시를 할 수 있는 낚시터가 여러 군데 설치돼 있어 낚시꾼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붕장어 다리’에서 꿈꾸는 '봄밤 달빛 아래 낚시'
낚시꾼 부부가 눈앞에서 손바닥보다 더 큰 물고기를 낚아 올린다. 물어보니 노래미라고 한다. 이 지역이 어족이 풍부해서인지 몰라도 여기저기에서 물고기가 은빛으로 뛰어오른다. 달빛 교교한 밤 이곳에서 낚시를 하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환한 달밤 바다 한가운데 작은 통통배 위에서 낚싯줄을 드리우고 갯장어를 잡던 어릴 적 고향의 추억이 떠오른다.
좌우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과 섬들을 바라보며 붕장어다리를 건넌 후 우측 해안으로 연결된 데크로드를 따라간다. 육지에서는 보지 못한 이색적인 암벽지대를 지나고 나니 검은모래 해변이다. 대여자도엔 초승달 모양의 검은모래 해변이 서너 군데가 넘는다.
그런데 두 번째 검은모래 해변을 지나 연결된 데크로드를 조금 지나니 길이 없다. 아마 썰물 때는 이곳을 가로질러 세 번째 검은모래 해변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할 수 없이 후진하여 좌측 임야를 가로질러 여자도 동남쪽으로 길게 뻗은 시멘트 도로에 도착한다. 대동 마을로 가는 지점인데 지형이 잘록하여 개미허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남쪽으로 길게 뻗어 '검은모래 해변' 일품인 대여자도
도로 좌측 적갈색 밭두렁이, 그리고 그 건너편으로 고흥반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개미허리를 지나 여자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대동마을로 내려선다. 마을 담벼락엔 오래전 그려진 벽화들이 눈에 띈다.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이 없다’는 글귀가 가슴에 박힌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노래한 정호승의 시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을 적 없다’는 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세월호 아픔의 계절이다.
대동마을 여자선착장은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마음 같아서는 갓 잡아 온 싱싱한 갯것에 막걸리 한잔하며 오늘 하루 마음껏 게을러지고 싶은데 코로나로 식당의 문은 닫혀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좋은 호시절에 사람의 마음만 꽁꽁 얼어 있다.
다시 길을 되짚어 대여자도 남쪽 마을인 마파지마을에 도착한다. 남풍 즉 마파람이 부는 마을이어서 마파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골목길은 외길이나 사이사이에 샛길이 있다. 빈집이 더러 보인다. 이곳에는 1979년에 개청한 화정면 여자출장소가 있고 보건 진료소도 있다.
마파지 포구에서 꼬막을 양식하는데 쓰이는 그물을 만들고 있는 70대 초반의 주민을 만났다. 그는 “여자도 꼬막이 요즘 강원도에서도 소비될 만큼 전국적으로 인기를 끈다”며 싱글벙글이다. 전국 새꼬막 생산량의 70% 이상이 여자도일 것이라며 손짓으로 바다 이곳저곳을 가리킨다. 7월이면 꼬막의 씨앗인 종패를 그물을 매개로 해 채묘(바다 밑바닥에 이식)하는데 요즘은 그 준비로 바쁘다고 한다.
여자도 트레킹 후 인근 장척마을에서 보는 낙조 일품
여자도를 빠져나오는데 이곳이 자꾸 남해 바다가 아닌 서해 바다라는 느낌이 든다. 수심이 낮아 남해안에서 보기 드문 갯벌과 석양을 볼 수 있어서 일 것이다.
실제로 여자만 장척마을에서 궁항마을에 이르는 4km의 해변과 순천만 와온해변의 낙조는 일품이다. 와온해변이 전국적으로 더 알려져 있지만 호암산 아래 장척마을의 낙조도 좋다. 질펀한 갯벌과 복개도, 모개도, 장구도 등 세 개의 섬이 만들어낸 조화는 또 다른 장관이다. 이중 모개도는 하늘에서 보면 하트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섬이다.
여자도 트레킹 후 장척마을에서 궁항마을에 이르는 해변에서 일몰을 감상한다면, 비로소 여자도와 여자만의 속살을 맛본 것이다. (한국섬뉴스 바로가기)
1. 위 치
o 전남 여수시 화정면 여자리
2. 가는 방법
o 섬달천 출발 (1일 4회)
- 08:40, 11:40, 14:30, 17:30
o 여자 출발 (1일 4회)
- 08:00, 11:00, 14:00, 17:00
☎(문의) 선장 : 010-2652-5372, 사무장 : 010-4560-6233
3. 섬에서 즐기기 : 트레킹
o 송여자도+대여자도 해안길 (약 7km, 3시간 30분)
- 송여자도선착장 → 정자쉼터 → 송여자분교(터) → 붕장어다리 → 제1 검은모래해변
제2 검은모래해변 →대동마을(여자분교) → 마파지마을 →붕장어다리 →송여자도선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