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멀리 보기 위해 더 높이 오른다
2012년 초로 기억된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주 무대인 소록도를 방문하면서 내친김에 거금도까지 가게 됐다. 거금도는 박치기왕으로 어릴 적 우상이었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의 고향이다. 마침 2011년 말 소록도와 거금도를 잇는 거금대교가 완공되어 거금도까지 드라이브한 것이다.
노란색 산악회 리본 휘날리던 적대봉 초입의 추억
그 이후 거금도 하면 김일 선수 외에 떠오르는 이미지 하나가 추가됐다. 적대봉이다. 당시 파성재에서 적대봉 오르는 등산로 초입에 펄럭이던 노란색 산악회 리본이 기억 깊숙이 박혀 여전히 펄럭이고 있었다.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이름난 고흥 연홍도 탐방이 2시간이면 충분하여 인근 적대봉 등산부터 하기로 마음먹고 아침 7시 여수를 출발한다. 옥색의 바다 위로 여수에서 고흥까지 섬섬백리길을 잇는 조화대교~둔병대교~낭도대교~적금대교~팔영대교는 시간과 공간이 빗어낸 예술품이다. 화창한 날씨를 즐기려는 라이더들의 모습이 차창 밖으로 사라진다.
여수에서 거금도 파성재 주차장까지는 92km이나 구불구불한 국도를 지나는 구간이 있어 약 1시간 40분이 소요된다. 등산코스는 파성재-마당목재-적대봉-거금생태숲-청석마을(7.3km)이다.
적대봉(592m)은 거금도에 솟아 있는 산이면서도 고흥군에서는 팔영산(608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바다에 떠 있는 고래 등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를수록 사방의 바다와 섬들을 훤히 볼 수 있는 전망이 매우 뛰어난 산이다.
편안한 마실길 같은, 파성재에서 적대봉 오르는 길
파성재 초입은 편안한 마실길 같다. 그러면서도 숲은 초록 향연의 바다다. 바람에 일렁이는 푸른 나뭇잎의 파도는 햇볕에 부딪친 윤슬처럼 반짝거린다. 숲길에서는 응당 향내가 난다. 점차 고도를 높여나가지만 그렇다고 그리 가파르지도 않다.
길섶에는 노란 세잎양지꽃이 환하게 웃으며 아침 인사를 한다. 등나무꽃 향기가 그윽한 정자에 잠시 머물며 목을 축인 후 다시 발을 떼자 가지런히 잘 쌓아 올린 돌탑이 나온다. 돌탑 옆 안내판 글귀가 재밌다.
“등산으로 흘린 땀 건강으로 보답한다” (고흥군 보건소)
아침 일찍부터 적대봉을 찾는 등산객들이 많은지 드문드문 벌써 하산하는 사람들이 있다. 파성재에서 1.6km 거리인 마당목재까지 오르니 이정표 푯말 옆에 ‘거금도 적대봉 생태·경관보존지역’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알고 보니 적대봉 지역은 멸종위기 1급 흰꼬리수리, 검독수리, 참수리, 구렁이와 멸종위기 2급 말똥가리, 팔색조, 삼광조 등의 서식처다. 특히 팔색조와 삼광조는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의 보전상태가 양호한 숲에서만 번식한다고 한다.
게다가 상록활엽수림과 비자나무 등이 자생하여 학술적 가치가 높고, 적대봉 능선을 따라 형성된 소사나무 군락지는 경관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이유로 2011년 1월 환경부와 고흥군은 적대봉에서 오천저수지 일대 8365㎢를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정상에서 사방으로 조망되는 고흥 바다와 섬들
마당목재에서 적대봉 정상까지는 1km로 고도는 높아지지만 순한 소의 등을 타고 가는 듯 편안하다. 오를수록 거금도 주변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조망되어, ‘멀리 보려면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는 중국 당대(唐代) 시인 왕지환의 ‘등관작루’ 한 구절이 떠오른다.
등산로 양옆으로는 덜꿩나무니 병꽃나무, 청미래덩굴, 큰꽃으아리 등이 다투어 피어 있어 눈은 마음껏 호사를 누린다.
적대봉 정상에 서니 서쪽으로 완도, 남쪽으로 거문도, 동쪽으로 여수 일원의 바다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제주도가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적대봉 정상에는 왜적의 침입 등 비상사태를 전달해주던 둘레 34m, 지름 7m의 큰 봉수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봉수대다.
이곳에서 동정마을 코스로 하산하려면 직진을 해야 하지만 거금생태숲 가려면 왔던 길로 200여 m 되돌아가야 한다. 하산길은 온통 활엽수림이다.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림을 찾을 수 없다. 등산로는 완만하여 곰배령에서 능선으로 우회하여 탐방로 입구로 하산하는 느낌이다.
아름다운 숲 속 군데군데 철쭉과 병꽃나무, 덜꿩나무들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호젓한 등산로에 사람마저 없어 적적함을 느낄 무렵 오천마을에서 올라온다는 등산객 2명과 만난다. 이분들은 정상을 찍고 다시 원점회귀할 예정이라 한다.
하산 지점 약 1km를 남겨놓고부터 거금생태숲이 시작된다. 구름다리와 잘 조성된 테크 길을 따라 내려오니 ‘숲사랑 홍보관’에 도착한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휴일을 맞아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구름다리까지 오르는 탐방객들이 많다.
거금도 동쪽 해안 청석마을~오천리 둘레길 풍광도 뛰어나
거금생태숲 입구에서 파성재를 가기 위해 금산면 택시를 부르니 요금이 2만 원이다. 기사님이 친절을 베풀어주어 청석마을 소원동산 정자에 올라 고흥 앞바다의 크고 작은 섬들과 옥빛 바다를 마음껏 즐긴다.
이어 오천리에서 금의시비공원 앞까지 바다를 끼고도는 해안도로의 경관도 일품이다. 금의시비공원 앞에는 어른 머리통보다 더 큰 몽돌로 이뤄진 이색적인 풍광도 있다.
이곳에서 옛 목장성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관통하여 파성재를 향한다. 조선 시대 거금도에는 소록도, 시산도, 나로도 등과 함께 국가 소유의 목장이 있었다. 거금도 목장은 적대봉을 중심으로 30리 길이의 성을 쌓아 말을 키웠는데 그 흔적들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파성재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감하니 오후 2시다.
◇적대봉 등산로◇
o 1코스(7.3km) : 청석마을-적대봉(5.3km)-동정마을(7.3km)
o 2코스(10.1km) : 청석마을-마당목재(5.7km)-서촌마을(10.1km)
o 3코스(7.3km) : 청석마을-마당목재(5.7km)-파성재(7.3km)
o 4코스(5.2km) : 파성재-적대봉-파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