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맺힌 저 구름’, 5월의 흰 찔레꽃으로 피어 난
5월 중순이 시작되는 손죽도는 온통 하얀 찔레꽃의 나라다. 언덕배기와 산비탈 여기저기 뿜어대는 그윽한 향기로 외려 슬픔이 일 정도다. 찬란한 봄 어느 기슭엔들 찔레꽃이 없으랴마는 손죽도 찔레의 향기가 더욱 진하게 다가오는 것은 430여 년 전 이곳에서 왜적과 싸우다 산화한 한 젊은 장군의 넋 때문일 듯하다.
아픈 역사 속에 ‘천혜의 해안 경관’ 품은 손죽도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아침 7시 40분 ‘여수-거문도’를 오가는 쾌속선 니나호를 타고 손죽도 선착장에 내리니 9시 10분이다.
손죽도는 면적 2.92㎢, 해안선 길이 11.6㎞로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58㎞ 해상에 위치해 있다. 소거문도·광도·평도 등의 유인도와 반초섬·나무여·갈키섬·검둥여 등의 무인도를 아우르는 손죽열도의 중심지다. 임진왜란 초기 이대원(李大源) 장군이 이곳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여 ‘큰 인물을 잃어 크게 손해를 보았다’는 의미로 손대도(損大島)로 불리다가 1914년 현재의 손죽도(巽竹島)로 개칭됐다고 한다.
손죽도는 섬 자체로도 천혜의 해안 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섬 중앙에 있는 최고봉 깃대봉(237m)과 마제봉(173m), 봉화산(140m), 삼각산(120m)에서 바다로 자맥질한 해안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북쪽 사면으로는 사질 해안이 발달되어 1km에 이르는 고은 모래 해수욕장과 500m에 이르는 몽돌해변을 빚어놓았다.
이러한 역사적 자연적 배경으로 인해 손죽도는 2017년 전라남도 ‘가고 싶은 섬’ 사업에 선정되어 5년 동안 외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산과 해안에 단계적으로 등산로를 내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깃대봉에서 삼각산을 바로 가는 구간이 없었으나 지난해 이 등산로가 완성되어 이제는 손죽도를 일주할 수 있는 둘레길이 완성됐다.
손죽도 등산로는 선착장 부두민박집 옆으로 난 데크 계단을 따라 이어진다. 이곳에서 시누대 숲과 예전 염소를 키웠다는 초지 사이로 조성된 등산로를 따라 지긋이 오르면 마제봉 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날까지 수도권을 뒤덮은 13년 만의 황사의 잔해가 남쪽으로 밀려왔는지 바다 저편으론 희미한 이내가 깔린듯하다. 그러나 오르는 산길 여기저기에 핀 하얀 찔레꽃의 그윽한 향기는 마음에 낀 이내를 금방 씻어내어 버린다. 게다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노란 꽃이 군락을 지어 화려하다. 알고 보니 실거리나무꽃이다.
어청도와 외연도 이남의 섬과 해안에서 자생하는 실거리나무는 줄기에 얼기설기 돌출한 가시 때문에 ‘실이 걸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잘 걸려서 보길도에서는 총각이 이 나무 사이로 들어가면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다 하여 총각귀신나무로도 불린다 한다.
섬 일주 ‘명품 둘레길’ 최근 완비, 이정표와 등산안내도 미비 아쉬움
마제봉 팔각정자에 오르니 건너편에 반초섬과 소거문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특히 소거문도 상산(328m)의 위세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산행 후 선착장에서 만난 소문도 출신의 한 여행객은 자신이 어릴 적인 1970년대만 해도 60여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10여 가구만 남아있다고 한다. 두 섬의 조간대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푸른 난대림 사이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새소리, 찔레꽃과 실거리나무꽃이 발산하는 야릇한 향기-. 5월의 봄날 손죽도 트레킹에서만 맛볼 수 있는 호사의 극치다.
널찍하게 잘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니 손죽마을전망대다. 손죽도 등산로에는 조망 처마다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손죽도 산행은 그야말로 전망대 산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저마다 아름다워 전체적으로 보면 금오도 비렁길 전체를 압축해 놓은 느낌이다.
북쪽으로 나지막이 엎드려 있는 손죽마을과 그 너머 삼각산의 두 봉오리가 한 폭의 그림이다. 이곳에서 목넘이전망대를 오르다 좌측으로 보면 남쪽 멀리 문도와 백도가 보인다는데 오늘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목넘이전망대 조금 지나면 팔각정이 있는 안부사거리다. 옛날 손죽도 사람들이 봄이면 올라와 화전(花煎)놀이를 했다는 지짐이재다. 마을에서 일부러 심었는지 흰색 데이지가 한창이다.
이곳에서 깃대봉 오르는 임도는 조금 가파른 듯하다. 깃대봉 철탑은 아래와 위에 2개가 있지만 경관은 별로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지짐이재로 컴백한 후 손죽마을을 거쳐 삼각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지금은 삼각산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완비되어 기쁜 마음으로 새로 깔린 코코넛 매트를 밟는다. 이 구간부터는 방목하는 흑염소들이 자주 눈에 띈다. 흑염소들은 적게는 2~3마리 많게는 10여 마리씩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한 가족들 같다.
깃대봉에서 내리막길을 지그재그로 내려오니 삼각산 가는 삼거리다. 건너편에 삼각산 정상의 두 봉우리가 우애 좋은 형제처럼 오뚝 서 있다. 두 봉우리의 모습이 비슷하여 예전 상각산(相角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삼각산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하얀색 민가 옆으로 200여m 오르니 전망대가 나타나고 막혔던 좌측 시야가 확 트인다. 멀리 고흥 거금도와 완도 금당도, 평일도, 그리고 바로 앞 초도와 그 부속 무인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좀 더 오르면 손죽도에서도 전망 좋기로 소문난 삼각산 정상이다. 이곳에 서니, 1587년 왜적들이 왜 손죽도에 진을 쳤는지 역사의 문외한도 알 수 있을 듯하다. 손죽도 항구는 깃대봉 능선을 배경 삼아 북쪽을 향해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다. 남쪽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자신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요새다.
게다가 남동쪽으로 펼쳐진 바다 위로는 외나로도와 그 너머 여수 금오도와 연도 일대가, 동쪽으로는 소거문도 일대, 남서쪽으로는 거문도와 초도, 그리고 서북쪽으로는 고흥의 거금도와 완도의 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이 해역 일대에서 조선 해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조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손죽도 삼각산은 백패커들의 천국, 다시 새겨보는 이대원 장군의 그 날
오전 손죽도 선착장에서 보았던 이대원 장군의 석조 동상이 떠오른다. 평택 포승읍에서 태어난 장군은 1583년 18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587년 녹도만호에 부임했다. 이 장군은 왜구가 남해안에 출몰하자 즉시 출동하여 왜구의 우두머리를 포로로 잡아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심암(沈岩)에게 전투 경과를 보고했다(제1차 손죽도해전, 1587. 02. 10.).
심암은 그를 불러 공을 자신에게 돌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대원은 이를 거절했고 심암은 며칠 후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해 온 수많은 왜구를 격퇴하라고 이대원에게 명을 내린다. 이대원은 출정하기 전에 지원군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나 전투가 시작되어도 지원병은 오지 않았다. 수많은 왜구 선박에 둘러싸여 싸우던 그는 부하들과 포로가 되고 말았다. 왜구는 그에게 항복을 종용했으나 끝내 거부한 그는 왜구 선박의 돛대에 묶인 채로 살해당했다(제2차 손죽도해전, 1587. 02. 17.).
이대원 장군이 2차 해전 죽음을 앞두고 3일 전 지은 절명시(絶命詩)가 폐부를 깊숙이 찌른다.
“진중에 해 저무는데 바다 건너와
병사는 외롭고 힘은 다하여 이 내 삶이 서글프다.
임금과 어버이 은혜 모두 갚지 못하니
한 맺힌 저 구름도 흩어질 줄 모르네”
후에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선조는 분노했다. 전라좌수사였던 심암은 참수됐고, 이대원에게 병조참판의 벼슬과 ‘충열’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선조는 손죽도에 사당을 지어 순절한 이대원 장군의 위패를 모시게 했는데 이것이 현재 손죽마을 한가운데 있는 이대원 사당 충렬사다. 제사는 매년 음력 3월 3일에 모시고 있다. 또한 이대원 장군과 더불어 이순신을 보필해 싸우다 부산 몰운대에서 전사한 정운 장군을 모신 쌍충사는 녹도만호진이 있던 고흥 녹동항 우측에 있다.
삼각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테크 끝에서 직진하는 길이 희미하게 나 있다. 이정표가 없어 긴가민가하면서 우측 암봉 기슭으로 조심스레 가보니 내려가는 급경사 테크가 나온다. 역시 작년에 신설된 삼각산에서 북쪽 해안 끝으로 가는 등산로인 것 같다. 등산로를 잘 정비해 놓았으면서도 이에 상응하는 이정표와 안내도가 없어 아쉬움이 든다.
코코넛 매트가 깔린 길을 새소리와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벗 삼아 걷다 보니 북쪽끝전망대다. 간간이 수면을 가르고 지나는 낚싯배의 적막 너머로 고흥반도를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전망대에서 길을 되짚어 임도를 따라 내려오니 몽돌 해변 위 해안 쓰레기 보관장에 이어 삼거리가 나온다.
여느 섬 같지 않게 빈집 거의 없고, 활력 넘치는 손죽마을
삼거리 위로 이대원 장군의 청동 동상이 서 있다. 이른바 무구장터다. 장군의 목 없는 시신과 부하들의 시신이 널려 있던 것을 주민들이 수습하고 무구장터라 불렀다 한다. 평택 고향에도 이 장군의 가족묘가 있는데 시신 대신 옷을 넣고 봉분을 했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잠시 명복을 빌고, 손죽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손죽마을로 이어지는 시멘트 길 좌우로는 다시 하얀 찔레꽃이다. 100여 가구로 형성된 손죽마을은 빈집이 많지 않은 데다 집마다 화초를 키우고, 옛 돌담이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어 쇠락해가는 여느 섬과는 다른 느낌이다. 담쟁이 넝쿨이 있는 담장 너머로 조만간 능소화가 고개를 내밀 것 같다.
동네 어르신 말로는 집이나 땅이 나오면 금세 팔려버려 매매 물량이 없다고 한다. 주민의 50%가량은 여수 등지에 거주하면서 수시로 오가는 사람들이라 한다. 일테면 세컨하우스(주말주택) 개념이다. 고령화로 섬에 빈집들이 많이 생길 터인데 농어촌공사 같은 곳이 빈집을 매수하여 도시민들에게 세컨하우스로 분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을에 있는 이대원 장군의 사당과 내년이면 폐교된다는 100년 역사의 거문초등학교 손죽 분교를 둘러본 후 손죽도 주제 막걸리 한잔이 생각나 손대점빵을 찾았다. 그러나 문은 닫혀있고 지나는 마을 주민에 의하면 주인은 여수 출타 중이란다.
종일 취한 찔레꽃 향기에, 덤으로 손죽도 수제 막걸리까지
실망스러운 안색으로 점방을 나서 선착장으로 향하려는데 마을 정자에 앉아있던 등산객 한 분이 막걸리 한잔하고 가라며 걸음을 멈춰 세운다. 2리터짜리 페트병에서 4분의 1 가량을 따라 건네준다. 매주 전국의 섬 투어를 하고 있는 부부인데 어제 나로도항에서 자고 오늘 아침 배로 손죽도에 들어왔다는 분들이다. 이분들 덕에 손죽도의 귀한 수제 막걸리까지 맛보고, 오후 4시 40분 여수를 향해 출발한다.
1) 위 치
o 전남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2) 가는 방법 : 여수와 고흥 외나로도에서 가는 방법이 있음
o 여수↔손죽도 항로는 여수↔거문도 항로에 포함되어 선박 상태, 시즌, 기상 등에 변화가
심함으로 반드시 여객터미널이나 선사에 전화를 먼저 해보고 가야 함.
- 니나호(글로벌베스트코리아에스앤씨) ☎061)666-8055
- 파라다이스호(엘에스쉽핑) ☎061)662-1144
o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 : 여수시 여객선터미널길 17(주차 1일 5000원), 1시간 20분 (편도 2만6600원)
☎061)810-0120~4
- 여수 출발 → 손죽도 도착(5월 기준)
평일·주말 07:40 16:00 (2회)
- 손죽도 출발 → 여수 도착
평일·주말 09:00 16:40 (2회)
o 나로도연안여객선터너널 : 고흥군 봉래면 나로도항길 120-7(주차 무료), 30분(편도 1만6400원)
☎061)640-4090
- 나로도 출발 → 손죽도 도착 (5월 기준)
평일·주말 08:40 16:45 (2회)
- 손죽도 출발 → 나로도 도착
평일·주말 09:00 17:00 (2회)
3) 섬에서 즐기기
o 트레킹 : 9km (4~5시간)
- 손죽선착장-우측 진입로 테크-마제봉정자-손죽마을전망대-지짐이재-깃대봉-삼각산삼거리-삼각산
-북쪽끝전망대-이대원장군묘-손죽마을-손죽선착장
o 백패킹 : 문의 – 손죽마을발전위원회 박기홍 사무장(010-5797-1239)
- 2인 텐트 기준 한 동 야영료 하룻밤 1만원
4) 편의 시설
o 빨간집민박(010-3194-6389), 부두민박(061-665-2222), 손죽민박(010-9875-3626)
- 빨간집민박 : 2인1실 5만원, 식사 각자 1만원 (청년회장 부부가 운영)
o 손대점빵(010-9747-8845), 수제 막걸리 박금자 할머니(010-6757=60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