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회사를 다니기 전 회사들을 유랑하듯 다녔다. 내 의지로 그만둘 때도 있었고 회사 부서가 사라지면서 애매해 나온 적도 있었다. 자유롭게 그만둘 수 있었던 이유는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나 한 사람 생활하는데 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껴 쓰며 살면 굳이 수백만 원 월급이 필요 없기에 안정적인 직장 대신 내 생각과 마음에 집중하였다. 그러다 우연히 지금의 회사를 만났다.
언제고 마음에 안 맞으면 그만둘 생각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대기업이라는 안전한 타이틀, 무난한 직장동료, 꼬박꼬박 나오는 회사 월급이라는 덫에 흠뻑 빠져 수년째 머무르고 있다. 오랫동안 회사에 머물러 있을 땐 꽤나 편하다. 안정감이 느껴지고 오랫동안 머무르다 보니 어떻게 하면 성과를 높게 받는지도 대충 알 것 같다. 하지만 정작 회사를 벗어나면 어디서 돈을 벌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바짝 긴장이 된다.
언젠가 끓는 물속의 개구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개구리들을 아주 뜨거운 물에 넣었을 땐 벗어나고 싶어 아등바등거리다 개구리들이 살은 반면 천천히 온도를 올린 물에 들어간 개구리들은 죽었다는 이야기다. 익숙한 일을 하며 편안하게 일과를 보내는 것이 어쩌면 서서히 온도를 올린 물에 들어간 개구리와 같아 걱정이 된다. 나는 회사를 벗어나면 어떻게 자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자생을 하기 위해 내가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지속하는 것들을 생각해보니 역시 '그리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한 달 동안 아주 소박하게 그리기로 월 10만 원을 벌어보기로 했다. 자기만족으로 표현하는 그리기와 돈을 벌기 위한 그리기는 좀 다르다. 자기만족의 표현은 재료와 도구, 표현하는 주제가 오롯이 '나'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수익화를 위한 그리기는 '경영자'의 마인드가 어느 정도 탑재되어야 한다. 어떻게 내 그림을 홍보할 것인가? 어떤 도구로 그림을 그려야 요구사항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을까?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이 그림 실력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소박하게 10만 원을 벌기 위해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을 포트폴리오 사이트에 올렸다. 전략적으로 비슷한 콘셉트의 그림들을 일관성 있게 올려 나갔다. 처음에는 올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수십 장의 그림이 사진첩에 있었기에 계속 올려 나갈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반응은 여전히 없었다. 관객 없는 무대에 나 홀로 춤을 추는 느낌이 들어 포트폴리오에 올리기를 그만두고 공모전에 도전하기로 했다.
영화 콘셉트 아트를 그려주는 공모전들을 주로 지원하였는데 처음에는 독립영화부터 지원하였다. 이것마저 반응이 없었다면 그리기로 돈 버는 일은 그만두었을 텐데 다행히 공모전에서 상을 몇 번 받게 되었다. 공모전은 정확한 날짜와 요구하는 주제가 명확하다. 포트폴리오 사이트에 그림을 올려 나가는 건 기약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느낌이었다면 적어도 공모전은 기약이 있었다. 수상 명단에 오르고 내리 고를 반복하면서 동시에 영화사로부터 꽤 많은 선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리기를 계속 이어 나가는 사이 어떤 회사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작가님, 저희는 온라인 기반의 식물 사업을 하는데요, 작가님과 콜라보를 하고 싶어요."
"책 표지에 작가님 그림을 쓰고 싶은데요, "
"제 책에 작가님의 그림을 넣어도 될까요?"
2개월 정도 기약 없이 기다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회사로부터 드문드문 같이 일을 하자는 제안을 받기 시작했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이렇게 연락을 해오는 담당자들이 무척 신기하고 황송하기까지 했다. 회사를 벗어나 내 능력으로 누군가 비용을 지불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뻤다. 물론 회사에서만큼 안정적으로 돈을 벌었던 것은 아니지만 작은 돈이라도 내 능력으로 수익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신감이 생길 수 있었다. 클라이언트가 늘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도 내가 직접 상품을 개발해 볼 수도 있다.
그림을 그린 다음 스티커나 독립출판물을 만들어 마켓에 직접 판매를 하는 것이다. 여행 갔을 때 그린 그림들로 액자, 엽서 북과 스티커, 독립출판물을 만들어 전국의 굿즈샵에 입점을 시켰다. 드문드문 그림은 판매되었고 때론 누군가 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블로그나 SNS에 올려주기 시작했다.
그리기를 좋아하는 '이모티콘'도 개발해 판매해 볼 수 있었다. 내가 매일마다 마시는 '커피'를 중심으로 25가지가 넘는 그림을 그려보았다. 마음만 급해 하루 만에 대충대충 이모티콘을 그려 올렸더니 보기 좋게 심사에 탈락하였다. 왜 이모티콘이 탈락하였을까? 마음만 앞서 복사 붙여 넣기를 꽤 많이 한 게 흠일 수도 있고 독특한 구석도 부족했다. 어쨌든 실패나 탈락은 속상했지만 덕분에 무엇을 보완해야 할지 생각을 하며 다른 주제로 이모티콘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내가 선택한 다음 이모티콘은 회사원, 약사, 의사 등 특정 직업군에 대한 이모티콘이었다. 주말마다 종종 부모님 업무를 도와드리곤 했는데 때론 부모님의 얼굴로 이모티콘을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너무 타깃이 좁아 아무도 구매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모티콘 역시 첫날부터 조금씩 판매가 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리기'를 통해 이 활동, 저 활동 씨앗을 뿌려놓고 보니 '그리기'만으로 수익화를 실현하게 되었다. 때론 월 10만 원이 훌쩍 넘게 벌 때도 있고 어쩔 땐 10만 원은커녕 만원도 못 벌 때도 있다. 처음엔 회사를 벗어나 내가 돈을 벌 수 있을까?라는 실험적인 마인드로 시작을 했지만 그리기를 통해 수익화를 해보니 충분히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내 능력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도 기분이 좋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감과 즐거움이 생겼다는 점이다.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도 수익화를 할 수 있을까?라는 끊임없는 의구심이 해소되고 자신감으로 이어지면서 생각지도 않게 연결되고 발견되는 기회들이 삶의 소소한 활력이 되었다. 크고 작은 소소한 기회들이 연결되다 보면 움츠러든 창조성이 조금씩 싹터 예상치도 않게 그림을 통해 세상에 개입하고, 나의 가능성을 일깨우게 된다. 그렇게 오늘도 소소하지만 적은 가능성을 조금씩 타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