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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충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남편의 말 한마디는 상처의 연속이 였다.

by 미소마을


결혼 전, 남편은 듬직해 보였다.
네 살 많은 그는 늘 나를 챙기고, 믿음직한 말을 건넸다.
그래서 결혼 후에도 기대했다.
함께 아이를 키우고, 함께 어른이 되어가기를.

하지만 첫 아이가 태어나고,
그는 아이보다 더 아이 같았다.



식탐이 많아 아이들과 음식으로 다툴 때면
‘내가 아이 셋을 키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고,
실망이 쌓여 체념이 되었다.
이젠 그냥 기대하지 않는다.
그게 마음이 덜 다치는 방법이라는 걸, 시간이 알려주었다.



그가 이라크에서 2년간 근무하던 동안
나는 두 아이를 온전히 혼자 돌봤다.
아들의 느린 사회성을 위해 놀이터를 전전했고,
족저근막염이 생겼지만 쉴 수 없었다.
아이를 보다 녹초가 되어
잠든 날이 수없이 많았다.



그때 내 힘듦을 진심으로 들어준 사람은 없었다.
“애 키우는 게 뭐가 힘드냐”는 말이
내 고단한 하루를 너무 쉽게 지워버렸다.

며칠 전, 남편이 일하는 아가씨 아이들을 보는 시어머니를 따라
조카들을 하루 도와주고 왔다.
“엄마 너무 힘들겠더라.
애 둘 돌보는 거 장난 아니더라.”
그 말이 꽂혔다.



우리도 그랬는데,
나는 왜 아무 말 없이 그 시간을 견뎌야 했을까.

나는 엄살이 아니었다.
그저 매일 아이를, 나를, 가정을
지켜내려 애썼던 사람이었다.

육아는 노동이다.
애 키우는 일이 쉬웠다면,
모든 국민이 출산을 하고 누구나 아이 셋쯤은 키웠을 거다.




회사 다니는 일이 힘든 것처럼,
아이를 돌보는 일도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누군가를 키우는 일에는 반드시
이해와 존중이 따라야 한다.
육아는 ‘엄살’이 아니라 ‘헌신’이다.
그 말을 더 많은 이들이
조금만 일찍 알아주었더라면,
그 시절의 나는 덜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맘충’이라는 말이 생겼을 때,
나는 이 사회가 얼마나 육아를 가볍게 여기는지 알게 됐다.
아이를 안아본 적 없는 사람이
생각 없이 뱉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도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어머니일 수도 있고, 할머니일 수도 있고,
혹은 어린 시절 자신의 곁에 늘 함께였던 누군가였을 것이다.

사람은 절대 혼자 자랄 수 없다.
누군가의 희생과 손길 없이는
그 어떤 생명도 무사히 자라기 어렵다.




육아는 혼자의 몫이 되어선 안 된다.
그 역할을 맡은 사람에게는 마땅히
이해와 존중, 그리고 쉼이 필요하다.

한때, 엄마들이 커피숍에 간 걸 두고
‘남편이 뼈 빠지게 버는데 낭비 아니냐’는 말이
커뮤니티에 떠돌던 적이 있다.
그 글을 보고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정말 피가 마르는 시간을 여러 번 겪었다.
돌봄은 노동이고, 감정의 총량을 다 쏟아내는 일이다.
돈을 버는 일이 고되고 어렵듯,
아이를 돌보는 일도 절대 가볍지 않다.

누군가의 하루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너무 쉽게 판단하거나, 상처 주는 말로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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