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센티멘탈

마도, 동양의 파리


상하이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곧잘 마도(魔都)라고 부른다. 마도, 규정하기 힘든 복잡한 상하이의 이미지를 잘 낚아챈 표현이다. 그런데 이 마도라는 별칭은 최근에 생겨난 새로운 표현이 아니다. 지난 세기 3, 40년대 이미 상하이를 지칭하던 표현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괴이한 별칭이 생겨난 것일까.


아편전쟁 전까지만 해도 조그만 어촌마을에 불과하던 상하이, 그러나 남경조약의 결과로 강제 개항된 상하이는 이후 몇십년 만에 아시아 최대의 도시로 탈바꿈한다. 뉴욕, 런던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메트로폴리스, 동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사람과 돈이 넘쳐나는 모던 시티였다. 그리하여 당시 상하이를 한번 다녀온 것만으로도 모던을 체험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니 오락과 향락도 덩달아 흥하게 되었다. 당시의 상하이는 누군가에겐 일확천금을 벌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고, 마약, 매춘, 조직폭력 등 각종 범죄가 횡행하는 공간이었다. 서구 열강의 조계지, 이어지는 일본의 침략으로 반식민지가 된 공간,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활동하는 곳이면서 또 다른 면에서는 모험과 기회의 공간이었던 곳, 다양한 국가가 뒤섞인 무국적의 땅, 한마디로 당시의 상하이는 뭐라 규정하기 어려운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마도라는 별칭은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상하이의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외탄, 남경로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더불어 새로 들어선 푸동지구의 마천루들은 상하이가 예나 지금이나 화려한 국제도시임을 보여주고, 뒷골목 구석구석에 아직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전통적인 요소들을 보면 상하이는 한 두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복잡 다양한 공간임을 알려준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만화경 같은 도시가 바로 상하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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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상하이를 부르던 많은 별칭 중에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이 바로 동양의 파리라는 명칭이다. 지금도 파리하면 쉽게 연상되는 여러 가지 이미지가 있지만, 근대의 파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낭만적이며 문화적으로 풍성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품은 도시였다. 가령 근대의 징표라 할 수 있는 만국박람회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1899년에 파리에서 처음 개최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상징적으로 증명한다. 파리의 랜드마크인 에펠탑도 이때 세워진 것인데, 당시 파리가 갖는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겠다. 수많은 일급 사상가, 예술가, 자본가들이 물밀듯이 모여들면서 파리는 세계 속 문화의 중심지로 위치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3, 40년대 상하이를 동양의 파리로 비유한 것은 여러 모로 흥미롭다. 비록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인한 강제적 개항과 열강의 조계지가 구획되면서 발전된 도시이긴 하지만, 분명 당시의 상하이는 유럽의 파리나 런던, 미국의 뉴욕에 못지않은 에너지와 활기가 넘치는 공간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당시의 상하이가 더욱 특이했던 점은 동서양의 문화가 뒤섞이며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했던 새롭고 다양한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아시아에서는 처음 경험해보는 화려한 도시 문화가 펼쳐지면서 말 그대로 별천지, 신천지가 펼쳐진 것이다.


사실 중국으로서는 상하이가 서구열강에 의한 강제개항 되고 반식민지화된 공간이었으니 상하이에 붙여진 동양의 파리라는 별칭이 불편하고 달갑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된 뒤 상하이는 개조되어야 할 공간으로 지목되어 철저히 억눌리기도 했다. 한편 당시 상하이는 그러한 정치적 불행과는 별개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메트로폴리탄이었음에 분명하다. 중국인 스스로도 처음 경험해보는 화려한 도시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향유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당시 상하이를 아시아의 문화적, 예술적 수도, 즉 동양의 파리라고 부르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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