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怪物)>을 보고
* 영화 <괴물>(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올 해 봄, 휴식 겸 갭이어를 앞두고 퇴사를 했다. 괜시리 마음의 여유가 줄어들어, 한국여성의전화에 보내고 있던 정기후원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곧 다시 재개해야지 했는데, 그렇게 몇 달이 훌쩍 흘렀더랬다.
그러다 지난 달부터 새로운 곳에 정기후원을 하게 되었다.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두 회사 중 한 곳의 프로젝트 미팅을 위해 방문한 한 비영리 조직은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해 상담, 의료, 법률 및 긴급주거 지원을 제공하고 있는 곳이었다.(올해 비영리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우리나라에 딱 한 곳이다.
미팅 준비를 하면서 한 번, 인터뷰 미팅을 하며 또 한 번. 내가 너무 모르고 살아온 것들이, 지금도 또 내가 지나온 날에도 주변에 늘 있었겠다는 생각에 충격이란 말보다 외려 좀 더 무거운 무언가가 마음에 얹혀 며칠 동안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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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사람인가봐, 이런 걸 좋아하고, 이런 건 조금 불편한가봐.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종종 힘들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시간들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설레고 들떠 친구들과 이렇고 저렇고 별 사소한 것들로 만날 때마다 이야기 꽃을 피운다. 다른 어떤 게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죽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이렇게 다 크고 나서야 그나마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너무 몰랐구나. 부끄러웠다.
쓰던대로 쓰던 악의 없는 말, 하던대로 하던 악의 없는 생각과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높은 암벽이 되기도 하고, 때론 끝도 없는 낭떠러지가 되기도 한다. 투둑, 투둑, 던져진 돌들을 집어서 서 있는 한 뼘의 공간 주위에 스스로 성을 쌓아올리게 한다.
주변의 말과 생각, 행동을 일상에서 수없이 접하며 내가 비정상(非正常)이라는 의심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들켰을' 때엔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잃고 버림받게 될 거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 조각, 두 조각 자기를 다른 조각으로 덮어나가면서 괴롭게 불안하게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런 자신이 이미 너무 멀게 느껴지고 말 것이다.
그런 거짓말이, 아닌 척, 괜찮은 척 이런 것들이 계속 한다고 해서 퍽이나 익숙해지고 쉬워질까. 점점 더 숨이 막힐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지내는 것도 무척이나 힘들텐데, 거기에다 그들에게 들키지 않을까를 걱정해야 한다. 그랬을 때 거부당하고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학교에서, 집에서, 그렇게 일상에서 숨 쉬듯이 느껴야 한다.
나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서, 불편한 마음에 내가 걸려 넘어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다 말하고 말지, 한다. 그러다 마음과 달리 작은 거짓말이라도 하게 되면 그게 신경이 쓰여 온종일 불편한데.
내 20대에 인생의 목표는 내가 나를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다음 목표가 생겼지만, 당연히 그런 날이 종종 있다. 그리고 기억한다. 더 어렸으며 그래서 우연한 시간들과 필요한 사건들이 쌓이기 전까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못하는 날들은 더욱 버겁고 어려웠었다.
그러므로, 감히 짐작해본다면, 어떤 아이에게는 숨막히는 일상보다도 어쩌면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다시 자기 안에서 찾아내며 자기를 미워하는 일이, 그런 자기를 견디는 게 가장 힘이 들 것이다. 그 아이의 청소년기는 어떨까. 성인이 되어서는, 학교가 일터로 바뀌어 이어질텐데 뭐가 크게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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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청소년들이 많이 하는 생각이 있다고 했다. ‘스무살이 되면 난 여기 없을 거예요.’ 이른 나이의 죽음을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왜 그렇게까지 힘들어할 수밖에 없는 건지, 나 한명이라는 좁은 삶으로는 온전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게 면목 없다는 생각이 들어 차마 묻지는 못했다.
몇 명한테만, 아니 단 한 명한테라도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다면 죽음에 가까운 것들을 덜 생각할 수 있을텐데. 정말 별 것도 아닌 것들로 인간이란, 구별짓고 정상성을 만들고 그 바깥의 것들을 규정하는 데 너무나 능하다. 너무 자연스러워 우리가 그런 걸 하고 있다는 것조차 자주 잊은채로 살아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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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다른 폭력을 부른다. 어쩌면 그것들은 모두 한 줄로 꿰어져 있다. 누군가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다면 그 다음엔 그 존재를 해치는 일도 할 수 있다. 그게 설령 자신의 아이일지라도. 아니, 자신의 아이임에도. 아마도 요리는 살기 위해 불을 질렀을 것이다. 그게 그 아이에게는 불장난도 분노도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유일하고 절박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성소수자 청소년들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 단체에 조언을 구하거나 함께 고민과 정보를 나누는 교사들이 요즘에는 몇년 전에 비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교탁이나 책상에 무지개 아이템을 올려둔다거나, 수업 시간에 자연스럽게 성소수자에 대한 지지를 표현한다거나, 이런 저런 시도들이 그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아이들이 내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더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고 싶지 않더라도, 저 선생님한테는 정말 필요하면 털어놓을 수도 있겠다는 작은 안전감을 가질 수 있도록. 작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떤 아이는 조금 더 숨 쉴 구멍이 열리고, 조금 덜 외로울지도 모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미야자키 하야오도 사운드트랙에 실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므로, 지구본을 돌리듯이 우린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의 올바른 작은 소망에서 모든 건 시작될 거라고 말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아역 배우들이 호흡하듯이 연기할 수 있게 편안한 현장을 만들어내는 그의 작업 방식이, 그렇게 스크린에 담겨내진 아이들의 눈동자와 입매가, 걸음걸이와 뒷모습이 좋다. 적은 양의 몇 마디 대사들과 가만히 비추는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이 만들어내는, 말보다 두껍고 짙은 말들의 그 풍성함을 좋아한다. <괴물>도 그랬다.
중반쯤부터는 상영관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 정도로 슬픔의 감정이 너무도 생생하게 팽창해서 조금 힘들게 영화를 봤다. 이야기가 이끄는 길로 괴물이 누구인지에 주목하며 달리다가 어느 순간 황망하게 멈춘 채로, 미리 보기 시작한 이야기가 모두 다 끝날때까지, 내내 속절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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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괴물일까 의심하는 두 아이들의 시간 건너편에, 누군가가 괴물일거라 의심하는 어른들과 반 아이들의 시간이 흐른다. 소소한 혐오와 사소한 오해가 겹겹이 교차하고 마침내 견고한 소문이 되어, 사실의 옷을 입고 누군가의 반짝이던 생기를 헤지고 닳게 만들어버린다.
‘그건 오해야’라는 말 안에서 오해(誤解)는 ‘당신이 틀리게 해석했다’는 전제를 동반한다. 주어가 당신이 아닌 내가 된다한들, 사실 악의는 없었다는 숨은 의미가 강조된다. 즉 책임 소지를 은근히 나의 외부로 돌리는 말이라는 점은 같다는 것. 그러니 ‘당신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의심만이 오해를 막을 수 있다. 네가 이상한 게 아니라 그렇게 느끼는 내 생각이 틀린 걸수도 있겠다, 는 의심. 그래서 우리는 짐작하기보다 묻고, 말하기보다 들어야 한다. ‘하나, 둘, 셋- 괴물은 누구게?’ 요리와 미나토의 게임처럼.
자기 안에 들어온 의심은 때로 스스로를 겨눌 정도로 몸집이 커지기도 한다. 미나토와 요리는 타인과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들려오는 괴물같은 의심들의 한 가운데에서, 둘만의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꾸미고 싶은대로 마음껏 꾸민다. 여느 또래 아이의 아지트 만들기가 그렇듯이.
그 세계에서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함께 웃고 놀면서’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지켜낸다. 질식하지 않기 위해 아마도 가장 필요했을, 우린 괴물이 아니지?라는 말로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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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크런치’. 두 아이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세계의 끝이고, 삶의 끝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린 아이들이 흔히 짓곤 할 결말은 분명 아니다. 그 마음을 역추적해본다. 처음부터 잘못되었으니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할 수 있기를, 지금과 다른 내가 아닌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그 끝을 만들어놓았대도, 그저 기다리는 건 지난하고 아득했겠다. 그래서 아이들은 매일, 오래 전 버려진 열차를 타고 그 기다림의 여행을 떠난다. 도착지가 어느 물리적인 장소가 아닌, 시간이 흐르기를 그렇게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라는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버려진 열차 칸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는 다른 시간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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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서도, 집에 도착해 손을 씻으면서도, 자꾸만 눈물이 고였다.
누군가가 어떤 행복은 자기의 것이 될 수 없다 믿게 되는 일들이, 내 것이 아닌 불행이라 내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었다. 어쩌면 들을 수도 나눌 수도 있었다는 것,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미안해서 그랬던 것 같다.
충분히 보고, 귀기울여 듣고, 먼저 묻지 않으면 이 세상에는 의심할 게 별로 없어지기가 너무 쉬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인식이 없다거나 전혀 무지해서가 아니었다. 크게 의심할 게 없어서 지나치기 쉬웠던 게 아니라, 더 세세하게 보고 듣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는 거였다. 그렇게 옆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상에 살게 되는 거였다.
2023. 12. 19 봄
2023. 12. 20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