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차의 꿈(Train Dreams)>을 보고
우린 종종 ‘삶이란 참 덧없다’고 말을 한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갔음을 실감할 때, 아무리 노력해도 어떤 이유로 바라는 일이 잘 되지 않거나, 좋은 일이 나쁜 결과를 가져올 때나, 혹은 그 반대일 때도.
삶이 정말 기차에서 졸다 꾸었던 꿈과 같이 한낱 덧없는 무언가라면, 우리가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명의 소설 <기차의 꿈(Train Dreams)>를 원작으로 한 영화 <기차의 꿈>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러한 세계의 불가해(不可解)함, 그 속의 개인이 마주하는 무력함, 그럼에도 살아가게 하는 삶의 기쁨과 희망을 생태계의 축소판인 숲과 로버트 그레이니어라는 한 사람의 80년 생애를 통해 담담하고도 깊게 투과해 보여준다.
기차는 문명과 발전, 욕망과 의지, 사회, 전쟁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계속 흘러가는 시간도. 기차가 가는 경로를 한 명의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도, 운행을 멈출수도 없다. 그 거대한 인위 또는 자연의 구조들이 알 수 없는 연결로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 모든 존재는 수많은 역부족의 사건들을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며 짧으면서도 기나긴 삶을 살아간다. 즉, 단순히 문명의 이기나 전쟁을 넘어 ‘우리를 둘러싼 거시적 구조와 그 본질적인 변동성’을 상징하는 것이 기차라면, ‘기차의 꿈’에서 꿈은 우리의 인생, 각자가 가진 삶의 의미나 목표를 뜻함과 동시에 인생의 덧없음 또는 비현실(非現實)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얄궂게도 꿈이라는 단어에는 본래 그 두가지 의미가 다 있듯이.
함께 벌목하던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끌려가 강으로 던져진 중국인 동료 벌목꾼.
인종을 이유로 누군가를 죽여, 그의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어떤 벌목꾼.
영문없이 부러진 죽은 나무는 로버트가 흔치 않게 유대를 느꼈던 안의 죽음을 앞당기고, 산불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가족, 아내 글래디스와 어린 딸 케이트를 잃게 만든다.
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이 일들은 반복해서 같은 질문들로 로버트를 괴롭힌다.
‘이렇게 갑자기, 진실인지 알 수 없는 당위도, 그래야만 하는 개연성도 없이, 한 순간에 사람이 죽는다고?’
‘그렇게 쉽게 사람을 죽인다고?’
‘대체, 왜 죽어야만/죽여야만 했지?’
‘그리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음에도,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특히 마지막 질문은 그를 계속 따라다니기도 하고,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계속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그러니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작품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인생은 원래 그런거야’를 보여주는 듯하다.
'고아로 자란 로버트와 같이, 우린 어디서 왔는지 인생은 왜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다. 이 여정이 언제 어떻게 끝나는지도 알 길이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논리나 당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고, 때로는 우리 탓이 아닌 일들이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 탓인 일들도 있다. 끝내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들이 그렇게 우리를 스치고 때론 덮치고 지나간다.’
'그래서 인생은 무지하게 행복해지기도, 무지하게 고통스러워지기도 한다.’
라고.
그러므로 영화는 우리에게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하나.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둘. 나와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그러므로 나와 다른 존재들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기.
셋. 그러니 알면서도 해를 끼치지는 않도록 조심하며 살아가기.
넷.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은 역시 결국 사랑이라는 것.
찬란한 사랑의 따뜻함과 깊은 기쁨이 지나간 자리에 무력함과 부당한 고통을 통과하며, 계속 기다리고, 기다리다 삶을 떠나는 로버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무엇이라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세계의 이해할 수 없음과 마주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인물, 개념, 관계, 장면 등-은 양면성을 지닌다.
철도를 놓는 일, 나무를 베는 일이 그렇고, 갑작스러운 죽임을 당하는 일, 무언가를 사냥하는 일도 그렇다. 거시적으로 보면 철도는 비인간화를 수반하는 산업화 혹은 전쟁의 상징이 되기 쉽다. 그러나 미시적으로 보면 누군가에게는 꿈이거나, 인생의 과업이거나, 생계 수단일 것이다. 나무를 포함한 숲 생태계의 시선에서 대규모의 벌목은 살해이자 파괴지만, 로버트는 그의 유일한 꿈이자 삶의 의미인 가족을 지탱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노동의 현장이다.
즉,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 안에 놓여있음으로 해서 양면의 가치판단이 생기는 '상대성'을 가지게 된다. 줌렌즈(Zoom Lens)는 고정된 화각(초점 거리)를 가진 단렌즈와 달리, 광각부터 망원까지 비출 수 있는 렌즈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인 렌즈 자체에 양면성과 입체성을 전제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 충돌이야말로 영화 속 세계와 이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노쇠해 약해진 노인의 몸으로 처음 오른 경비행기 안에서,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지고 하늘과 땅,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어진 순간 로버트는 비로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이 편에서 보았을 때 악하고 폭력적인 일이, 저 편에서 보면 그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듯이. 가까이서는 정당해보였던 일이, 떨어져 보니 부당할 때가 있듯이. 올려다볼 때 이해되지 않던 그림을, 거꾸로 내려다보니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도 되듯이.
그런 의미에서 원제인 ‘Train Dreams’는 ‘기차에서의 꿈’이면서, ‘기차에 실은 꿈’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 소중한 꿈꾸는 무언가가 있기에, 한낱 꿈처럼 끝날 덧없음을 느끼면서도 내일도 살아갈 것이다. 소중한 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온기로 거대한 덧없음의 무게를 녹여내면서,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연약한 사랑을 헹구어내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슬픔을 통과하면서. 그럴 때마다 이 세계의 이해할 수 없음을 천천히, 각자의 속도로 이해해가면서.
충돌하는 꿈들이 만든 세계에서, 덧없더라도 사랑하는 일. 그게 '살아감'이면서, 동시에 살아가는 일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였다. 그리고 그럼에도 마음이 납작해지는 날에는, 렌즈를 새로 갈아끼우고 숲을 보는 마음으로 다시 멀리 당겨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덧붙이는 생각
영화가 로버트 그레이니어의 삶을 편집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그는 목적도 의미도 없이 방황했다'는 말로 청년기의 모습은 영화에서 스쳐지나간다. 팻말을 걸고 아이다호로 향하는 기차칸의 어린 로버트 역시 그렇다. 반면, 로버트가 삶에서 깊은 행복과 슬픔을 느끼는 순간들을 보여줄 때는 영화의 시간이 마치 리얼타임처럼 촘촘하고 생생하게 흐른다. 글래디스와의, 그리고 딸 케이트와 함께 하던 따뜻함과 안식도, 그리고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의미를 잃은 후 불모지가 된 맨 땅에 쓰러져 몇날이고 기다리던 깊은 고통과 슬픔도. 인생의 끝자락에서 돌아보았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시기나 사건이 길고 생생하게 남을까? 어떤 시기는 스쳐지나간듯 흐릿하게 기억날까?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가 떠오르기도, 장자의 호접지몽이 떠오르기도, 불교 철학의 연기사상(緣起, Dependent Origination)이 떠오르기도 했던 영화.
역사가 재미있는 이유이자 무서운 이유는 반복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류 역사에서 무서울만큼 새로운 차원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AI 기술의 발전의 뒤에는 머신러닝에 필요한 데이터를 AI에게 직접 학습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개발도상국에 설립된 연구소를 통해 채용되며, 근로 시간 동안 인간이 생성한 온갖 종류의 시각 데이터에 노출된다. 근로자들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트라우마를 겪지만, 계약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기도 이러한 실상이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기도 어렵다고 한다. 기차가 서부개척시대의 산업화와 세계 1차 대전의 그림자를 보여준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구조 안에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026. 2. 18 봄
2026. 2. 22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