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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명하게 대비하면서 공존하고 있는 증오와 사랑에 대하여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고

by 윤지아

이번에 고른 책은 고전 중의 고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다. 영화도 여러 번 나왔고, 2026년에도 개봉 예정이라니 기대가 된다. 그러나 백안에 가지고 다니기 다소 부담스러운 두께, 거의 전공서적이 따로 없다. 퇴근길에만 읽어도 보통 다른 책이면 일주일이면 다 읽는데, 이 책은 꼬박 한 달이나 걸렸다.


내용은 생각보다 초반부부터 확 빠져드는 내용이다. 다만, 사람 이름을 지독히 못 외우는 나로서는 시작부터 등장하는 온갖 이름들에 어질어질했다. 게다가 하녀 넬리가 세입자인 록우드에게 워터링 하이츠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끝까지 전개되는데, 넬리의 시점으로 각 주인공들의 대명사가 계속 바뀌는 거다. 주인님이라 했다가, 도련님이라 했다가, 악한이라고 했다가, 젊은이라고 했다가 등등..

그러나 넬리가 바라보는 3인칭 시점으로 인물들의 변화하는 입장을 실감 나게 표현해서 오히려 적절히 표현된 것도 같다.


정 반대되는 두 저택의 외관 이미지

워터링하이츠를 내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허아 벌판에 우뚝 솟아있는 약간은 다 무너져가는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해리포터에나 등장할 것 같은(루나러브굿네 집?) 그런 외딴집이 떠오른다. 반면, 그 근처 저택인 드로시크로스의 저택을 생각하면, 교외의 시골풍경과 어우러져 잘 관리되고 세련되고 모던한 방식의 밝은 느낌의 호와 로운 저택이 떠올랐다.

이 소설은 이 두 저택의 극명하게 다른 이미지처럼,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대조적인 포인트들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대조적인 풍경은 어쩐지 계속 얽히고설켜 등장인물들과 함께 어우러지게 된다. 심지어 사랑과 증오라는 정 반대처럼 보이는 감정조차 하나의 감정으로 공존시켜 버리는 것이다.

워터링하이츠의 언쇼집안과 드로시크로스의 린튼집안의 인연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났지만, 악마에게 홀린 듯 웃으며 죽은 히스클리프의 얼굴만큼이나 이상하게 비극적 끝만이라고도 판단할 수 없는 오묘한 찜찜함을 남겼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공통점

언쇼가에 출신/인종도 모르는 히스클리프라는 인물이 들어오면서 언쇼집안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언쇼가의 아들 힌들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위협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여동생, 제멋대로이지만 당차고 사랑스러운 언쇼가의 딸 캐서린은 오히려 히스클리프의 그런 점에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 진심으로 친구가 되어주었다. 둘은 가끔 심한 장난도 치며 노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다소 잔인하거나 폭력적인 장면에도 웃어넘기는 캐서린을 보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왠지 모르게 닮은 듯 보였다.

외적으로는 부잣집 딸과 출신모를 데려온 사내아이라는 대조적인 모습이지만, 그 내면엔 두 사람 모두 만만치 않은 고집, 약간은 악한 성격, 자상함, 그리고 서투르지만 강력한 사랑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히스클리프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캐서린의 사랑

이 소설의 복수와 증오와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히스클리프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넬리와 둘만 있다고 생각한 캐서린이 하녀 넬리에게 히스클리프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은 일 때문이었다. 히스클리프는 소파 구석에서 누워서 우연히 이 둘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실 난 캐서린이 넬리에게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너무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둘 사이의 신분의 격차에 대하여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자신과 동일시하는 정도에 이르는 수준의 사랑이었다.

'그가 바로 나야 넬리.'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아니 자신 자체가 되어버린 그런 존재를 인정하는 대목이었던 것이다. 이 부분을 듣지 못한 채, 신분의 격차에 대한 부분만 듣고는 히스클리프는 몰래 집 밖으로 나가버린다.

아, 저 말을 히스클리프가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캐서린의 말 중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자신의 품위가 떨어질 거라는 말까지만 듣고 나가버리다니. 이게 웬 막장 아침드라마의 설정이란 말이냐.

아쉽게도 그렇게 실망한 히스클리프는 그대로 집을 나가버렸고 몇 년간 돌아오지 않았다. 몇 년 후 돌아왔을 때는 이미 캐서린은 드로시 크로스에 사는 애드거 린튼이라는 교양 있고, 좋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히스클리프가 만약 그날 밤 캐서린이 자신에 대한 진심을 고백하는 부분까지 들었더라면, 이 소설의 내용이 달라졌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야무지고 계산적인 캐서린은 결국 애드거 린튼을 상대로 선택했을 테니까. 결국 좀 더 캐서린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고 노력하다가 애드거 린튼에 질투의 마음을 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고백을 히스클리프가 듣지 못한 것이 참 아쉽다. 그가 정신적으로 미쳐서 죽게 될 그날까지, 결국 그 말 한마디, 그 진심 하나를 듣고 싶었을 테니까 말이다.


엇갈린 세 사람, 조용히 잠든 세 무덤

이루어지지 못하고 어긋난 버린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절절한 사랑에 대하여 집중을 하며 읽다가, 왠지 모르게 묵묵하고 한결같은 애드거 린튼이라는 인물에 대하여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가장 이성적이고 감정의 동요가 없어 보이지만, 마지막까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고, 남은 딸을 돌보며 묵묵히 책임을 다 하는 애드거린튼의 사랑도 찐사랑 아닌가?

히스클리프가 무식하고 과격하지만 화끈하고 열정적인 태양 같은 사랑을 보여줬다면, 애드거린튼은 잔잔하고 고요하게 어둠 속에서 빛나는 차가운 달과 같은 그런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런 극명한 대비는 죽음에서도 또 드러난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다소 무모하고 고집스러운 점 때문에 괴이하고 요란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다면,

애드거 린튼은 끝까지 딸 캐시에 대한 책임을 다하다가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셋의 무덤은 그렇게 나란히 고요할 뿐이다.

비록 소설 마지막 부분에 히스클리프가 죽은 이후 히스클리프 유령과 여자 유령이 나온다는 말들로 미루어보아, 셋 중 편안히 잠들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듯 하지만,

그래도 표면적으로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히 고요했고, 그 이후 새로운 세상이 밝아왔다.


왕과 거지 같은 린튼과 헤어튼

극명한 대조는 주인공들의 2세인 조카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언쇼가의 아들 힌들리가 낳은 헤어튼은 좋은 집안의 유전자 때문인지 귀티가 흐르지만,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머슴처럼 부렸던 그의 아버지 힌들리에 대한 복수로, 헤어튼 에게 전혀 학문을 가르치지 않고 머슴처럼 부린다.

반면, 히스클리프의 아들 린튼은 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왠지 모를 악한 성향을 띠고 몸이 약하게 태어나 볼품없었으나, 귀한 집 자식처럼 가르치고 키워 그럴싸한 명문가 자식처럼 보이려 애쓴다.

그러나 볼품없고 무식한 헤이튼은 어딘지 모르게 귀티가 나고, 고모인 캐서린의 눈을 닮아 히스클리프를 자주 생각에 잠기게 해 준다. 그리고 헤어튼은 역시 자신에게 막 대한 히스클리프를 이해하고 그를 아버지와 같은 존경심을 가지고 진정으로 사랑해 준다. 히스클리프가 죽었을 때 유일하게 슬퍼하며 시신에 키스를 했다는 헤어튼의 모습은 히스클리프의 미움과 복수를 사랑으로 돌려받은 결말을 보여준다.



책을 서술하는 넬리가 말한 대로, 나도 책을 다 읽을 때까지 히스클리프가 죽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죽음의 장면은, 악마가 혼을 가져간 것처럼 두 눈은 부릅뜬 채 입가엔 소름 끼치는 미소를 띠고 누운 채 발견된 것이었는데, 그 장면을 보고 평생을 복수와 사랑에 바친 히스클리프의 결말이 도무지 해피엔딩인지 세드엔딩인지 모르겠는 거다. 분명 남들이 보았을 때에는 해괴하고 끔찍한 죽음임에 틀림없지만, 무엇에 홀렸든 살아있을 적 잘 웃지도 않았던 그가 미소를 띠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왜인지 모르게 위안이 되었다. 넬리가 히스클리프에 대한 지칭을 '악한'이라고 종종 표현했었는데, 그 부분을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그를 완전한 악한으로 인식해 버려, '저 사람 하나만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하며 읽었던 장면들도 있었다. 그런데 캐서린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나, 죽은 캐서린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장면들을 볼 때면, 다시 애석한 생각이 들며 그를 응원하게 되는 이상한 동정심이 드는 것이다.


흘러가는 구름송이마다, 밤이면 온 하늘에, 낮이면 눈에 띄는 온갖 것들에, 나는 온통 그녀의 모습으로 둘러싸여 있단 말이야! 흔해 빠진 남자와 여자의 얼굴들, 심지어 나 자신의 얼굴마저 그녀를 닮은 모습으로 나를 비웃거든. 온 세상이 그녀가 전에 살아 있었다는 것과 내가 그녀를 잃었다는 무서운 기억의 진열 장이라고!

-폭풍의 언덕 536P 중에서 -


결국 삶과 죽음이 상반되면서 공존하는 것처럼, 미움과 사랑도 그리 상반되지만은 않은 감정이지 않을까.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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