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이번 책을 선택한 건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은 후 그녀의 간결하고도 세심한 캐릭터들의 감정선 묘사방식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강이 첫 작품인 이 작품을 선보이고 곧바로 선망받는 작가계열에 올랐다는 점이 더욱더 이 작품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평은 "어떻게 17살이 이런 소설을 쓸 수가 있지"였다.
나 역시 읽는 내내 그 말밖에 안 나왔다.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며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아버지 레몽과 아버지의 새 여자친구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딸 세실의 비정상적인 가정환경. 그러한 상황을 즐기고 편안해하며, 지루한 것이 지독하게 싫다는 주인공 세실의 사고방식은 새삼 나를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다 등장한 안이라는 존재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드디어 정상적인 사람이 나오는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안은 죽은 세실의 어머니의 친구로, 세실을 가끔 돌봐주며 오랜 시간 만나온 엄마를 대체하는 존재였다. 그녀는 세실의 아버지와 동년배인 40대로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고 디자이너로 성공한 그런 완벽한 여자였다. 세실은 그녀의 도도함과 삶에 대한 태도가 분명 올바르다고 판단하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살기를 거부하며 괴리감을 느낀다. 자신과 아버지의 자유로운 삶은 완벽히 조화롭고 행복했으며, 그렇게 살아도 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춘기 소녀의 방황에 대한 일시적인 합리화가 아니라, 개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정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는 16살 소녀 세실이 아버지 레몽과 그의 새 애인 엘자와 함께 프랑스의 한 지방 별장으로 두 달간 여름휴가를 떠나면서 시작한다. 그해 여름 별장에서의 생활은 세실의 말처럼 완벽했으나, 내가 보기에는 굉장히 이상해 보였다. 예쁘고 어린 레몽의 애인 엘자는 무려 20대 중반으로 사교계 여자였다. 세실은 그녀에 대해 다소 경박하긴 해도 나름 지낼만하다고 판단하며 적당히 무심하게 아버지의 새 연인을 인정한다.
셋은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여름을 충분히 즐긴다.
이따금씩 아버지와 엘자는 달콤한 낮잠을 위하여 별장으로 들어가고, 세실은 그러한 아버지의 젊음과 자유로움에 대해 인정하고 이해하면서도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역설적인 생각을 한다.
별장 근처에는 시릴이라는 20대 중반 청년 시릴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세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결혼을 원하지만, 세실은 결혼이나 안정 같은 것은 본인과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던 중 안이 그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러 별장에 찾아오며 그 잔잔한 평화는 깨진다.
레몽의 초대로 온 안은 우아하고 기품 있는 매력으로 레몽을 엘자에게서 뺏어오는 데 성공한 것으로도 모자라, 결혼이라는 중대발표를 한다.
둘의 결혼이 자유로운 그녀와 아버지의 삶을 망쳐놓을 거라고 생각한 세실은 이 결혼을 막기 위한 연극을 시작한다. 시릴과 엘자에게 가짜 연인 노릇을 시켜 아버지가 엘자를 다시 원하게끔 만드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아버지의 성향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세실은 멘트 하나하나 아버지를 자극해 아버지의 마음을 조종하는데,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나쁘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자책한다. 결국 모든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레몽과 엘자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한 안은 충격으로 울며 그곳을 떠나고, 결국 파리로 운전하여 돌아가는 길에서 해안가 절벽 커브구간을 지나다 떨어져 사고사 같은 자살을 한다.
소설의 내용은 세실의 시점으로 세실이 꾸민 일명 "아버지 바람피우게 만들기" 연극에만 집중된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커다란 계획은 세실의 연극 하나가 아니라, 안의 "레몽을 얻기 위한 오랜 계획"의 실현이 공존하고 있다.
처음엔 세실의 시선대로만 안을 바라보았다.
그저 완벽하고 성공한 싱글 여성. 그리고 레몽과 결혼을 약속한 이후부터는, 외로움을 느끼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40대 여성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안의 자살 이후 세실의 시선에서 벗어나 개인적으로 바라본 안은 어쩌면 세실이 꾸민 계략보다 더 크고 오랜 기간 공들여 사랑하는 레몽을 얻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운 여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의 옛 남편인 레몽을 오랜 기간 사랑해 왔고, 마침내 이번 여름휴가에서 그의 마음을 얻어내고 말 것이라고 크게 작정한 그녀는 마침내 레몽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연극을 통해 계획을 꾸민 건 세실만이 아니었다.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는 레몽을 바라보며 십여 년간 그를 혼자 짝사랑해 온 안의 마음고생과 끝내 그 대가를 얻게 된 안의 집요한 노력이 숨어있던 것이다.
안은 세실과 레몽, 그들을 정말 사랑했고, 잠시 성취했다는 행복을 겨우 몇 주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레몽을 보며 절망하고 결코 이 행복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그녀를 자살에 이르게 한 것 아닐까.
세실은 안의 자살에 대하여, 같은 커브구간에서 그해 여름 여섯 건의 동일한 사고가 일어났다는 점으로 자살이 아니라 점차 사고사였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을 하게 해 준 안의 계산에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안이 세실과 레몽 같은 부류의 사람들 때문에 결코 목숨을 버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최소한의 가책을 덜게 해 준 것은 안의 자존심과 그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레몽은 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남자였다.
진정한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지도, 알지도 못하는 두 부녀는 안의 이러한 진심 어린 사랑에 대하여 어렴풋이 느끼고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 이후 변하게 될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너무 걱정한 나머지, 그녀의 이런 사랑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은 이들에게 불행을 안겨주면서도 그렇게 원하던 자유로운 삶을 계속되게 허락해 준 선물과도 같은 불행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안의 사랑을 영원히 잃었다는 것에 대하여 인정하고 그 감정을 "슬픔"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환영인사를 한다. 슬픔이여 안녕! 어서 오라고 말이다.
물론 이 소설이 쓰인 혼란의 시대의 배경을 차치하고 단순히 개개인의 삶의 태도를 생각했을 때, 처음 그들의 삶에 태도에 비정상적이라고 표현한 내 완고한 태도는 결국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버렸다.
안과 같이 명확한 삶의 방식에 옮고 그름이 있고, 그렇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을 고치려 애쓰는 나는 안의 태도가 굉장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러한 계획의 결과는 실패였고 죽음이었다.
아니 만약 안의 계획이 성공하여 결혼에 이르러 가정을 꾸렸을지라도 분명 레몽과 세실은 그 테두리 안에서 안정감은 느꼈겠지만,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이 죽은 후에도 그들은 꽤 만족스러운 삶을 유지했다. 똑같이 자유롭게.
안이 그들의 삶을 그녀의 기준인 올바른 삶으로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세실은 그런 계락을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며, 엘자도 그대로 다른 남자에게 떠났을 것이다. 결국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 원인은 누군가의 삶을 바꾸려 한 안의 욕심 때문 아니었을까.
우리는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이유로 틀에 박힌 삶에 대한 무언가 의무감 같은 것이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거나 규탄하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결국 각자의 삶의 방식에 옳고 그름은 없다. 게다가 사랑한다면 그들을 바꾸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했어야 했던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고, 가볍고 자유롭게 사는 부녀에게 안의 죽음은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삶의 묵직한 짐인"슬픔"을 껴안게 했다. 사고사로 위장할 수 있도록 해준 안의 마지막 배려로 자책감을 점점 덜어가던 그들은 자책감은 사라지더라도 슬픔은 남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부녀는 점차 그해 여름의 안과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그 슬픔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가게 된다.
어쩌면 이 부녀에게 안이 남겨준 마지막 선물과도 같은 감정.
그것을 마주하며 인사하는 안녕.
그렇게 그들은 그녀를 사랑이 아닌 또 다른 이름으로 안고 계속 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