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법무팀인 나는 가끔 송무 서류를 다룰 일이 있다.
요즘은 전자소송이지만 예전 종이소장을 제출할 때만 해도 재판부/원고/피고용으로 모든 걸 세부씩 출력하고 일일이 간인을 할 때면 손가락이 정말 아팠다.
그런데 세상에...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시절 판결문이나 법원서류를 저렇게 손으로 일일이 옮기는 필경사라는 직업이 있었을 줄이야.
너무나 당연히 복사출력하는 우리 세대가 보기에 필경사라는 직업은 생소했고, 왠지 모르게 딱딱한 내용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내용은 완전히 반. 전.이었다.
화자인 변호사는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을 독자에게 한 명 한 명 설명해 준다.
터키씨와 니퍼씨 그리고 진저 넛까지. 그렇다 이름이 아니라 화자가 부르는 별명이었던 것. (우리 회산줄)
게다가 별명에 맞춰 그들의 예측 가능한 행동들을 설명하는데 화자의 말투가 진지하면서도 웃기다.
터키같이 짧고 뚱뚱한 60대의 터키씨는 오전엔 공손 차분하고 오후엔 얼굴이 태양처럼 빨개져서 타오르다가 태양과 같이 져버린다는 표현에 정말 빵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오후엔 일을 전혀 하지 않지만 그래도 오전에 충분히 도움이 되니 소중한 직원이라는 화자의 표현도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이 더 재밌는 포인트다.
터키씨와 반대로 오전엔 소화불량으로 난폭한 모습을 보이지만 오후엔 차분하게 평온해지는 젊은 니퍼씨는 책상 높이 조절에 까다로운 면모를 보이며, 별명값을 했다.
그러나 화자는 그런 니퍼씨가 다행히 터키씨와 성질내는 포인트가 시간적으로 반대라 참을만하고 조화롭다며 쿨하게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이들에게 생강 과자를 전달하며 그들의 짜증을 중화시키고 있는 12살 꼬마인 진저넛까지 이렇게 완벽히 웃기는 조합이 또 있을까?
그러던 중 새로 들어온 바틀비라는 직원은 온순하고, 고요하고, 자리에 꼼짝없이 앉아 엄청난 양의 일을 해내는 아주 성실한 직원으로 가장 정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주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정말 집에 안 가고 꼼짝없이 앉아서 사무실을 무단 점거하는 것이다. 심지어 화자인 변호사가 사무실 이사를 간 이후까지도 말이다. (쫓아내지 못하여 변호사가 도망간..)
게다가 업무적으로도 문제가 있었으니, 주어진 일 이외의 잡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자가 우편발송이나 간단한 심부름 등 뭣좀 시키려고 하면
"저는 그것을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라며 쿨하게 거절한다. 게다가 저 말투는 당최 무슨 말투인 것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안 하련다~ 이런 느낌인가? 화자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 법도 하다.
잡무만 안 하는 게 아니라, 심지어 본인이 필사한 것을 검수하는 업무조차 끝까지 거절한다.
이 무슨 자신감인가??
가끔 나도 계약서를 다 쓴 뒤 두세 번 검토하며 느끼는 거지만 진짜 내가 쓴 글을 다시 두세 번 더 읽으며 오타 찾는 일이야 말로 지겹고 짜증 나는 일이다.
처음엔 바틀비가 단지 이러한 단순업무의 반복, 더블체크의 늪을 싫어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완벽주의자라 한 번에 다 맞게 썼다고 확신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궁금해 그의 필사본을 대신 검토 한 터키씨와 니퍼씨가 오류를 찾았을까 하는 기대를 했지만 그런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게다가 최종적으로는 주 업무인 필사업무조차 그만두어버린 바틀비의 행동들로 미루어보아 그것이 요점도 아니었고 말이다.
어떤 환경에서는 사회통념상 당연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도 이를 지속 반복적으로 주장하면 그러한 상황이 용인될 수도 있다.
처음에는 잉? 뭐지? 저 사람?라는 반응이며, 곧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비난을 받아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면, 모두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인양, 유령인양 그냥 공존시킨다.
근데다가, 이런 유령 같은 바틀비의 영향력은 꽤 컸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모두 바틀비의 말투를 옮아버린 것이다.
터키씨도, 니퍼씨도, 화자인 변호사마저.
"그냥 그를 내버려 두는 편이 낫겠다." 또는 아니다 그냥 "그를 밖에다 던져버리는 편이 더 낫겠다." 라며 서로서로 죄다 I would prefer ~ 를 쓰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진지하게 웃기다니.
결국 나중에 잡무가 아닌 본업조차 안 하는 편이 낫겠다며 필사도 내려놔 버린 바틀비.
그렇다고 퇴사도 안 한다. 사무실에 머무는 편이 낫겠다~ 란다.
미쳐버리겠는 상황에 화자는 그를 물리적으로 내쫓는 것은 신사적으로 절대 싫었기에 그냥 그를 이대로 사무실에 책상인 듯 무생물로 생각하는 편이 낫겠다며, 그대로 둔다.
이거 참, 이 말투 꽤나 유행이었을 것 같다.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바틀비가 지속적으로 하던 일은 사무실에서 창밖으로 멍하니 벽을 응시하던 일이었다. 만약 창밖의 풍경이 좀 더 희망적이고 예쁜 풍경이었으면 어땠을까?
우리는 무언가 화려한 영상이나, 황홀한 풍경을 바라보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예쁜 장소를 보면 가고 싶어지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어진다.
그러나 바틀비의 시야의 전부였던 벽은 있던 욕구조차 사라지게 할 단절, 끝, 차단을 의미했을 것이다.
변호사가 챙겨준 돈도 일체 건드리지 않고, 진저넛 몇 개 이외에 전혀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그는
의식주 같은 기본적인 욕구도 다 필요 없던 것이다.
왜일까.
도대체 어떤 것이 그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이끌게 한 것일까.
마치 문구점 앞 게임기에 동전을 넣고는 아무도 플레이하지 않아, 이리저리 치이며 벽 끝으로 밀려나서 결국 몬스터에게 죽게 되는 게임 캐릭터처럼.
그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부작위를 작위적인 의지로 보인 것일까.
그가 변호사 사무실 이전에 근무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배달불능 우편물 취급소의 환경이 그에게 플레이할 의지조차 없는 방치된 게임 캐릭터처럼 만든 것일까.
희망적 메시지, 도움의 손길들인 그 편지가 닿은 곳은 이미 “벽” , "끝", "죽음" 인 것을 보아서 그런 것일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쪽을 직접 선택했다.
결국 prefer no to라는 것은 다른 것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더 선호하는 쪽인 하지 않는 것을 의지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등바등 살아도 결국 그 끝은 벽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는 그랬던 것일까.
기왕 그렇게 될 거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 적어도 하지 않을 자유를 한번 주장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화자인 변호사도 사실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복잡한 소송이나, 골치 아픈 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며, 부동산 등기같이 안전한 업무로만 조용히 수입을 유지하며 신사적 품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창백하고 고요한 신사적인 바틀비를 내면적으로 이해하려 애쓴 화자는 자신도 어떤 열정적인 면을 잃었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음을 인정했기 때문 아닐까.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는 모두 일정하게는 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고 싶어 한다. 바틀비적인 극단치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정신없고 복잡한 세상에서 우린 자주 크고 작은 번아웃을 겪는다.
바틀비의 번아웃에 대한 화자의 처신에 대하여 이런 메시지가 느껴진다.
그를 무력적 방법으로 감옥에 넣는 사회에 대립하여, 화자처럼 조금이라도 그를 그 사무실의 일부 무생물로라도 받아들이고 공존하려 애써보라고 호소하는 것.
결국 화자에게 소중했던 직원들이었던, 터키씨와 니퍼씨 그리고 진저 넛 이들도 누구 하나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없지 않은가?
결국 우리들도 모두 바틀리가 될 수 있고, 그것이 많이 이상한 일도 아니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날 수도 있고, 환경적으로도 내 창 앞에 깜깜한 벽이 펼쳐질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꽤나 비극적인 이야기를 생각보다 희극적으로 풍자스럽게 표현한 것이 왜 이렇게 위로로 다가오는 것일까.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