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하는 건 괜찮겠지.
6시 반. 칼같이 컴퓨터를 끄고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점심은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은 탓에 거의 10시간 만에 쐰 바깥공기다.
1월 겨울의 한복판을 걸어 나가는 퇴근길.
하늘은 그저 짙은 밤안개에 휘감겨 검게 희뿌옇다.
아침에 올라왔던 언덕을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내려간다.
합병에 영업양수도에
이 계약서는 저걸 고쳐야 하고
저 계약서는 이걸 빼야 한단다.
도대체 이일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싶지만, 그래도 10년간 투덜거리면서 계속 해온 걸 보면 싫진 않은가 보다.
2026년 새해가 밝고 이젠 만 나이로도 빼박 40대로 진입해 버렸다.
내가 바로 그 유명한 영포티인가.
2-30대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수다(라 쓰고 회사 욕이라 읽는다)를 떠는 거 보면 아직 젊다고 우기고 싶다.
나름 회사 근처 맛집도 같이 다니고
먹기 전 예쁘게 찍어 인스타 스토리에도 올리니 말이다.
#신사동맛집 #가츠동맛집 @장소태그도 잊지 않는다.
그래도 이런 나이 먹음이 이제는 편안한 느낌이다.
커다란 설레는 순간들은 이제 다 지나갔다는 안도감.
이제 웬만한 일로는 호들갑 떨지 않을 수 있는 차분함을 갖추었다는 자신말이다.
오늘도 그렇게 차분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안고 조금은 천천히 걸어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마지막 내리막길.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 어딘가를 찾기 위해 연신 건물의 도로명주소판만 찾아 헤맨다.
점점 가까워지자 그는 올라오기를 거의 멈추어 서서 두리번 거린다.
그 두리번거리는 눈빛이
둥근 안경, 작은 키, 옷차림새가 왜인지 너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십 년 전의 네 모습이 아닌,
조금은 살이 오르고 푸근해진 네 모습으로
오랜만의 서울 방문인 듯 어딘가를 찾는 그 모습에서 네가 보였다.
‘아마도 저렇게 나이 들었겠지... 너도...’
강추위에 마스크 + 모자까지 쓴 나는 조용히 그 사람을 바라보며 스쳐 지났다.
그리고 그 찰나 서로 마주친 눈빛에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이 스쳤다.
네가 여기에 있을 리 없는데
너와 너무 닮아서
그렇게 긍정인지 부인인지 모를 혼잣말을 되뇌었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내가 거의 매일 올리는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본 사람 목록>에 언제나 있던 네 아이디를 보면서 말이다.
먼 훗날 어떤 이유에서든
그냥 사는 게 궁금해서든, 우연이든, 그리워서든
그냥 나의 흔적들이 흩어진 곳들에 찾아와 나와 우연히 마주치길 바라는 네 모습을 상상한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말도 안 되지만,
우린 언제나 그랬었으니까.
우리의 마주침과 헤어짐이 그랬던 것처럼
또 한 번 그런 영화와 같은 우연이 허락되길 상상해 본 오늘.
‘말도 안 돼’
다시 되뇌며 걷다 보니 지하철역 앞이다.
괜히 뒤를 돌아본다.
생각해 보니 아주 잠깐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던 것 같다.
모든 설렘이 끝났다고 단정 지어버렸던 이 나이.
어쩌면 과거를 먹고 살 나이에도
아직은 그 시절의 내가 내 안에 존재하나 보다.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