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르게 태어난 인간의 고찰
일요일 밤이었다. 하루 종일 즐거이 놀던 아이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학교 가기 싫어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7세 고시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학원이나 문제집 하나 하지 않는 천하태평하신 우리 2학년 따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하기 싫다'
아마 모든 인간이 가지고 사는 감정일 것이다. 다만 내가 지켜본 결과, 그 정도가 사람마다 다른 것 같기는 했다. 예를 들면 학교 가는 것, 출근하는 것, 아주 작게는 세수하거나 씻는 것까지. 어떤 이는 '해야 하니까'로 아주 응당 자연스레 해내는 반면, 어떤 이는 그런 작은 것들마저 꽤나 큰 힘을 드여야 할 수 있다. 바로 나처럼.
나의 부모님은 전자에 가까우신 분들로 매우 근면성실하셨다. 씻고, 청소하고, 일하는 등 해야 하는 모든 일들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했다. '씻기 싫어요.'라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더 누워있고 싶어요.', '일어나기 싫어요.', '더 자고 싶어요.' 이런 모든 말들이 그들에게는 외계어로 들리는 듯했다. 나는 그래서 나만 이렇게 게으른 정신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자라면서 보니 꽤나 많은 인간이 나와 같은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우리 같은 정신머리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마흔이 가까운 지금까지도 나는 '하기 싫다'는 감정을 다루는 것이 너무 어렵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라고 결론짓기엔 하기 싫은 일들이 대체로 가치 있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친구를 만나 진탕 놀고 온갖 생활 먼지와 얼굴에 얹어놓은 메이크업을 씻지 않으면 내 피부는 그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그 일은 하기가 싫다. 체력이라고는 1도 없는 비루한 내 몸뚱이를 일으켜 조깅이라도 하지 않으면 내 몸뚱이는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따뜻한 이불 밖을 나가기가 싫다.
도대체 왜 그럴까? 세상이 생겨먹은 게 그렇다.
노력 없이 얻는 것에는 가치가 부여되어 있지 않다. 그냥 세상의 이치란 것이 그러하다. 지금 당장 밖에 나가 주울 수 있는 돌멩이는 가치가 없다. 온갖 장비를 동원하여 땅 속을 뒤지고 캐내야 나오는 금은 말 그대로 금값이다. 세상은 가지기 어려운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치'는 '쓸모'이므로 높은 '값'이라고 해야 옳겠다.)
더욱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뇌 또한 그렇게 생겨먹었다. '노력 정당화(Effort justification)'라고 들어보았는가. 인간의 뇌는 새빠지게 고생해서 얻은 것이 가치가 없으면 빡치므로 새빠지게 노력해서 얻은 것들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30년 근속하여 얻은 퇴직금은 함부로 쓰지 않으면서 복권 당첨금은 펑펑 쓰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같은 돈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뇌의 인지부조화가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경우가 많다. 입에 달고 좋은 것을 계속 넣다 보면 육체는 망가지고 괴롭지만 헬스장에 가서 무게를 한 번이라도 더 치면 육체는 건강해진다.
이쯤 되면 '왜'라는 질문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냥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어느 정도 득을 볼 수 있게, 세상이 그렇게 생겨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고 싶고 쉬운 게 좋은 일일 수는 없는 거야?'라고 묻는다면, 쭉쭉 빵빵 몸매가 되는 것이 되기 쉽고 하기에 좋은 일이라면, 쭉쭉 빵빵은 더 이상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 세상이 그렇고 인간이 그렇고 이치가 그러하다. 다만 문제는 이것을 내가 어떻게 9세 아이에게 이해가 되도록 잘 전달하느냐에 있다.
"... 그냥 가야 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있어.
엄마도 설거지가 하기 싫고, 출근도 하기 싫은데 안타깝게도 세상 이치가 그래. 어쩔 수가 없어."
전달이 잘 되었으려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