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시각으로 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운수 좋은 날>
※ 본 공연에는 스토킹 범죄와 가정폭력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테/운수>는 베르테르가 사랑했던 여인 ‘로테’와 김첨지의 아내 ‘운수’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각각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운수 좋은 날>에서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로, 연극에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과 주변 인물들의 외면을 마주하는 이들의 감정에 주목한다. 남성 주인공의 관점에서 사랑이라고 해석되어 온 기존의 로맨스 서사를 여성의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사랑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 속 제대로 듣지 못했던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여성이란 존재가 배제되고 스토킹과 가정폭력 등의 범죄가 미화되는 형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해석된 <로테/운수>는 스토킹을 당하는 와중에도 자기 삶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로테’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하고 법정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운수’ 단둘만이 무대에 오른다. 이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였던 범죄를 낱낱이 폭로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혹은 젊은 베르터의 고뇌)은 괴테의 첫 소설로, 실제 자신의 실연 체험과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예루잘렘이 유부녀에게 실연당해 자살한 사건을 소재로 쓴 작품이다. 당시 독일의 경직된 사회와 관습에 몸부림쳤던 사람들은 베르테르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슬픔과 귀족 사회에 대한 울분에 공감하며 열광했다. 그 선풍적인 인기는 ‘베르테르 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괴테가 풀어나가는 소설의 중심 소재가 사랑이기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베르테르의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한 개인이 희망 없는 사랑에 대한 절망으로 자살에 이르게 된 이야기를 ‘사랑’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해석하여 그의 죽음을 낭만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또한, 서간체 소설이라는 형식 때문에 그의 이야기에 더욱 귀 기울이며 안타까워한다. 사적으로 쓴 편지는 개인의 깊고 은밀한 심리를 볼 수 있으며 감정의 솔직한 흐름을 담아낸다. 베르테르가 사랑에 빠지는 단계들에서 나타나는 심리가 생생하게 묘사된다. 따라서 우리는 베르테르를 한 여인을 절절하게 사랑해서 죽은 청년으로 이해하고, 그가 자살하면서까지 사랑했던 로테에 대한 어중간한 태도를 비난하기도 한다.
“잠시라도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베르터!” 로테가 말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고, 일부러 파멸을 자초하고 있다는 걸 모르시나요? 하필이면 왜 저예요? 저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당신의 소망이 더더욱 자극을 받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요.”
- 『젊은 베르터의 고뇌』, 12월 20일 중, 창비
그러나 우리는 로테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독자는 서간체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서 서술자인 베르테르의 목소리만 들을 뿐 그 이상을 볼 수 없다. 시야가 차단된 채 베르테르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을 받아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로테는 베르테르의 시선 속에서 존재하고 해석되고 번역되어 나타난다. 베르테르의 과잉된 감정적 주관주의에서 비롯된 자기중심적인 사랑 이야기에서 로테의 존재는 지워진 것이다. 우리는 로테에게 베르테르의 존재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로테가 베르테르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야기에서 그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로테를 잃어버린 것이다.
연극은 이러한 부분을 파고들어 감춰져 있던 로테를 드러냈다. 또한, 약혼자가 있는 로테에게 관심을 보이고 곁에 있으려 했던 베르테르의 행동을 스토킹으로 보여주었다.
티끌 없는 하얀 방에 로테가 들어와 앉는다. 곧이어 타이핑 소리가 나면서 상담사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묻는다. 로테는 대학 교수로 비교적 완벽한 삶을 살아오다 장미꽃 한 송이를 받은 이후, 스토킹을 당한 이후부터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음을 호소한다.
남자친구가 외근 간 사이, 로테가 좋아하는 푸른 리본으로 묶인 장미꽃이 3일 내내 문 앞에 놓인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남자친구, 경찰, 엄마에게 알리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허무했다. 범죄 행위나 다름없는 스토킹을 인기의 척도로 생각하고 대단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가만히 있는데 스토킹을 당했겠냐며 로테를 다그치고 네가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무대 위 화이트 큐브 같았던 공간이 검은색으로 채워진다.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던 로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집 안에 카메라를 설치한다. 며칠 동안 문 앞에 장미꽃이 놓여있지 않은 것을 보고 안심하며 집에 들어간다. 스토킹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문을 열고 집에 발을 들이자, 위에서 툭- 장미꽃 다발이 떨어진다. “X발”
스토킹의 범인이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 베르테르라는 사실이 밝혀진 다음부터는 몰아치듯 진행된다. 소송을 진행하겠다는 로테의 말에 학생이 좋아해서 그런 건데 봐주라는 중년 남성인 경찰, 그저 좋아해서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고백하는 베르테르 그리고 사건의 전말을 알면서도 기껏 찾아와 자신이 지켜주겠다며 프러포즈하는 남자친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각자 자기의 이야기만 하는 이들에 분노가 차오른다.
소송은 그대로 진행되고 로테는 자신을 사로잡던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나 파란 리본으로 묶인 편지에 베르테르의 질척한 마음이 적힌 편지를 받은 다음 날, 베르테르가 자살했다. 유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며 절절히 사랑했노라고 고백하면서 말이다. 이에 그의 정신적 고통은 악화된다. 그래도 괜찮아지기 위해 잘살아보기 위해 학업에 더욱 집중하고 여러 학회에 다니면서 발표하고 여행도 다닌다.
“선생님, 저는 미친 게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정말로 괜찮고 싶었어요.” 우리는 이미 하얀 방에서 상담사와 함께 있는 그를 보았다. 처음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닥이 온통 검게 칠해져 오직 소파 위에만 서 있을 수 있게 된 그의 상태였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로테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었다. 검은 먹은 무대를 한 칸씩 채우다 마침내 그를 꼼짝할 수 없게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정말로, 정말로 괜찮지 않았다.
결국 로테는 방을 벗어나 자살로 이야기를 끝냈다.
<로테/운수>에서 로테의 이야기는 스토킹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작에서 ‘사랑’이란 이유로 약혼자가 있는 로테에게 다가갔다가 멀어지고 다시 곁에 있으려 했던 베르테르는 스토커로 나온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베르테르의 시선으로만 전개되어 알 수 없었던 로테의 목소리를 여성주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한 남자가 유서에 약혼자가 있는 한 여자의 이름을 적고 자살했다면, 그것을 그 여자에 대한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왜 안 만나줘”라는 단어를 인터넷에 검색하면 수천 건의 기사가 뜬다. 사랑한다고 말하던 남성이 스토킹을 시작으로 방화부터 불법 촬영물 유포, 협박, 살인까지 저지르는 기사가 이제는 너무 흔하다. 스토킹은 타인의 의사에 반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타인에게 공포와 불안을 반복적으로 주는, 엄연한 범죄 행위이다. 그러나 ‘사랑’을 했을 뿐이라는 남성 가해자들은 쉽게 용서받아왔다.
물론, 사회적 인식이 성장함에 따라 스토킹에 대한 규제가 만들어지고 처벌이 강화되었다. 분명 과거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것이지만, 아직 멀었다. 실제로 스토킹 기사를 읽어보면 가해자들은 스토킹으로 처벌받는 경우가 별로 없다. 스토킹이라고 신고를 받아도 이전에 스토킹 이력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돌려보낸다. 지속적인 스토킹으로 인한 주거침입에 이르러서야 조치를 한다.
스토킹을 심각한 범죄라고 여기지 않는다. 타인을 집착적으로 쫓아다니는 행태를 낭만적인 일인 것처럼 해석한다. 극 중 로테의 남자친구가 스토킹 당하는 로테에게 “인기가 많네.”라고 하는 말과 경찰이 “학생이 좋아서 한 거지. 다른 이유는 없을 거예요.”라고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심지어 베르테르는 상대도 나를 좋아하고 있거나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일방적인 환상을 가지고 접근한다.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들이 ‘사랑’했기 때문에 저지른 수많은 범죄 앞에서 여성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베르테르가 사랑 때문에 죽은 거라면, 로테는 무엇 때문에 죽은 걸까? 누가, 무엇을 사랑이라고 해석해온 걸까?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