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장님들의 운영위원회
지금도 10명의 마을 촌장님들과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어색함. 그리고 설렘.
마을 공부방은 공부방이 위치한 마을을 포함하여 주변 둘러쌓고 있는 이웃 마을까지 열 개의 마을의 주민들을 위한 것이다. 공부방에 관련된 활동들을 만들고 운영하기 위해서 각 마을의 촌장님들이 모여서 운영위원회를 만드셨다. 가장 젊은 촌장님이 40대 중반이었고, 나이가 많은 촌장님은 80세가 넘은 분도 계셨다.
영어로도 말을 많이 해 보지 않은 한국 토박이가 미리 준비해 놓은 대본을 확인하며 영어로 말을 하고, 그것을 말라위 친구가 치체와어로 통역을 해주며 그렇게 첫인사를 했다. 마을 촌장님들 중에서 내가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분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활동 중인 음폰다 마을의 촌장님, 단 한 분이었다. 눈빛으로, 온몸으로 말을 하고, 반응을 보이며, 우리가 운명 공동체가 된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공부방 운영위원회는 공부방에서 어떤 활동을 할지, 또 그것을 펼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논의하고 결정한다. 초기에 운영위원회 미팅의 참석자는 마을 촌장님 10명, 나, 그리고 초기 나의 조력자 A 씨, 그리고 A 씨의 딸이자 공부방 어린이집 교사이자 나의 통역가였던 파니, 이렇게 구성이 되었다. 나중에 조력자 A 씨의 지난 2년간 촌장님들에 대한 ‘만행과 꼼수’를 알아차린 후에는 외부 조력자를 두지 않고 마을 운영위원회와 공부방 선생님들로 모여 회의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회의하는 날짜도 들쭉날쭉 논의할 사항이 있을 때만 모이는 식으로 운영을 해서 다 맞는 시간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논의 사항이 있든 없든 매주 금요일에 꼭 한 번씩은 모이자고 제안을 했다. 처음엔 모두가 어리둥절해했다.
‘매주 만나서 뭐해?’
‘미팅 가면 뭐 먹을 거라도 좀 주나?’
‘농사 지어야 하는데’
이건 팀워크를 만들기 위한 나의 전략이었다. 누군가가 논의를 하자고 제안을 하는 것도 좋지만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 아닌 모두가 주인이라는 인식이 생기려면 ‘하늘이 무너져도 미팅은 나간다!’라는 마음이 먼저 새겨져야 한다고 믿었다. 안타깝게도 지난 2년 동안 허황된 조력자의 방해로 자신들의 권위와 능력을 상실했다고 느꼈을 촌장님들이 스스로가 마을의 리더이고 주인이라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길 바랬다.
그렇게 전 조력가 A 씨는 지난 활동가가 현지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믿는 것을 이용해서 정작 운영위원회의 의견을 듣지 않고서 소위 ‘갑질’을 했던 것이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다. 그 문제가 전적으로 그의 도덕성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그리고 그도 한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계속 그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작별 인사를 했다. 정신적으로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지만 그게 맞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말라위는 나를 세 번이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첫 5개월, 그 뒤에 1년, 그리고 마지막 11개월.
처음 내가 말라위를 떠날 때 가장 아쉬워하고 섭섭해하던 사람들은 촌장님들이었다. 내가 다시 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잠시의 떠남도 아쉬워서 송별회까지 열어주셨다. 송별회에서 사회를 보단 음폰다 촌장님이 눈물을 보였다. 마을에서 성인 남성이, 게다가 촌장의 위치에 있는 남성이 마을 주민들이 다 모여 있는 행사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흔하지 않다. 5개월 알고 지낸 한국 젊은이에게서 그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내가 활동을 연장하겠다는 결심은 나를 옆에서 가장 많이 도와주고 지지해준 촌장님들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마침내 떠나도, 마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다. 그들이 힘을 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내가 거기서 더 있을 이유가 없다. 사람 사이 일이다 보니 위기와 갈등의 순간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매주 만나고, 논의를 하고, 이런 시도도, 또 저런 시도도 해보며 우리는 신뢰를 키워 나갈 수 있었다.
정말 마침내 말라위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떠날 때, 촌장님들은 좀바 시 국회의원에게 나를 공항까지 마중 갈 수 있게 미니버스를 빌려 달라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우리 공부방을 방문한 적도 있는 그 국회의원분이 기름값만 우리가 내면 되는 조건으로 차를 빌려주었다. 공항에 가는 날 새벽 4시, 산골 곳곳에서 촌장님들을 한분, 한분 태우고서 5시간을 달려 수도 릴롱궤의 국제공항까지 함께 갔다. 공항 팻말이 보이는 데서부터 나는 한참을 울었다. 우는 내 모습에 촌장님들은 더 강한 모습을 보이시며 나를 따뜻한 미소로 달래주셨다.
완전하게 서로를 언어로 이해할 수 없고, 우리가 함께 한 시간도 우리의 인생에서 긴 시간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함께 마을에서 만들어낸 변화는 우리의 가슴속에 뜻깊었던 만남으로, 시간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