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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애 Jan 11. 2021

파울라 모더존 (손)-베커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보이는 것을 그린 화가  

얼마전 파울라 모던손-베커의 2002년 브레멘 갤러리 (Bremen Kunsthalle)에서 진행된 전시 카탈로그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탐색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로셀리우스 소장의 파울라 모더손-베커 작품 전시 (카탈로그), 브레멘에서 인쇄, 보르프스베르데 출판사, 2002



사족을 달자면, 우리나라에선 공식적으로 파울라 모더'존'-베커 로 읽히지만 독일어 이름으로 부르면 파울라 모더'손'-베커로 읽어야 맞다. 앙리 마티스가 헨리 마티세가 아닌 것 처럼... 불어, 영어, 독일어로 그녀의 이름을 읽어봤는데 어느 언어로도 '존'으로 발음되지 않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녀의 이름보다 그녀의 카탈로그 커버 작품에 사로잡힌 나는 구매를 결심하게 되었고, 그 계기로 작가인 파울라의 생애에 대해서 이전에 비해서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기쁘게했다. 독일 베를린에  2년째 있는 나로서는 그녀의 생애 관련된 다큐와 참고 영상들을 독일어로 보는 것도 큰 흥미 자체였다. (물론 공부하는 마음으로 매우 느리게, 선택적으로 보았지만 말이다.)


이 카탈로그를 받자마자 나는 판매자에게 인증샷을 찍어 보내주며 감사인사와 새해 인사를 전했다. 우리나라로치면 중고나라같은 독일의 국민들이 모두 이용하는 중고 물품 교환 및 구직 사이트를 통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F씨는 파울라의 작품과 생애가 들어간 하드커버 책도 판매중이었는데, 값이 조금 비싸 보여서 포기를 했다.


그런데 웬걸, 며칠 뒤에 F씨의 이름으로 또 다른 소포가 하나 도착했다. 사실은 이름만 보고는 당장에 누구인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소포를 끌러보기도 전에 무언가 직감적으로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건 바로 내가 비싸서 못 샀던 파울라의 책이었다! 소포 포장지에는 손수 그린듯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그림의 스케치가 그려져있었다.


나는 '당연히' 감사의 인사를 중고사이트 쪽지 내역에 있는 그와 나의 대화창을 찾아서 감사인사를 다시 전했다. 혹시 택배비라도 내가 보탤 수 있는 게 있으면 보태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장이 왔다. 

"중고 판매 사이트에서 당신처럼 친절하고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어요.
당신이 나의 카탈로그를 받고 좋아하는 것에 저도 행복해졌습니다.
멋진 한 해 보내길 바라며... 당신과 당신의 파트너에게, F "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그것을 정직하고 겸손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 타인에게 감동을 주고, 나아가 기대치도 않은 이런 선물을 받게 되어 너무나 나에게도 너무나 감동이었다. 타인과 멀고 가까움을 떠나서 친절하고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매 순간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의미있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더 활짝 열려있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번에 소장하게 된 책과 카탈로그를 계기로 그녀의 삶과 작품의 의미와 특징들에 대하여 여러 매체를 통해 공부하게 되었는데, 영화,책, 기사, 블로그, 그리고 아트 앤 컬쳐에 소개된 파울라에 대한 생애와 작품에 대한 텍스트까지 영어와 한국어를 오가며 공부한 것에 대하여 여기서 소개하고, 그녀에 대한 나의 감상도 나눠보고자 한다.


파울라는 독일 예술가들 중에서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나비파등의 작품들을 발견한 첫 번째 예술가 중 한명이다. 그녀는 400 여점의 인물화 중에서 2/3 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그린 것이였는데. 그 중 소녀들을 그린 게 가장 많았고 자매들의 그림, 그리고 엄마와 아이의 그림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의 그림에서 특징은 인물의 골상, 윤곽이 단순화된 형태로 그린 것인데, 이를 통해서 철저히 구조화된 전체성을 띤 그림을 위한 설정이다. 그녀의 예술적 목표는 "가장 친밀한 관찰의 힘으로 무장된 최적의 단순성을 위한 노력(1902년 2월 20일, 파울라 일기장에서)" 이었다.


보르프스베르데에 근거지를 두고 한, 두 달 씩 파리를 오고가며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었던 파울라에게그런 학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작품 세계에 몰두하게 만드는 계기가 있었다. 그건 조각가이자 사업가였던 번하드 호이트거 (Bernhard Hoetger)가 그녀의 작업실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 모든 작품들은 정말 대단해요, 당신 스스로에게 항상 진실되세요, 그리고 학교는 그만두세요". 이때부터 그녀는 아케데미에 가지 않고 스스로 모델들을 자신의 스튜디오로 데려와서 더 자유롭게 작품을 그렸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시기동안 약 서른 여점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중에 많은 작품들이 1905년과 1906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그녀는 파리로 완전히 이사를 가려고 계획을 한 시기이기도 하다. 결혼 5년차가 되어서야 그녀는 의지할 곳은 그녀 스스로밖에 없다는 것을 뼛속 깊이 받아드렸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 대한 관점이 초상화들을 보면 반영되어 있다. 또한 폴 세잔과 폴 고객의수많은 자기 초상화들도 자기 반성의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파울라 모더손-베커 미술관, 브레멘 Bremen

파울라가 1907년에 출산을 한 지 20일이 안 되어 산후 색전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녀가 죽기 전에 그녀가 그린 초상화와 가장 시대적 탁월함이 드러나는 작품들은 주로 1906년 파리에서 그녀가 그린 작품들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당시에 파울라는 폴 고갱의 작품들로부터 (1905년) 영향을 받았음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잘 알려져 있으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고대 이집트의 원시적 미술에서 나오는 단순성에 큰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폴 고갱이 아이티를 가서 그린 현지 여성들의 누드화는 파울라가 그린 자화상과 기술적인 면과 색감 등에서 비슷한 것이 많은데, 고갱이 다소 여인들을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을 표현했다면 파울라의 누드 초상화에서는 다소 차분하고 홍조를 띠는 안정감있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 시기 파울라의 누드상은 서양 회화 미술 역사상 첫 누드 자화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Arearea (Joyfulness), 1892 폴 고갱

Paula Modersohn-Becker, Self-Portrait Nude with Amber Necklace, 1906, oil on cardboard 

위 '호박 목걸이한 반신상화'는 파울라가 처음으로 그린 두 개의 누드 초상화 중에 하나이며, 1906년 파리에 머물 당시에 그해 여름에 그렸다. 후기 인상주의 폴 고갱의 아이티 여성들의 누드화와 차별화되는 점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 했었는데, 위 작품을 이렇게 보고 있자면 그 말이 무엇인지 더 확실히 다가오는 것 같다. 파울라에게 자연과의 동질감으로 상징되는 꽃송이를 양 손에 하나씩 들고서, 화려하면서 묵직한 호박목걸이를한 그녀의 모습은 신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뒷 보타닉 배경에 하얀 꽃들과 그녀의 머리위에 놓인 꽃 세송이로 머리를 장식한 것에까지 작품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그녀의 세심함과 동시에 단순화를 통한 특정 이미지나 상징성이 우러난다. 무엇보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 살짝 올라간 입고리가 두려움이나 경계심보다는 순박하면서 수줍기도 한듯한 인상을 풍긴다. 


1906년 파리에 간 파울라는 영영 보르스베르데로 돌아오지 않을 마음으로 떠났다. 물론 현실은 그 다음해 일찍 그녀를 찾으러 파리까지 온 남편 오토를 따라 다시 돌아가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 시절, 짧게 파리에서 혼자 머물면서 파울라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난 누군가가 되어가고 있어 - 내 생에 가장 강렬하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 

1906년 파리에서 친언니 밀리 로란드-베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I am becoming somebody – I’m living the most intensively happy period of my life”

Paula Modersohn-Becker in a letter to her sister Milly Rohland-Becker in 1906


그녀의 정물화 still-life paintings 그림들은 폴 세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시기적으론 자화상을 주로 그린 그녀 생의 말년보다 더 앞선 시기들이다. 

특히 그녀는 생을 마감하기 직전 한 해동안 꽃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녀에게 꽃은 자신과 동류된 자연에 대한 감정과 그녀의 장식에 대한 재능과 관련이 있다. 특히, 그너에게 꽃은 맑은 영혼의 상징이었다. 


참고 텍스트: https://artsandculture.google.com/exhibit/paula-modersohn-becker-kunsthalle-bremen/UAKCairRWHB0KQ?hl=en"


지푸라기 모자를 쓴 오토 모더손, 1905

파울라 모더손-베커를 

공부하기에 좋은 자료 추천

1. 아트 앤 컬쳐 Artandculture.google.com  

위 텍스트는 파울라에 대한 연구를 여러 매체를 통해 하다가 마침내 그녀를 그녀의 작품과의 관계속에서 가장 잘 이해하고 비교하기 쉽게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위의 해당 링크를 통해 그녀의 생애 설명과 관련된 대표 작품들을 함께 한 눈에 쭉 훑어보기엔 매우 좋은 리소스가 될 것이다. 특히 아트앤커쳐는 앱도 있어서 파울라 뿐만 아니라 건축과 예술 등 전반적 예술사와 인물들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있기에 단단히 시간을 확보하고 제대로 둘러보는 것도 큰 공부가 될 것이다. 


2. 영화 <파울라>

https://www.youtube.com/watch?v=mXegTcCiQr8

오토 모더손 (왼쪽), 파울라 모더손-베커 (오른쪽)

파울라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으면서 시각적으로 자극을 받은 것은 영화 <파울라 (2017)>였다. 영화는 독일에서 제작, 독일어로 만들어졌기에 세월의 갭을 넘어 현실감이 더 드러나 몰입이 잘 되었다.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유튜브에서 영어 자막이 있는 트레일러를 링크로 달아두었으니 한번 들어가서 약7분짜리 영상을 보고나면 나와 같이 더 많은 궁금증과 사료(?)를 찾아 헤매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쩜 영화를 다운 받아서 전체를 다 보고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아님... 독일어 공부를 당장에 시작하게 될지도... 


다만, 참고할 점은 영화는 당시 1900년대 초반 유럽 현대 예술이 막 피어오르는 무대에서 여성 예술가들의 열등한 위치와 수모를 파울라의 삶의 굴곡과 구체적 이벤트들을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다. 즉, 영화의 극적 요소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 실제 그녀의 생애와 다르게 각색된 부분이 있으니, 영화를 보고 파울라의 인생을 다 그대로 보았다고 믿어서는 안되겠다. 다만 영상이 너무나 아름답고, 오늘날 그림을 그리고, 예술을 하는게 남성의 특권이라는 인식이 과거에 비해 전면에 있지 않은 오늘날 그 시대를 읽고 비교해보는 것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한 가지, 특히 현실과 다르게 설정된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그녀가 파리에 몇 년 정착해서 산 것처럼 그리는 부분이다. 그러나, 실제로 파울라는 1906년 홀연히 밤에 짐을 싸서 오토와 그의 딸 몰래 파리행을 선택하기 전까지는 1901년부터 1906년까지 4차례 정도 중-장기 (1달에서 반년 사이)로 파리에 다녀오고, 주거지는 결혼생활을 했던 보르프스베르데로 알려져있다. 


3. 보르프스베르데 예술가 집단 콜로니 Worpswerde

https://worpswede.de/

보프스베데에 가면 볼 수 있는 파울라 기념상 

보르프스베르데는 독일 북부 작센 (Saxony) 주의 브레멘 시에 속한 작은 타운에 있으며, 자연과 예술이 조화 공생으로 유명하다. 


파울라의 인생에서, 그리고 사후에 그녀에게 가장 의미가 깊게 새겨진 곳이라고하면 바로 보르프스베르데일것이다. 그녀의 남편인 오토와 당대 유명 남성 화가들이 공동으로 세운 이 예술가 집단 거주지는 오늘날 당대 어떤 예술가들보다 파울라 덕분에 독일의 예술사에서는 가장 알려진 예술가 마을로 알려져있다. (베를린에서 살고 있는 나도 올해 꼭 우리의 30년 먹은 카라반을 타고 놀러 갈 계획을 세웠다.) 

다소 무료하고 공허하면서도 전원적인 자연이 그 고유의 색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작은 시골 마을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독일 시인이자 당대에도 이미 널리 인정받았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그의 부인이자 조각가였던 클라라와 2년 동안 (다른 곳을 오고 가면서) 여기 머문 것으로 알려져있다. 

왼쪽, 클라라 릴케-베스트호프 초상화 /오른쪽, 라이너 마리아 릴케 초상화, 1906


그녀는 마리에 릴케의 부인 클라라와 매우 절친이었으며, 릴케와도 친한 친구였다. 그녀가 그린 릴케의 초상화도 매우 유명한 작품인데 그건 당시 릴케가 이 집단 거주지 마을인 보르프스베데에 머물면서 교류하던 때를 드러낸다. 

클라라도 파울라의 초상을 청동 작품으로 남겼는데, 파울라의 요절에 큰 충격과 슬픔에 잠긴 릴케는 그녀를 그리며 진혼곡을 남겼다. 하지만 릴케는 파울라가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여성이라고 말한적도 있으며, 파울라와 처음 만난 날을 특별히 생각하여 쓴 일기 기록에도 둘 사이 우정이 애틋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파울라의 첫 파리행이 가능했던 것이 릴케가 자금을 대어주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릴케는 이렇게 말했으며,: "그녀(파울라)는 보르프스베데의 물체와 사물들을 그렸는데, 그 어느 누구도 그녀처럼 보거나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혼곡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가있다: 

“그대는 이해한다. 가득한 과일들을. 그대는 과일들을 접시 위에 얹어 놓고 그 빛깔로 그 무게를 가늠했다. 또한 과일을 바라보듯이 여인들과 아이들을 바라보았으며 그들은 그처럼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와 그 존재의 형태가 됐다”(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파울라 모더존 베커를 위한 진혼곡’ 중에서)


다음은 파울라가 생전에 직접 남긴 말이다.


“내가 아는데 나는 아주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픈가? 축제가 길다고 더 아름다운가? 내 삶은 하나의 축제, 짧지만 강렬한 축제다. 마치 내가 나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에 모든 것, 전부를 자각이라도 해야 하듯이 나의 감각은 점점 더 예리해진다. ... 그러니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 안에서 사랑이 한 번 피어나고 좋은 그림 세 점을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손에 꽃을 들고 머리에 꽃을 꽂고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나겠다”(파울라의 일기 중)

출처 : 인천투데이(http://www.incheontoday.com)


보다시피, 파울라는 신기하게도 살아 생전에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너무나 안타깝게 서른 한살에 요절했지만 그녀는 15년이란 작업 기간 동안 700점이 넘는 그림과 1000점이 넘는 소묘와 판화를 남겼다. 죽기 직전에 그녀는 이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아, 아쉬워라"




참고/ 추가 자료


https://www.amazon.com/Rilke-Die-schnsten-Gedichte-audiobook/dp/B00T5UAAEC 

- 현재 보르프스베데 예술가의 마을은 하인리히 폴게러의 증손녀 다니엘라 플라츠가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당시 그의 증손 할아버지의 동료였던 마리에 릴케에 대한 오늘날 가장 뛰어난 해석자로 독일의 배우 울리히 투커를 지목한다. 나의 독일어 공부를 위한 자료로 써봐야지. 영감이 마구마구 샘솟을 것 같다. 


아래 두 권은 파울라 모더손베커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번역 도서 두 점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626687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389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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