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생의 한가운데'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의 대표작 (전혜린 님 옮김)

by 한지애

이라는 단어, 나에게는 듣기만 해도 흥분되고 설레는 한 글자이다. 이 한 글자가 주는 명료함과 단순성과 대조적으로 ‘생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생의 다른 결을 갖고 있다. 마치 우리의 지문이 각자 고요하게 갖고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나라는 사람을 다른 누군가와 구별시켜주는 것만큼이나 우리의 생은 그렇게 다 다르다. 이 책에서 니나는 우리에게 그 ‘생’이라는 것이 그녀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녀가 생 가운데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려준다. 특히, 니나는 생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끈질기게 파고드는 행위를 통한 의지에 대해 강조한다. 진정 우리는 가보지 않은 이상,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다.

한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모든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지금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 살려고 ‘선택’하고 있는 것 아닐까? ‘

모든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생’을 끝내는 것만이 그 고통과 불행을 다 씻어줄 것 같지만, 결국 ‘생’을 끊기란 쉽지 않다. 불행한 결혼 생활과 원치 않던 임신으로 스스로 생을 끊기로 결심했던 니나는 그 죽음의 끝자락에서 가장 강한 생의 힘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만큼 생의 의지가 강한 것이다. 모험심과 생에 대한 의지는 필연적으로 니나에게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마저도 본인의 자산임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니나의 아주 작은 특징까지도 놓치지 않고 꿰뚫고 있던 슈타인 박사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니나가 자살과 관계하기에는 너무 멀리 놓여 있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니나처럼 몸소 경험하지 않고서도, 우리가 생을 매 순간 더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오늘 하루도 우리가 살기로 마음먹었다는 다짐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편, 의사로서 남부럽지 않은 시대적 지성인인 슈타인은 왜 죽음의 순간에 이르고서야, 그의 생의 원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그의 종말이 다가온 시점에 그가 생각하는 그의 원죄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것이 그가 결단을 회피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무수한 선택의 연속이다. 그가 내릴 수 있었던 결단이란 무엇이었을까? 니나에게 과감하게 고백하는 것? 니나가 그를 떠나고 돌아왔을 때마다 다시 받아주지 않는 것? 어쩌면 니나라는 존재를 떼어 내고 완전하게 슈타인이라는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 아니었을까? 그는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니나와 자신의 생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 점이 그가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니나를 사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슈타인 본인은 니나가 없는 시간 마다 휘청거릴 때, 정작 니나는 그녀의 생을 너무도 충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것이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든, 정열과 환희의 순간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슈타인이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생의 한가운데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마지막까지도 결국 그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다다른 ‘종말’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꼬리 같은 희망은 실현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생 동안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해서 제대로 결단을 내려보지 못한 슈타인의 인생을 보자면, 반대로 평생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보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니나에게는 오히려 희망적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낭만적이고,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현실 안에서 우리가 그 사랑을 지속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니나가 자신의 생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타인보다 자신의 삶에 집중을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니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분하게 그가 갖고 있는 우월한 또는 매력적인 특성들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떤 타인을 그 자체로 사랑한다는 것은 믿기 힘든 만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한편, 니나와 슈트만의 18년 간 이어진 관계에서 그들이 의사와 환자로 만났다는 설정 역시 독특하다. 슈타인이 의사이고, 니나가 환자라는 것 말이다. 실제로 누가 누구에게 위안을 주는가를 보자면, 슈타인은 환자인 니나를 통해서 생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운다. 결정적인 순간에 슈타인은 니나에게 필요한 처방을 해주고, 할의 독약을 제조해 준다는 점에서 그는 충분히 기능적으로는 ‘의사’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생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니나가 내린 과감한 ‘결단’에 따라 수행하는 껍데기일 뿐이다. 생의 한가운데서 목숨을 걸고, 그 뒤에 올 결과를 감히 예측하지 못하는 채 결정을 내리는 것은 온전히 니나의 몫이다. 슈타인은 그 안에서 어떠한 중요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 생에서 의사와 환자의 구분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슈타인의 인생이 나는 더욱 안타깝다. 결국 그 약했던 생이라고 할지라도, 객관적으로 더 위대하고, 용기 있는 생은 있을 수 없음에도, 니나라는 절대적인 존재에 대하여 자신의 생을 끊임없이 비교해온 탓에 슈타인은 자신의 생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어떤 누구도 환자도 의사도 아니었는데, 왜 그는 그의 생을 약자의 생으로 인식했을까?


할과의 결혼에 있어서 니나는 결혼 전부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두 번이나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생의 흐름과 운명에 자신을 맡긴 것이다. 그리고 할이 투옥되어 처형되기 전에도 그녀는 그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할에게는 젊은 여인이 있었고, 이미 둘은 부부로써의 인연을 다 한 뒤였지만, 니나는 그의 명예로운 결단 앞에 할의 편이 되어주었다. 그 행동은 니나 자신의 목숨을 걸었어야 할 만큼 중대하고,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생에 온 몸을 던졌다. 그 결과가 어찌되든 말이다.


이 글에서 작가 린저의 페르소나는 당연히 니나이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작가는 이 글을 통해서 전쟁이라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이 인간 개인의 내면과 인식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세밀하고 복잡하게 그려내고 있다. 니나가 이 책 안에서 작가로 등장하면서 쓰는 소설 속의 주인공인 한나는 바로 작가 린저의 제 2의 페르소나이다.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바로 한나가 수용소로부터 막 해방이 된 이후 동지들에게 외치는 이 두 마디이다.

“우리는 자유야!” 한나는 외쳤다. “우리는 석방증명서도 갖고 있잖아.”

그렇다. 한나가 말 한 것처럼 ‘석방 증명서’는 그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는 유일한 자유의 징표이다. 이 징표는 더 이상 포로들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위험 속에 덜덜 떨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에게 이 구절은 이 상황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뿐만 아니라, 얼마나 이 표현이 어리석고 모순적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그런 가슴 아픈 구절이었다. 사실 ‘전쟁’이라는 시대적인 상황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석방증명서’ 따위가 없어도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니나가 쓴 소설의 장면에서도, 한나와 동료들은 석방증명서를 보기 전에 옷과 빵을 보고서야 그들이 자유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즉, 그 차갑고 얇은 종이 한 장이 그들을 자유라는 것을 믿도록 하기에, 그것은 너무 인위적이고 장치적인 것이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대비시켜 볼 수 있었다.


한편, 막 석방 증명서를 손에 쥐어 든 그 시점에 늙은 여 포로가 총성에 그만 심장마비로 죽는 장면 역시, 전쟁이라는 실재하든 실재하지 않는 그 존재가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무기이며, 죄가 되는 지에 대해서 부수적으로 알려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랬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한나는 그녀가 나치군을 치료할 때도 그들이 군인으로서 지었던 죄를 묻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 즉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의무를 다 할 뿐인 것이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소설 속에서 니나가 대학교의 한 강의실에서, 그리고 언니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니나는 생사를 결정짓는 것을 인간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혐오를 당당하고 큰 목소리로 울부짖는다. 동시에 그녀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때론 선과 악을 구분 할 수 없는 그런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속성을 갖고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며, 자조적인 말을 남기기도 한다. 이러한 자조적 표현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작가 린저가 실제 삶에서 전쟁을 겪으며 전쟁 이후 인류의 반성과 후회에 대한 한 줄기 희망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결국, 니나가 이 책 안에서 쓰는 소설의 내용은 비록 전체 소설에서 매우 작은 비중이지만, 작가 린저는 니나와 니나의 소설 속 주인공 한나를 통해서 유대인 학살에 매몰되어 자신의 생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독일군을 비판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니나는 생이 끝날 수도 있는 위기 속에서도 비밀요원으로 활동하고, 이와 대조적으로 슈타인은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시대에 묻어가는 ‘살인을 살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양심 없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작가 린저는 니나의 18 년간의 사랑, 일 그리고 일대기 등을 통해서 전쟁의 거대한 기계성과 허무함을 역설적으로 한 개인의 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끈질기고, 다양한 모습과 결을 가지고 있는지를 통해서 보여주었다.


니체는 인간이란 결코 저절로 완전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인간 존재이지만,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저마다 끊임없이 나아가는 중일 뿐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놓여 있는 점의 위치, 점의 크기, 점의 모양, 그리고 점의 촉감에 따라서도 그 인생은 너무나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생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인간이라는 정점에 누군가는 ‘도달할 수 있다.’라는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작가 린저가 우리 생에 대하여 희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생의 한가운데’를 통해서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자유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꿈꾸고, 거침없이 내 운명에 마주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생은 더욱 선명해지는 우리의 지문처럼 자기만의 결을 갖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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