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에서 아이사이아 베를린', 세일라 벤하비브 교수
드디어 제 4장이다.
제 4장은 정치적인 이슈를 철학과 도덕과 적용하여 근본적인 아픔과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기 위해 서양의 전통적 철학과 대면한 아렌트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아렌트가 쓴 '악의 평범성'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저서들에 나오는 구절을 동시대 학자들의 해석과 벤하비브 교수의 의견을 덧붙임으로써 특히 유대인으로부터 감정적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아렌트의 주장과 논리에 좀 더 객관성을 부여하고, 아렌트에게 공정한(?) 해석을 시도한다. 그러면서 벤하비브 교수는 아렌트의 의도와 주장이 과하게 왜곡되고, 단순화된 언어로 해석되고 비판을 받은 것은 인정하되, 아이히만의 아르헨티나 망명 생활과 이스라엘로 비밀스럽게 체포되어 교수형이 되기 직전까지 그의 교활한 (?) 역사와의 장난과 위조에 대한 근거를 대며, 아렌트의 언어가 실제로 악의 평범성이 아이히만의 개인적인 '사고 결여'가 아닌 더 면밀한 사고 과정을 통해 나타난 그의 악의 특수성을 놓쳤다는 점도 인정한다.
아래는 독자로서 내가 읽으며 본 장의 주요 핵심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문단 전후 생략된 부분에 대한 부연 설명 부분은 따로 회색으로 표시했다.
비록 아렌트는 유대인들로부터 심하게 공격을 당했고, 지금도 공격을 당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근대성의 조건 하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보수하는 것의 깊은 역설이 아돌프 아이히만의 심판과 사형 선고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그리고 법적 기반을 찾기 위한 아렌트의 심도깊은 유대인적 작품이다.
(아픈 학살과 추방에 대해 다시 들여다보고 정의를 가리는 일에서) '정신병리학은 우리에게 트라우마의 기억과 서술이 일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는 왜 트라우마가 특정 순간들에 기억이 되며, 다른이들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억압이 되는지에 대해 밝혀주며, 현재의 표현을 통해 과거의 조각이 관통되는 것처럼 특정 시점에서 무엇이 인간의 기억을 유발시키는지는 치료적 분석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나아렌트 본인이 당시에 '생존자'였다는 사실은 거의 언급이 되지 않으며, 랄프 엘리슨이 이름지은 것과 같이 그녀의 "올림피아적 거리"와 같은 것이 아마도 그녀가 게스타포의 손아귀로 빠지는 것의 트라우마적 가능성에 대항하여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렌트는 남프랑스에 위치한 구르스 Gurs의 여성 매장시설에서 도망 나온 이후에 만에 하나라도 잡혔더라면, 그녀는 아우슈비츠로의 강제소환으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벤하비브 교수는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편을 들거나, 그에게 죄가 없다고 하기에는 아렌트 그녀 스스로가 유대인으로써 겪었던 치명적인 사건들을 들며, 아렌트의 아이히만에 대한 책에 대한 두가지 접근을 설명한다.
그러나 대략적인 검토는 아렌트가 직접 쓴 글들이 두가지 접근에 대한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초기에 그녀의 원고가 이념에 대한 강조가 주를 이룬다면, 후반기 그녀의 원고는 국자 사회주의의 실현에 있어서 제도적이고 체제적 요소들에 더욱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벤하비브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하며, 그 다음 소장에서 베티나 스타그네스 교수가 쓴 '예루살렘 이전에 아이히만' 이란 책을 통해서 아이히만의 개성과 그의 반유대주의적 문제에 대한 논쟁에 대해 다시 초점을 두어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을 예고한다.
(베티나 스타그네스 교수는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원작에서 제목을 개조하여 자신의 주장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전치사 하나로 글 전체의 맥락과 주장이 이렇게 다른 아이디어와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스타그네스 교수는 '그러나 아이히만이 정말 나치 반유대주의로 판정받지 않고 동시에 평범할 수도 있을까?' 라고 아렌트는 묻는다. 그녀는 이를 인지하지는 않았지만 인상깊게도 그녀는 그녀가 그 현상에 대해 원했던만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 그렇다면, 그 현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이히만을 배반한 것으로 재빠르게 의혹을 산 사센 Sassen (아이히만과 함께 아이히만의 유대인 관리 및 학살 당시 기록을 녹음 및 텍스트 기록을 담당한 기자) 신문사 기자은 독일 잡지 데어 스턴 Der Stern과 네덜란드의 두 출판사에 남은 원고 일부를 파는 거셍 착수를 했다. 라이프 Life 잡지에서의 시리즈의 출판과 함께 당시 이스라엘의 감옥에 있던 아이히만은 신경쇠약으로 고생을 했으나, 그와 그의 변호사인 세르바티우스는 사센의 인터뷰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을 던지는 식의 방어를 하여 위기를 잘 마무리했다.
스타그네스 교수는 둘 다 (아이히만과 사센 기자) 모두 성공적으로 거짓말했다고 결론짓는다: 아이히만은 볼꼴없는 추방자인척하고, 그의 유럽 유대인들의 죽임에 대한 그의 역할을 술먹고 과장한 것이라고 진술을 했으며, 사센 역시 야망있는 기자로서 돈을 밝히고, 기자로서의 과장하는 것을 즐기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 아르헨티나의 원고들은 우리에게 아이히만의 반유대적 세계관의 강도에 대해 새로운 시사점들을 제공해주었고, 그것들은 아렌트가 놓친 부분들이다.
아이히만이 자신이 "대량 학살자"는 아니었다라는 주장에 대해서, 스타그네스 교수는 "그의 경우 그의 내적 도덕성은 무엇인 옳고, 보편적 도덕 범주인 것인가에 대해 기반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기-검열의 형태도 아니면서, 민족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이 결여된 도그마에 대한 인식에 대하여, 즉 개개인의 시민들이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에 기반하고, 그 시민들만이 가장 높게 그렇게 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에 기반한 것이라고 평을 했다. 여기서 양심은 '모든 사람들이 안고 살아가는 조국에 대한 도덕심이며, 아이히만은 이를 '핏줄의 목소리'라고 일렀다.
이러한 허세와 잔인함의 이상한 조합, 즉 애국주의자적 이상과 이성적 사고의 얕음은 아렌트가 감지했고, 그녀는 이렇게 아이히만의 언어사용에 대해 매우 잘 대응을 했기 때문이다. 스타그네스가 말한 것 처럼 '그녀의 언어감각과 개념들은 전통 독일 문학을 통해 교육을 받은 것인데,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언어가 마치 사고결여의 애매함, 냉소적으로 잔인한 사고들, 내면화된 자기동조, 의도없는 코미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측은함에 대한 부분들의 변화하는 급류와 같다고 묘사했다.
그는 반유대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가 광적으로 반유대주의라이기 때문에 평범하다는 것이다. 비록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반유대주의의 깊이에 대해서는 잘못알았지만, 그의 성격과 정신상태에 대한 주요한 특징들에 대해서는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굳건한 자기옳음, 과장적 비유적 이론과 세계사적 이론에 영향을 받은 극적인 방어성, 시민의 순도 purity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는 열렬한 애국주의, 유대인의 권력에 대한 피해망상적 투과와 과학, 문학, 철학에서 그들의 성취에 대한 질투, "선택된 사람들"인척하고, 유대인들의 이른바 대범함, 연약함에 대한 혐오 등의 유사한 신드롬과 그가 매우 닮아있다는 것을 보았다. 아렌트가 말하는 '평범성'이란 당시 민족적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만약하게 퍼져있었던 그 신드롬이었다."
아렌트는 "생각하기의 무능력'이란 구절을 아이히만이 그의 양심을 핏줄의 목소리라는 이유로 감소시킨 것과 히틀러의 명령을 정언명령으로 생각한 것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는데, 그녀는 이때 칸트식 용어를 사용했고, 이는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위해 생각하는 것, 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또한 다른이들의 관점에서부터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이러한 반영은 아이히만의 경우에는 매우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아렌트의 '사고결여'의 사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연관이 깊다.
제 3장에서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칸트의 판단의 비판이 "아마 칸트 정치철학의 가장 위대하고 원조적인 모습을 포함하고 있다"고 쓴 이후에 아렌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판단의 비판에서 칸트는 생각하는 것의 다른 방법에 대하여 주장하며, 이는 자신 스스로하고만 동의를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다른 이의 입장에서 생각' 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된 것이고, 이후 칸트는 이를 '확장된 정신상태'라고 일컬었다.
그를 더 들으면 들을 수록, 그가 말을 할 수 잇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더욱 선명해지고, 이는 그의 생각하기에 대한 무능력, 즉, 다른이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결여와 깊게 관련이 있다" 라고 아렌트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우리가 아직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생각되어야 할 어떤 것 자체가 인간으로부터 돌아서버리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서버린 사실에서 기반"하는 것이며, 이는 생각하기의 무능력이란 "존재에 대한 망각"의 형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근대 인간의 사고결여는 다른이들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에 대한 무능력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사고결여는 다른이들이 무엇을 생각할지에 대해 너무 사로잡혀서 그 자체의 존재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아렌트의 하이데거에게 있어서의 생각하기의 의미에 반해 칸트식 사고의 의미에 대한 몰두는 아렌트가 도덕적인 사고, 판단, 그리고 행동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이해를 위한 시도로써 출발했다.
"악의 평범성"이란 구의 사용과 아이히만의 행돌들을 괴물, 또는 악의적 기질의 행위자의 도덕성질이라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아렌트는 악마를 비유적인 표현으로 타락, 부패, 또는 사악함이라고 궁극적으로 보는 서구식 전통 사고에 맞서는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녀는 다시 묻는다: "과연 선과 악이 문제, 우리의 옮음과 그름을 가르는 능력이 사고의 능력과 연관이 있을 수 있을까?
나악 그녀는 다시 곰곰히 묻는다: " 우리가 흔히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처참한 실패와 사고하기에 대한 무능력은 과연 일치할까?" 그녀는 양심을 영혼의 영혼 자신과의 조화/ 하나됨이라고 묘사했다.
아이히만은 교활했으며, 그의 개인적 이익과 이득에 있어서는 분명히 그 자신을 위해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그는 그의 당과 운동에 있어서 독립적인 도덕적 세계관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스스로를 위해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또한 다른이들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에게는 그들을 "타인들"이라고 정의하고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유럽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트라우마는 우리 모두에게 깊이 박혀있어서 마치 상처가 다 낫기 전에 다시 상처를 내는 것과 같고, 이는 다시 피를 내도록 한다. 한나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마찬가지로 결국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 상처를 다시 내는 것이며, 이는 아마 치유는 앞으로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
아렌트의 책의 운명은 미국 유대주의와 같은 디아스포라적 유대주의의 정치적이고 역사적 민감성들의 진화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다. 로빈 교수는 아렌트의 도덕적 법적 철학이 얼마나 흔치 않았는지를 유대인의 도덕의 형태의 기원을 탐험함으로써 설명한다.
로빈은 유대주의가 어떻게 "물질적 삶에 대한 경계성"을 강요하는지에 대해 언급하며, 그리스의 아테나나 칸트의 영혼도 아닌 예루살렘이 아렌트 글의 영혼의 장소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를 향한 예언적 추구의 영혼이 이미 많이 인용된 숄렘과의 교환에서 나타나는 아렌트의 글을 통해 포착해낸다. 아렌트는 말했다:
"내가 이스라엘의 한 정치가와 한 이야기를 얘기해줄게. 그는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불분리에 대해서 방어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내 생각에 그건 정말 파멸적이라고 생각해. 내가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나에게 이런식의 말을 했어: '나는 너가 내가 사회주의자로서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히 알 것이다: 나는 유대인 민족을 믿는다.' 나는 이것이 매우 충격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했고, 나도 충격을 받아서, 그 당시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아마 이렇게 답변을 했었을거야: 이 민족의 가장 위대함은 그들이 신을 믿는다는 것에 있고, 그를 향한 믿음과 사랑이 그에 대한 두려움도보다 크다는 것에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근데 이제 그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만 믿는다고 한다면? 도대체 거기서 어떤 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지?"
코레이 로빈 교수가 이 문구를 옛 유대인들의 예언적 도덕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반면에 네드 컬토이스 교수가 이 똑같은 문구를 헤르만 코헨과 언스트 카시어의 전통 속 유대 자유주의의 계몽에 대한 재확인이라고 읽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두 학자 모두 계몽의 정점과 유대주의의 영혼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타인이라 불리는 자들의 저항과 투쟁은 주인정신의 나르시즘을 끝내고, 관점들 전환성에 효력을 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이들의 관점에서 서보는 것"은 다른이들이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을 것들에 대한 사고에 예상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인들과 대화와 함께하는 실천들을 통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도록 우리를 의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렌트는 역사의 철학에 대해 끈기가 조금밖에 없었지만 최소한 사고결여를 극복하기 위한 능력과 상호 존중과 같은 것을 획득하는 것은 개인의 도덕절 자질에서 기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실천과 제도들을 통한 세계 건설의 정치적 과제를 요구한다는 헤겔의 말에 동의를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