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에서 아이사이아 베를린', 세일라 벤하비브 교수
* 철학적 개념용어는 공부 부족으로 실제 학문분야 번역 용어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제1 소장. 벤야민과 체스 거장 Benjamin and the Chess Master
이번 장에서 벤하비브 교수는 서구 유럽 철학의 역사에 대한 서사를 체스 게임에 비유하며, 이 게임을 진행하는 벤 하비브 교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벤야민의 조율을 통해서 게임을 대리 진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벤야민이 벤하비브 교수를 조율하는 그 도구는 바로 역사적 물질주의 사관 Historical materialism이다. 벤야민의 이 글은 사후 20년이 지나 아렌트에 의해서 편집이 되고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벤하비브 교수의 체스 놀이 설정은 이 글에서 벤야민이 역사적 물질주의 사관을 체스 게임을 하는 인형에 대한 비유를 통해 설명하는 표현을 이 책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이는 이 게임을 역사의 줄을 당기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작은 꼽추인 체스 장인을 어떻게 해서든 이길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음이다. 위험의 순간에서 번뜩이는 기억을 붙잡고, 역사적 순응주의와 가짜 목적론의 무게 아래에 있는 새것을 질식시킴으로써 역사적 인물들을 항상 제치는 듯한 체스 장인의 움직임을 한수 늦추는 것이다. 벤하비브 교수는 벤자민이 '누군가는 새롭게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전통적 철학과 방법론학을 벗어나야 한다.'라는 주장과 맞물린 학자들의 시도를 “벤야민적 순간 Benjaminian moment”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장에서 대표적으로 한나아렌트와 씨오도르 아도르노의 그러한 주장들을 그들의 주장의 기반이자 비판의 근거가 된 칸트와 헤겔, 하이데거와 연계하여 살펴본다.
아렌트와 아도르도는 사고 자체가 "거짓된 만유"의 힘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벤하비브 교수는 이것이 역사적 목적론들을 부정한다기보다는 더 심오한 수준에서 모든 철학적 시도들의 지상의, 단정적 categorical 비평을 체계적이고 전체적으로 보려는 시도이다. 특히, 아렌트와 아도르노에 의해 공유된 허위적 만유에 대한 비평은 특정한 것의 모호함을 마주치는 것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해 준다.
다음 소장에서 다뤄질 아도르노와 아렌트의 구체적인 원고는 각각 1934년 출판된 수필 "철학의 실제 The Actuality of Philosophy"과 1946년 출판된 :존재적 철학이란 무엇인가 What Is Existenz Philosophy?"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제2 소장: 초기 아도르노의 철학 비판 Adorno’s Early Critique of Philosophy
"누구든 철학을 직업으로 선택한 자는 이전 철학파들이 시작한 허구를 먼저 거부해야 한다. 그 허구는 사고의 힘이 실재의 전체성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이성이 현실의 전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한 믿음은 최선이어야 헛된 희망이고, 최악으로 말하자면 이념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역사와 철학의 실제에 대한 권위 있는 연구는 현실의 전체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고의 힘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 대신 아도르노는 해석의 개념이 어떻게 이렇게 어마어마한 문제들의 배열에 대해 답을 제공해준다는 것인가? 그에게 '해석'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를 알아봐야 한다.
제3 소장: 한나 아렌트의 미국 청중들에게 유럽의 철학을 소개하기
벤하비브 교수는 이번 소장에서 아렌트가 유럽 철학의 기반과 발전에 대하여 영어로 소개를 한 원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칸트에서부터 출발하여 키에르케고르, 헤겔에 이어 하이데거까지 이어지고 또 그를 넘어서서 그녀의 박사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칼 야스퍼스의 영향을 받아서 정치철학과 관계/소통성으로 자신의 철학과 관련 개념들을 확장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아렌트와 아도르노는 광범위한 붓질을 통해서 사고와 존재의 단일성의 분해를 추적하며, 더 중요하게도 보편과 만유에 대비하여 특수성의 출현에 대해서 지적하며, 이 보편과 특수 사이에 중재와 화해의 부재에 대하여 인지하고 있다. 이로써 이 둘은 헤겔로부터 떨어져 나가며 19세기 중후반, 20세기의 철학의 기틀을 새롭게 마련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 특수성이 자신의 특수성 singularity이 아닌 개인의 독특함 uniqueness으로써 허위적 만유를 넘어서는 사유를 의도했다. 또한 아도르노에게 '해석'의 개념이 주창되었다면, 그에 대등하게 아렌트는 '의미'의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렌트는 현상학과 실용주의는 최근 몇백 년의 철학적 사유론 중 가장 흥미롭고 위대하나, 현상학은 일반적 책상과 왜 하필 '이 책상'인지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마찬가지로 아도르노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비 연역적으로 이미 주어진' 개념이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해 지적한다.
벤하비브 교수는 후설의 현상학과 실용주의 접근이 우주적, 만물적 이성주의에 대응하여 특수한 것, 특별한 것들이 우리 인지와 사고에 영향을 주며, 개인이 경험하는 것을 감소시키지 않고, 넓은 의미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아도르노와 아렌트의 시각에서 완전히 그 특수성에 대해 설명해주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제4 소장: 어떻게 하이데거를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아렌트는 소통과 제한적 상황들의 개념과 같은 야스퍼스의 철학의 요소들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이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함정을 넘어서서 세계 관념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현존재 (다사인 Dasein)라는 개념은 아렌트와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사고와 존재의 단일성을 복구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존재의 분석은 공허한 주관주의로 나아가는 거대한 , 또한 그것은 '세계 안에 존재함'을 탈환할 수도 없는 철학적 실패라고 둘은 이야기한다. 이 지점은 아렌트가 내재적이지만 단순히 우연이 아닌 하이데거의 철학과 그의 정치성의 관계를 발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나중에 나치 정치와 정책에 연루가 되고, 협력하고자 한 흔적이 드러났었다.)
하이데거는 정치적으로 나치에 가까웠는데, 아렌트는 당시에는 그 맥락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으면서도 그녀의 성숙한 사고의 주도적인 통찰력 중에 하나는 바로 당시에 하이데거의 자기로서 현존재의 개념이 이는 '다른 이들과 함께 세상에 있음'을 뜻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생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해냈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실용적 노선은 이제 더욱더 선명해진다. 그녀는 하이데거의 "세상에 존재함"을 소통의 개념으로 재해석하며, 이는 야스퍼스의 공으로 기인하는 것이라고 간략하게 얘기할 수 있다.
여기서 그녀의 유명한 인간의 조건 중에서 '복수성'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가 생겨나게 된다. 복수성은 스피치를 통해서 표현된다.
:만약 행동이 출생의 사실에 대응하는 것이라면, 태아의 인간의 조건의 실재화라면, 스피치는 차별됨의 사실에 대한 대응이며, 복수성의 인간의 조건의 실재화이고, 이는 즉, 독특하고 구별되는 인간으로 다른 동등한 이들과 삶을 말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도 타인과 함께 존재함이 물론 세상에 존재함의 근본적 조건이 되기는 하지만 죽음 앞에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 외에 모든 함께 존재함은 가식적인 것으로 무시된다. 여기서 벤 하비브 교수는 "죽음과의 서구적 철학의 외도"라고 불리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통해서 태아성, 복수성, 스피치, 그리고 인간 행동에 대해 집중하며, 정치적인 사고를 하는 정언적 범위를 확장하고자 한다. 아렌트는 그것이 스스로가 대화와 행동함으로써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형태를 통해서라고 말하며, 특수성은 이를 통해 다시 포착되고, 만유의 지배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아도르노의 성숙한 사고가 허위 만유에 대응한 특수성과 특이성을 되찾기 위해서 "개념"에 대한 진정한 해석을 형성한 것에 반하여, 아렌트는 특히 칸트의 판단 이론과 같은 사고와 존재의 말소된 존재적 단일성을 넘어서는 서술을 통해서 나아감을 발견한다.
제5 소장: 전체주의와 윤리-정치적인 것에 대한 문제
변증법적 계몽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만약에 모방이 주변 세계와 같게 자신을 만든다면, 오류 된 투영이 마치 주변 세계를 마치 그와 같게 만들 것이다. 만약 앞의 것 (모방)에게 외부가 내부를 근사하게 만들어갈 모델이라면, 그리고 그(모방)에게 이방인이 더욱 유사해진다면, 후자(외부)는 내부의 긴장을 외부를 붙잡기 위해 변형할 것이며, 그의 적과도 유사하게 모방할 것이다. 이러한 투영의 물리적 과정의 결과는 판단과 평가 역량의 상실이며, 또한 그의 행동의 결과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평가할 수 없게 됨에 이르게 한다.
아도르노가 정신분석적 언어를 사용하여 이러한 판단 역량의 상실을 특징짓는 데 사용한 것에 반해서, 아렌트는 "사고와 도덕적 사려"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묻고 있다. " 우리가 옳고 그름을 나누는 능력, 즉 선과 악의 문제가 우리 사고의 능력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그녀는 묻는다. 이것이 바로 아이히만의 인성의 가장 크게 놀라운 점으로 어리석음이나 악함, 또는 도덕적 부패가 아니라 "생각 결여"로 묘사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판단이란 "보편적인 것에 포함되어 특수자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며, 이는 만물적인 것이 주어지고, 특수자가 그 안에 단순히 종속되어 있을 때 결정적인 것이다. 이는 만약 그 특수자가 주어지고, 적절한 보편적인 것이 그 안에 발견될 때에만 반성적이게 된다고 했다. 아렌트는 이러한 문제들의 역설에 자극된다. 비록 칸트는 판단 능력이 자연과 관련한 목적론적 판단과 아름다운 것을 규명하는 미적 판단에 관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아렌트는 판단은 "틀린 것으로부터 옳은 것을 가리는 능력"이라고 말하며, 못생긴 것으로부터 아름다운 것을 가르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고하는 것이 자율성, 지속성, 강인함, 독립성, 꾸준함을 요구하는 것에 반하여 판단하는 것은 세속적인 것, 즉 주변 사람들에 대한 흥미, 투영, 이상화 그리고 외곡 없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판단의 주요 목적은 완전한 복수성 속에 세계의 공통성을 복구하는 것이다.
사고하는 것은 비유의 언어에 머물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영역의 격차에 다리를 놓으려고 노력한다. 사변적 철학가에 반해서 정치적 사상가는 비유적 언어의 힘을 또 다른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나눠주는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예를 들어서 공유된 세계의 연약한 복수성을 유지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며, 그것들은 어느 순간에는 쉽게 파괴되고 프로파간다나, 저질의 예술품, 상식의 상실들에 의해 쉽게 벅찰 수 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의 "벤야민 순간들" 이란 바로 이러한 만유적인 것과 특수적인 것, 비유와 현실, 그리고 사고하는 능력과 판단하는 것 사이의 긴장 사이에 엮이게 된다.
제6 소장: 아도르노의 미학에서의 판단
당신의 조치들의 격언이 모든 것의 보편적 법칙이 되는 격언은 보편적 원리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신의 조치들의 격언과 같은 조치들은 그 자체를 대조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칸트는 말했다.
이러한 윤리에서 동의어 반복적 정체성으로의 보편성 원칙의 번역은 수사적 역작이다. 아도르도는 스스로를 반역하지 않는 도덕적 법칙에 대한 추구를 통해 드러나는 정체성에 대한 강박은 실제로 자율성이 아닌 자유롭지 못함이다라고 덧붙인다.
칸트 철학의 인식적 그리고 도덕적 주체는 나의 모든 지각 작용을 동반하는 것으로서 이는 타자성뿐만 아니라 내 안의 타자성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만 성취되는 정체성에 대한 경직된 추구를 드러낸다. 칸트의 도덕률은 억압적인 경직된 정체성 형성에 대한 정확한 예시이다.
칸트가 도덕적으로 좋은 것의 상징으로 아름다움을 주장하는 것에 반하여 아도르노는 자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미적 아름다움은 영구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변화하는 기층을 말한다. 그를 통해 아도르노는 특수자/ 특수한 것을 허구적 만유로부터 삼켜졌던 것을 회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을 제시하고 이 관계를 탐험하고자 한다.
소 서평:
이러한 학문 서적은 전체적인 책의 주제와 방향을 늘 머릿속에 되새기지 않으면 길을 잃기가 쉽다. 나 역시도 첫 도입부에 체스게임에서부터 역사적 유물사관에 칸트와 현상학, 헤겔 등 왜 이러한 철학적 개념들을 이 장에서 살펴봐야 하는지 감을 잡고 이해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위의 요약 줄거리(?)는 벤하비브 교수가 나름 의도적인 설정하에 유럽의 철학적 뿌리와 인식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그것과 타인/ 이주민, 즉 다르다 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억압과 차별의 기원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그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벤야민의 순간'이라는 제목 아래에 그런 '차이'와 '인식적으로 깊게 뿌리내린 것들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확보를 아도르노와 아렌트를 통해서 질적인 검토를 해보고 있다.
특히나 아도르노와 아렌트는 동시대 통찰력 있는 학자들이었음에도 벤야민 사후 대응과 평에 있어서도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 정치적 개념과 분석에 있어서 다른 접근 방식에도 불구하고, 아렌트와 아도르노가 근본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같다는 것을 벤하비브 교수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언급된 칸트와 헤겔, 그리고 특수 개념어들에 대한 나의 소화력 부족으로 인해서 글을 매끄럽게 읽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위의 해석도 백 프로 학문적으로 정확한 개념어로 표현하지 못함을 밝힌다. 그러나 점점 더 흥미진진해져 간다고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얼른 다 읽고 전체적 서평을 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