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에 대한 편견, 무지 극복기
내가 처음 아프리카로 가고 싶다는 결심을 했었을 때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이 2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나의 고질병인 아토피 피부 질환이 아프리카의 기후와 땅에 적합할 것 인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앓았던 아토피는 대학생 이 되어서 까지도 나를 괴롭혔었다. 과연 거기서도 내가 한국에서 구했던 약을 구할 수 있을지, 갑자기 심해져서 피부가 다 뒤집어지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등 걱정이 되었다.
또 한 가지 고민은 내가 HIV&AIDS에 감염된 사람들 에게 노출되면 어떻게 해야 할 것 인지, 그리고 그들로부터 내가 조심해야 하 는 것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함과 걱정도 가보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 주저 없이 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2013년 8월에 처음으로 아프리카 땅을 밟으면 서, 나는 가장 큰 고민 2가지를 다시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여전히 두려움 은 있었지만 나는 이것 때문에 안 가보고 평생 후회하는 것보다 일단 가서 부딪혀 보자는 마음으로 말라위 땅을 밟게 되었다.
말라위에서 생활하면서 나의 첫 번째 고민은 아주 쉽게 해결이 되었다. 아토피 피부 질환은 자연환경 인문 환경 둘 다 영향을 많이 받는데, 말라위 의 자연적 환경은 주로 덥고 습한 기후였기 때문에, 건조함이 최대 적인 아토 피는 악화되기보다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개선이 된 것이다. 아토피로 고생 하 고 있거나, 지인 중에 아토피로 고생하는 사람을 안다면, 말라위로 가시라!
그리고 두 번째로 HIV/AIDS 감염자들에 대한 나의 걱정은 정말 터무늬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가보기 전엔 어떻게 알 수 있으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착각했던 것과 다르게 겉보기만으로 누가 HIV&AIDS 에 걸린 사람인지 알 기가 힘들다. 특히, 감염된 당사자들이 먼저 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주변 사람들도 짐작은 가더라도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여긴다.
그렇게 내가 HIV&AIDS와 관련해서 잊고 있던 나에 게 다시 경각심을 심어준 사건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이미 마을에서 지낸 지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래서 나는 현지어로 주민들과 어느 정 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친한 마을 이웃들의 집에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리고 어느 날, 냔다마 (Nyandama)촌장님 댁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HIV&AIDS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날은 여느 날과 같이 평온한 주말 오후였다. 냔다마 촌장님은 내가 평 소에 내가 어머니처럼 따르던 분이셨다. 내가 온다고 평소 아껴두었던 오리 알을 삶아서 내어주셨다. 나에게 3알 주신 것을 1개 반, 1개 반씩 나눠 먹자고 하니 당신 1개, 나에게 2개를 주신다. 그 감사함과 따뜻함에 또 한 번 감동을 받으며 촌장님과 점심을 다 먹어 갈 때 즈음, 집으로 한 여인이 들어왔다. 그 녀의 몸은 굉장히 가냘파 보였고, 옷 가짐을 보니 점심때가 다 지나도록 씻지 않고, 옷도 얼마 동안 안 갈아입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을 건넬 힘도 없어 보였고, 결국 촌장님께서 먼저 말을 건넸다. “여기, 이거 가져다가 먹어라.”
촌장님은 말라위 주식인 시마(Nsima)와 우리가 먹다 남긴 반찬 몇 가지 를 그릇에 담아 건네었다. 그러자, 그녀는 힘 없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난 다. 나는 촌장님에게 그녀가 누구인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촌장님은 그녀가 냔다마 마을에 사는 아가씨인데, 어린 나이에 HIV에 감염되어 가족도 없이 혼자서 매일 점심을 구걸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있다고 하였다. 그녀의 나이 스물도 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 즈음에 집을 나와서 부모님의 말씀을 어기고, 시장 주변을 누비며 다니다 밤에 몸을 파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그런 생활을 한 지 몇 년 안되어 HIV를 얻었다고 하였다. 마을에서 1년을 넘게 살았으면서도 나는 우리 마을 공부방에 오는 아이들이나 학부모들과 주로 알 고 지냈기 때문에, 오늘 그녀의 존재와 그녀의 삶의 이야기는 나에겐 조금 충 격이었었다. 무엇보다도 마을에서 누구보다 따뜻한 분인 냔다마 촌장님이 그 녀의 구걸에도 깊은 감정의 기복 없이 받아들인 모습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분명 그녀는 자신이 염치가 없는 걸 알면서도 갈 때가 없기 때문에 왔을 것이 고, 촌장님도 그걸 알기 때문에 그녀를 내칠 수 없었던 것 같다.
호기심이 많은 (철이 없는 이방자) 나는 우리 주변 마을에서 HIV/AIDS에 감염된 사람들이 많은지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촌장님께서는 비밀 이야기를 하시듯 속삭이시며 여러 이름들을 대셨는데, 대부분 내가 친하게 알고 지내던 마을 주민들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우리 센터에서 교사로 활동하는 교사들, 그리고 매일 유치원에 아이 손을 잡고 아침에 인사를 나누던 학부모들이었다!
그 날 그 대화 이후, 그동안 1년 넘게 지내며 말라위 생활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던 나는 또 다른 과제를 떠안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HIV/AIDS가 나에 게 공포로 다가온 이후로 난 그동안 내가 피 흘리는 아이들을 맨 손으로 치 료를 해 주었던 것들, 그리고 친한 마을 주민들 집에 가서 한 접시에 점심을 나눠 먹고, 거리낌 없이 스킨십했던 것 등 나의 마을 생활을 통째로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그리곤 덜컥 겁이 났다.
‘나도 전염이 되었으면 어떡하지?’
난 혼자 온갖 상상을 하며 아무에게도 얘기 못했던 이 두려움을 가장 친 한 친구이자 우리 센터의 유치원 교사로 활동하던 미지에게 마침내 털어놓기로 했다. 내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미지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에이, 진짜! 한! 그거 가지고는 HIV/AIDS 에 걸릴 수가 없어요! 걱정 안 해도 돼! 그렇게 걱정이 되면 병원 가서 피검사를 해 봅시다!”
나는 아이들을 치료하며 혹여 피가 나에게 묻었을 수도 있다고 하자, 미 지는 더욱 구체적인 상황의 예시와 감염이 되는 경로들을 설명해주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즉, HIV/ AIDS에 감염이 되는 경로는 성관계 또는 레저 칼이 나 주사 바늘을 나눠 써서 피를 옮기는 행위 등을 통해서이다. 마침내 장난 반 진담 반 얘기했던 미지의 말대로 나는 직접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하는 것으로 나의 "공상 시나리오"는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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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마을의 생활환경과 삶의 여건 속에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자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마을 사람들에 대한 경이로움과 존경심이 몰아쳤고, 나 스스로 지나친 감성과 상상력으로 사람들을 나와 격리하고 두려워했던 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부끄러 웠다. 나야 물론 길어야 2년, 3년 있다가 떠나면 그만이지만, 이들은 평생 이렇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동반자나 가족 중에 HIV/AIDS에 감염이 된다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초반에 받아들이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은 걸렸겠지만, 결국에 그들을 그를 짐으로 여기지 않고 안고 함께 살아간다. 또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HIV/AIDS에 감염되었다고 해서,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끔찍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감염이 되었더라도, 감염 사실을 제때 알고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면, 안티 HIV/AIDS 약을 처방해 주고, 이 약을 꾸준히 챙겨 먹 으면 안 먹는 것보다 훨씬 건강을 유지하면서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농촌 지역에서 이 약은 대부분 공짜이지만, 최근 말라위 정부 재정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이 약을 구하는 것이 일부 지역에서는 어려워졌다.
‘아프리카’하면 무시무시한 질병, 그중에서도 HIV/AIDS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갖고 있는 공포와 불안, 경계심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은 결국 그것의 전부가 아니다. 그 속에 더 깊은 생명 자체의 가치와 희망이 있고, 계속해서 삶은 이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생각에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만약에 이처럼 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고, 나에겐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아니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실제로 일어 난다면? 과연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를 이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여기 마을 사람들이 힘든 여건 속에서도 지혜롭게 살아간다는 것 결코 그들이 힘들다고 느끼지 않는 일은 아니다. 단지 그 속에서 삶의 이유와 그 가치에 대한 존중이고, 여전히 고귀하다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