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베프, 미지(Missy)

마을의 평범한 여성의 여자로서의 삶은 어떨까

by 한지애

미지는 나보다 2살 위, 88년 생이다. 그녀는 내가 마을에 있었던 기간 동안 촌 장님들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친구였다. 그녀는 나의 보호자이자, 친 구이자, 동료이자, 통역사이기도 했다. 미지는 우리 마을 공부방에서 내가 파견 되기 1년 전 우리 마을 공부방에서 ‘정말’ 무급으로 혼자서 30명 정도 되는 어 린 아이들을 위해 어린이집 교사로 활동 했었다. 그리고 내가 마을에 온 2013 년 8월부터 다른 동료들과 계속 교사로 활동하다가, 교사들의 수가 5명이 되자 어린이집 원장으로 승진(?)을 했고, 2014년 9월부터는 우리 마을 공부방 운영과 관리를 담당하는 직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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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나는 그녀와 내가 그렇게 가까워 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특유의 ‘시크함’이 있었다. 내가 파견 된지 얼마 안되었던 시절에 그 시 크함은 그녀가 우리 사업에 관심이 없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오늘 어린이집 운영은 어땠어요?” “다 좋았어요” “그게 다에요?” “네, 정말 다 좋았어요”


우리의 대화는 이러한 내용의 반복이었다. 사실, 이러한 반응은 미지 뿐만 아니 라, 말라위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물으면 최대한 ‘긍정적이게’ 답변을 하는 경향(?)이 있었고, 미지도 그럴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그녀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항상 저렇게 말 하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는 오전 11시 30분에 어린이집 일과가 끝나면 온 신경을 빨리 집에 돌아가는 것에 있었다. 말로 직접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느 때보 다 분주하고 날렵한 움직임이 그 증거다. 나는 기분이 언짢은 적도 많았다. 특히, 하루 일과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거나, 운영이 원활하게 되지 않은 날 그러했다. 그런 날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문제가 있어도 어떻게 개선할 지에 대 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시간 확인하고 짐 싸기에 바쁜 그녀의 모습에 난 또 실망했다. 그녀의 ‘시크함’은 촌장님들과 함께 하는 전체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 그녀는 회의가 시작된 후 도착해서, 회의가 길어지려고 하면 아예 남의 이야기를 듣질 않았다. 그녀는 웃으면 너무나 예쁜 미소를 갖고 있었지만, 보통 잘 웃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의 말라위에서의 첫 5개월이 지났고, 그녀는 나에게 다른 교사들보다 더 특별하지도 덜 특별하지도 않은 마을 교사들 중 한 명이었다. 한국에서 돌 아가서 귀국보고회를 한 뒤 다시 말라위로 파견이 되었을 때, 나는 전에 살던 숙소에서 좀바산을 따라 20분은 족히 올라가는 길에 있는 선교지역의 게스트하 우스 (고등학교 소유)로 옮겼다. 이제 내가 사는 숙소에서 우리 마을 공부방으로 가려면 40분을 족히 걸어야 했다. 큰 길가 사이로 난 샛길 따라서 지름길로 가도 30분은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우리 마을 공부방은 오전에 어린이집 운영이 끝나면, 오후 방과후 교실과 성인 문해 교실이 시작하기 까지 2시간 정도의 공백이 있다. 나는 오전에 어린이집 일과를 마치고, 다시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또 마을 공부방으로 내려 오는 것이 무척 힘이 들었다. 몇 번 반복되다 보니, 막상 집에 가도 밥을 할 힘 도 없었고, 오고 가는 것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여느 날처럼 어린이집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았던 나와 미지, 그리고 몇몇 아이들이 함께 걸 어 가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밥 먹고 오후에 마을 공부방에 가는 게 어때요?”


미지가 나에게 집에서 밥을 먹고 가라고 했다. 사실, 이전에도 몇 번씩 나는 그 녀의 집에서 밥을 종종 얻어 먹긴 했다. 내심 몇 번이나 그녀가 이 얘기를 먼 저 해 주길 바랬지만, 난 표현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그녀의 제안이 난 너무나 반가웠다!


“그러죠, 뭐.“ 난 쿨 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환호를 지르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이후, 매일같이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서 먹고 가요. 근데, 반찬이 부실해요. 괜찮아요?”


결국 나중에는 미지와 음리마Mlima촌장님께서 번갈아 가시며, 나를 거둬(?) 주 셨지만 말이다. 물론, 난 반찬 값을 자발적으로 보탰다. 시크한 미지는 나에게 먼저 솔직하게 뭐가 필요하다고 말하곤 했다. 토마토, 식용류 등등..


그렇게 그녀의 시크한 면만 보던 나는 그녀의 집에서 매일같이 점심을 먹으면 서, ‘엄마’ 로서, ‘아내’ 로서, 그리고 마을 부녀은행모임에서 ‘서기’ 로서 활동하 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 ‘여자’ 로서, ‘미지’라는 한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의 삶에 대해서 난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미지에게는 두 자녀가 있었다. 큰 딸 프로미스와 막내 아들 브라이언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들이다. 잘 웃지 않는 그녀를 웃게 만드는 것은 개구쟁이 브라이언이었다. 브라이언이 어떤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눈가에는 주름이 그어지고, 이내 함박 웃음을 브라이언에게 선사한다. 그 말이 무엇일지라도 말이다.


미지가 우리 집에 오면 하는 것이 항상 있다.

“이거도 버리는 거에요?” “그거요? 네! 그거 어떻게 다시 써요? 버리려구요.” “이거, 제가 가지고 가도 되요?”

우리의 흔한 대화 내용이다. 내가 버리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미지의 손에 들어가면 마치 송가니 시장에서 장날에 나온 물건처럼 새 것으로 변하다. 예를 들어, 내가 버리려던 솜 이불, 치마, 바지, 운동화, 양말 그리고 심지어 빈 패트 병과 다 쓴 기름병 까지도.


자녀들에게 마음껏 새 것을 사서 줄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우리 집에서 내가 안 쓰는 것을 가지고 가서 브라이언과 프로미스가 쓸 수 있도록 깨끗이 씻고, 닦아서 썼다. 미지는 메모리와 시장을 가러 가기 전부터 나의 장보기 메이트 (Mate, 친구) 였는데, 같이 장을 보러 가면, 꼭 한 벌씩이라도 그녀는 브라이언과 프로미스를 위해서 중고 옷 시장을 들리곤 했다. 덕분에 나도 폭풍 같은 충 동구매를 많이 했지만 말이다!


미지가 나보다 두 살 많았고, 자녀가 둘이라는 것은 말라위 문화에서 나에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2013년 프로미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10살이었고, 미지가 26살이었으니까 계산을 해 보면 미지가 16살에 프 로미스가 태어났다는 말이 된다! 처음 그녀를 알고 지낼 때부터 그녀의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 했다. 대부분의 말라위 여성들이 그렇게 살아가듯이. 그래서 난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그녀가 나보다 두 살 밖에 많지않다는 것을 항상 잊고 살았다.


하루는 오후에 여유가 있었던 미지는 우리 집에 와서 내가 저녁에 먹을 반찬을 해 주고 갔었다. 나는 주방에서 이것 저것 거들려고 했으나, 오히려 훼방꾼이라는 것을 주방에 들어 간지 얼마 되지 않아 깨달았다. 대신에 난 옆에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난 미지로부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마을 내 은밀한(?) 이야기 같은 것들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이번에 미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내 비밀 이야기 하나 해 줄까요?” 나는 무척 놀랐다. 그녀가 그런 말을 꺼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무슨 얘긴데요?”


“사실 브라이언과 프로미스는 친 남매가 아니에요.”


브라이언과 프로미스는 정말 엄마 아빠를 절묘하게 닮아서 난 단 한번도 의심 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돌발 발언(?)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 눈은 정말 오랜만에 휘둥그래졌다. 나의 반응에 미지는 브라이언에게 보여주는 그 함박 웃음을 지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참숯 위에 얹어진 프라이팬에 고정 되어 있었다.


“그럼, 프로미스의 아빠는.. 누구죠?”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이야기는 이러했다. 미지가 어렸을 때, 아마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그녀는 두 부모를 차례로 잃었다. 초등학교를 졸업 하고는 큰 언니와 오빠네 집을 옮겨 다니며 고등학교를 다녔었다고 했다. 그녀 는 나름 괜찮은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잦은 전학으로 학업에 집 중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고등학교 시니어Senior로 가는 진급 시험을 앞두고 있던 시기에,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그와 넘치는 사랑 (?)으로 인해 프로미스가 태어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럼, 그 후에 그와 결혼을 했던 거에요?”


나의 두 번째 질문이었다.


“아니요, 난 프로미스가 태어나면 꼭 학교에 돌아가서 고등학교를 다 마치고 싶었어요. 프로미스의 아빠는 결혼을 하자고 했죠. 자기가 다 책임을 지겠 다고. 그런데 그와 결혼을 하면, 난 다시는 학생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 각했어요. 몇 번씩이나 그가 나를 다시 찾아왔지만, 난 그를 거절 했어요.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죠.”


프로미스를 홀로 키우면서 그녀는 큰 언니네 농사를 도우면서 방 한 칸을 얻어서 지냈고, 남의 집 가정부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 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미지는 어렸기 때문에 그녀의 친척들이 다시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고 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프로미스가 3살이 되어 갈 때, 그녀는 지금의 남편인 브라이언의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브라이언의 아빠는 내가 살고 있는 선교지역에 있는 CCAP 고등학교의 청소부로 일을 하고 있었다. 미지보다 브라이언의 아빠는 더 오랜 시골 마을에서 태 어났고, 그의 형제 중에서 초등학교를 다 마친 사람은 그나마 브라이언 아빠밖 에 없을 정도였다. 미지의 형제들과 친척들은 처음엔 그들의 결혼을 반대했다 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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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어떻게 결혼을 결심한 거에요?”


“지금 그가 갖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난 그를 믿었어요. 그와 함께라면 뭐든지 믿고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 까지 그는 그런 모습을 항상 저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있죠.”


둘이 결혼을 하고는 미지가 어렸을 때 살던 집 아래에 그들만의 집을 짓기 시 작했다. 벽돌을 굽고, 창문 틀 만들고, 집 옆에 작은 화장실과 목욕 시설까지 모든 과정을 미지의 남편과 미지 둘이서 직접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농촌 지역 의 말라위 사람들처럼). 그들은 초가집으로 시작해서, 미지가 우리 공부방에서 일하며 매달 조금씩 버는 돈과 미지 남편이 산에서 참숯을 만들어서 시장에서 팔아서 모은 돈으로 마침내 2015년 초에 철제 지붕으로 바꿨다. 마을에서는 철 제 지붕의 여부가 그 가정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지표 중에 하나가 되기도 한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초가집을 여러 번 수리하고, 비가 와서 빗물이 새면 집 에 양동이로 물을 받거나, 커다란 검은 비닐 봉지를 지붕 뒤에 덮어서 임시 방 편으로 우기를 이겨내곤 했다. 미지네 집도 그러했다.


나는 잊고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 부터, 그녀는 나에게 우리 마을 공부방의 ‘교사’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우리 마을 공부방에 얼마나 기여를 하고, 얼마나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지를 가지고 난 그녀를 ‘판단’할 뿐이었다. 그것은 나의 큰 오류였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자기 삶의 목표와 꿈이 있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나에게 ‘시크’하다고 느껴졌던 그녀의 모습은 살아오는 동안 그녀가 온 갖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주변에 주눅들지 않고 꿋꿋하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아오면서 그녀의 몸에 벤 그 어떤 것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이 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 마을 공부방에 무급으로 일할 교사를 찾을 때, 왜 지원을 한 거에요? 가정 생계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잖아요.” 그녀의 답변은 그 동안의 나의 편견과 좁은 생각들을 더 부끄럽고 초라하게 만 들었다.


“물론 당장은 아무론 도움이 안되겠죠. 사실, 우리 집 건너 편에 사는 슈 피(나중에 어린이집 교사로 활동하게 된 마을 교사)는 2주 과정 어린이집 교사 훈련을 마치고 수료증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피니(Naphini, 우리 마을 공 부방 이름) 마을 공부방은 무급이라며, 자기는 하지 않겠다고 하는 거에요. 저 에겐 그것도 없었지만, 제가 이 일을 지금 할 수 있다면 나중에 꼭 저에게 좋은 기회가 또 생길 거라고 믿었어요. 물룽구(Mulungu, God, 신)가 저를 사랑하 는 한 말이에요.”


한 치도 안 보이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본능이다. 16살에 홀로 딸을 키우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족들이 반대하는 가난한 청년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무급 교사로 지원을 할 때, 비가 올 때 마다 큰 검은 비닐 봉지로 초가 지붕을 보수 할 때마다 그녀는 조금씩 강해졌을 것 이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끝이 없는 것 같은 어둠 같은 긴 터널을 지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갖고 있던 작지만 굳건한 ‘신념’이다.


나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미지와 내가 마을 공부방에서 수도 없이 작은 텐션이 있을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나 촌장님에게나 한 번도 불평을 하지 않았 다. 또는 꾀 많은 수의 마을 사람들처럼 우리 집 사정이 지금 이렇다, 저렇다, 이게 없다, 저게 없다, 이거 좀 도와줄 수 없느냐, 한 번만 도와 달라 등의 말 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내가 ‘어쩌다’ 알아 차렸을 뿐이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꼭 고등학교를 마치고, 교육대학에 가서 정식으로 교사가 되고 싶어요. 한(Han, 나를 칭함), 나피니에서 있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 어요. 처음엔 왜 나한테 자꾸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 지 이해를 못 했어요. 그 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이 우리 마을 공부방과 아이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 과 진심 어린 애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속으로 저도 결심했어요. 이제 ‘한’이 말하는 것은 기분 나빠하지 말자고 말이에요. 하하하!”


나의 쇄도하는 질문들을 그녀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느낌이 아니었다. 우리의 작은 텐션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은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입장과 이해 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가 그 럼에도 누구보다 가깝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업 현장에서 벗어나서 우리 가 서로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우리의 모습을 서로 진심으로 안아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때때로 젊은 시절 막 서른을 넘기고 어린 두 딸을 홀로 키웠 을 우리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그녀를 더욱 더 따르고,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조금은’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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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난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왔다. 내가 아플 때, 그리고 우리 동생이 말라위에 온 지 2주 만에 말라리아에 걸리고 응급실에 입원했을 때, 내가 혼자 과부하가 걸려서 일에 지쳐 혼자 울고 있을 때, 주말에 아무 기운이 없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방에 처박혀 있을 때, 갑자기 먹고 싶은 그러나 내가 만들지 못하는 현지 음식이 먹고 싶을 때, 송가니Songani 시장에 가야 하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을 때, 그녀는 항상 내 옆에 있어주었다. 분명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말도 때론 안 통하고, 생각하는 것도 다른 내가 귀찮을 때도 있었을 것이 다. 나와 정반대로 그녀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자녀들과, 누구보 다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해주는 남편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지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나에게 여러 영감 을 주는 존재 중에 하나이다. 언제 만나도 어색하지 않고, 어제 헤어지고 다시 만난 사람처럼 수다를 떨 것이다. 난 끊이지 않을, 그녀와는 전혀 무관한 일들 을 하소연할 것이다. 그녀는 늘 그렇듯이 웃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 할 것이다.


“Don’t worry, everything will be alright, Han! (걱정 마, 다 괜찮을 거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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