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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Ely Feb 21. 2024

Intro. 아들 셋이 어때서?

<1> '아들'이 어때서?

<1> '아들'이 어때서? 

      - 어른들의 무례함이 때로는 엄마의 전투력을 올린다. 




감수성이 예민한 둘째아이가 7살때인가 나에게 물어왔다. 


 "엄마! 근데, 아들은 안 좋은거야?"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리도록 놀랐지만 의연하게 (물론 리액션 부자인 나는 반색하며 표정과 제스처가 분명 의연하지않았을것이다. 매우 야성적이었을 것이다. 당장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색출하려는 기세로)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 사람들이 왜 우리가 다 아들이라 그러면 엄마를 불쌍하게 보는거 같아서     


아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자주 불편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또 이 시대의 흘러가는 시대상이려니, 아들이라 환대받았던 시절의 남편과 안주삼아 투덜대며 그럭저럭 넘겨왔다. 뭐 어쩌겠나? 아들 낳으려고 딸을 줄줄이 낳던 시절이 멀지않은 과거에 우리 엄마 이야기 인걸. 그런데 내 소중한 '포켓보이' 둘째 아들이 이런 질문을 남기고 난 그날 밤, 잠 못 이루고 잠자리에 누워 오랫도록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난다. 특정 대상이 없는 허공에 심장이 두근거리도록 분노한 기억은 생각보다 가슴 깊이 남아있다. 생각해보니 늘 그런 어른들의 무례한 질문은 아이들이 곁에 있을 때 날아왔다. 아이라는 존재는 깊은 생각이 없다는 듯이. 귓속으로 날아드는 소리따위는 그냥 흘려듣는 다는 듯이. 물론 혼자 있는 나에게 직접 물어왔대도 그 무례함의 크기가 달라졌을까. 아마 그렇게 말하기 더 어려웠을까.    


에구 어떻게엄마 고생이겠다둘째는 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 


다시 회상하니 아이들의 기억을 지워주고 싶을만큼 울화가 치민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내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안부도 아니고, 칭찬도 아니고, 욕도 아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인삿말. 셋째까지 아들을 출산하고 나니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삿말(?, 사실 규정할 수가 없다. 그냥 통칭해 인사라고 해두자)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쉽게 소비되었다. 남아 선호사상으로 비롯된 가슴아픈 출산 등에 지난 과거를 겪지 않은 지금의 아이들에게 앙갚음이라도 하듯. (물론 다양한 형태의 어려움이 아직은 많이 남아있음을 알고 있다. 나의 에세이가 그에 관련된 의견이 아님을 조심스레 남긴다. 나는 그저 가치로운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 이 시대의 여자사람이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내 아들 셋을 위해 사명감을 가지기로 했다. 이는 '아들'에 대한 맥락없는 비판이나 말들을 신경써서 불편해 해야겠다는 전투력에 의거한다. 부모에게 자식이란 의미는 성별을 막론하고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가끔 무례한 어른들의 질문은 어떻게 받아들이면 될지, 어린이는 그 존재 자체로 얼마나 존귀한지 세뇌시키는 일에 대해서 말이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딸을 매우 사랑하는 동네 아줌마다. 왜냐 내가 우리엄마 딸이기 때문에, 우리엄마도 외할머니 딸이기 때문에, 외할머니도 외할머니엄마의 딸...... 여튼 나는 '딸'의 존재를 절대 긍정한다) 


기자를 꿈꾸던 대학시절 하루가 멀다하고 대형신문사에 시민 투고를 해대던 나는 사회의 불편한 점을 온갖 논리와 얕은 지식을 근거하여 비판하고 개선을 촉구하는 일을 인생의 낙으로 삼았었다. 매일 지면신문 뒤에서 서너장을 넘겨 내가 투고한 글이 실렸는지 확인하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이었다.


이후 나는 비슷한 결을 가진 친구들의 행보와는 정 반대로 또래보다 일찍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셋씩이나 낳은 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본의아니게 달라져버렸다. 쉽게 말해 굉장히 말랑해졌다. (이미 첫째를 낳았을때 벌어진 변화였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갑자기 막 이해가는 것이(심지어 남의 일에 너무나도 쉽게 눈물을흘리기도) 뭔가 어느 날 갑자기 본인이 가진 초능력을 경험하는 신기한 사람들의 수기처럼. 갑자기 불친절한 아르바이트생의 엄마가 되는 상상, 박스를 망가뜨린 택배아저씨를 내 남편이다 생각해보기도 하는 등의 쓸모없지만 세상은 동화같아지는 뭐 그런 사고의 변화를 겪었다. (물론 아이를 낳는다고 뭐 너그러워 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쓸데없는 오지랖이 커진다) 우리 K - 엄마들이 화가 나도 잘 말을 안하고 웃어넘기는 이유를 알아버렸달까. 예전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개그우먼 박지선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다 자식 같아서 그래, 남편 같아서 그래, 우리 어머님같아서 그래, '뭐 그런 말도안되는 참견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뉴스를 보고도 갑자기 범죄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 가족으로 다가오기도,  우리 아이가 지나가다 만날 아저씨같아 겁이 나기도, 화가 나봐야 각박한 세상 속에 아이들을 키우는데 걱정과 불안만이 하늘을 찌른다는 생각에 잠시 뉴스를 멀리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불편한 것을 보면 도무지 참기가 어려운 태생은 어쩔수가 없나보다. 우리 고객님(아들)이 불편하다고 고객의 소리에 슬쩍 사연을 넣었는데, 들어보니 굉장히 일리가 있다. 가만있을 수 없다. 글을 남겨서라도 또 새롭게 펼쳐진 이 시대의  '아들' 을 응원하고 싶다. 



<2> 저 딸 낳으려고 셋째까지 낳은거 아닌데요...........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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