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프롤로그

서른살 여자, 결혼과 꿈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나요?

by 유연

결혼까지 40일 남았다. 2016년 5월 5일, 1년 전에 5년 넘게 사귄 S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은 이후 결혼을 준비하는 시간 동안 나의 감정 기복은 마치 폭풍 전야의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하루 전만 해도 한 없이 사랑스러워 보이던 S가 자고 일어나 보니 못 미더운 남자인 것만 같이 느껴졌고, 낮에는 달콤한 신혼 생활에 대한 기대로 설레어 있다가도 밤이 되면 결혼 후 닥칠 현실이 무서워 뜬 눈으로 지새우곤 했다. 감정의 너울이 한없이 출렁이던 지난 몇 개월을 지나 어느덧 결혼까지 불과 한 달 남짓 남은 이 시점. 문득 그동안 나를 스쳐간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기록하며 정리하고 싶어 졌다. 어쩌면 먼 훗날 내 아이의 결혼을 맞이하게 될 시간이 오면 지금 이 순간들의 기억들을 다시 들춰보고 싶어 질 것만 같단 생각에.



프롤로그


"난 결혼 생각 없어. 한국에서 기혼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잖아."


신기하게도 내 주위 친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결혼을 빨리 했다. 아마도 28살 봄부터였을 것이다. 26살에 겨우 취업해서 1년 만에 이직을 하고 새로운 직장에서 1년 정도 일했을 무렵이었다. 아직 신입의 때가 벗겨지지 않았을 그 시기에 친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청첩장을 보내왔다. '뭐? 벌써 결혼을 한다고? 너희들 이제 겨우 20대 중반을 벗어났는데, 그 젊음이 아깝지도 않니?' 입 안에서만 맴돌던 내 진짜 속마음이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직장생활이란 쓰디쓴 맛을 제대로 맛본 후 진로와 인생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였다. 물론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을 1년 만에 때려치우고 칼퇴근이 보장되는 작은 회사로 이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내 커리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 실패(?)했으니 더 꼼꼼하게 따졌다. 결혼할 생각은 없었지만 만일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일을 그만두고 싶진 않았고, 일 때문에 내 삶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유행하는 말인 소위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누릴 수 있는 직장을 다니며, 회사 일과 개인적인 삶의 성공 둘 다 쟁취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이직 후 처음으로 워라밸이란 걸 경험했는데 '행복한 삶이 이런 거구나...' 싶더라.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즐거웠다. 새로 시작한 일도 나쁘지 않았고, 정시 퇴근 후엔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취미로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다. 취준생 때 동경했던 '일과 취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회사원'이 된 것 같아 나름 흐뭇했다. '결혼하지 않고 이렇게 혼자 평생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라고 생각하던 즈음, 주위 친구들의 결혼 소식이 하나둘씩 전해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결혼하면 이런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지 못할 텐데... 희생뿐인 결혼을 왜 굳이 (빨리) 하려 하는 걸까?' 그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직장에서 만난 유부녀 선배들과의 수다는 날 결혼으로부터 더 멀어지도록 만들었다. 결혼하면 여자 인생은 이제 끝이라는 둥, 시댁과 친정의 부름에 주말에 데이트는커녕 쉬지도 못한다는 둥, 여성 기혼자는 이직도 어렵다는 둥... 점심시간마다 유부녀들의 한탄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결혼은 여자에게는 인생의 마침표다'라고 믿어버리게 됐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 여성들에겐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하고픈게 참 많았던 28살의 난 결혼 때문에 인생을 벌써 마무리 짓고 싶지 않았다.





성공한 커리어우먼을 꿈꿨던 시골 아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스틸샷. 나도 저런 여성들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까진 지방에서 다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줄곧 혼자 살았다. 1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난 나는 유달리 독립심이 강했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어릴 적 옆에 끼고 살았던 위인전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개천에서 용 나는 인물들이 마음에 와 닿았는데 내가 살았던 지방을 개천이라 생각했나 보다. 나도 충분히 용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세뇌시키면서 자랐다. 형제가 많은 집안의 여섯째 딸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밖에 마치지 못한 엄마의 교육관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엄마는 어릴 때 뭐가 되고 싶었어?"라고 물으면 "엄마?? 글쎄..."하고 머뭇거리시다가 "사실 엄마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대학에 가지 못했어. 선생님이 정말 되고 싶었는데..."라고 내 눈을 피하며 대답하던 엄마의 모습. 슬퍼 보였던 엄마의 눈망울 때문이었을까? 나중에 크면 꼭 성공한 커리어우먼이 되어서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자랐다.


다행히도(?) 서울 소재의 어느 한 대학에 입학해서 일단 개천에서 큰 물가로 나오긴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다짐하고 있던 그 무렵, 대학 OT에서 친구 L을 처음 만났다. 정신없이 술만 마셔대는 OT 문화에 충격을 먹고 복도로 피신해있던 때, 저 멀리 복도 끝에 있던 방에서 쭈뼛쭈뼛 기어 나오던 그녀와 처음 마주했다. 왠지 나랑 비슷한 성격일 것 같은 촉이 왔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용기 내어 먼저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뭔지, 어디 사는지, 어떻게 이 학교에 오게 된 건지... 대학 새내기가 나눌 법한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들을 나누면서 알게 되었다. 둘 다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단 걸. 그래서였을까? L은 내 인생에서 절대 뗄 수 없는 중요한 친구가 되었고, 인생의 방향을 정해야 했던 중요한 시기마다 그녀가 있었다.




"넌 꿈이 뭐야?"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우리 딸은 하고 싶은게 뭐야?"라고 묻는 아빠를 바라보며 "아빠 난 꿈이 없어... 바보같지?"라고 대답하던 흔들리느덕선이의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여느 대학생들처럼 L과 나의 대화 대부분은 바로 진로에 대한 고민이었다. "졸업하면 뭐가 되고 싶어?", "어떤 회사에 가고 싶어?" 같은 물음들이 이어졌다. L과 나는 내성적인 성격은 비슷했지만 되고자 했던 삶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난 당당한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고, 그녀는 평범한 가정을 꾸린 아내가 되길 꿈꿨다.



"넌 꿈이 뭐야?"

"난 일단 대기업에 들어갈 거야.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 빨리 승진하고 싶어. 이사도 되고 상무도 되고... 너도 알다시피 한국은 여성 임원 비율이 매우 낮잖아. 내가 그 유리천장을 깨부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럼 결혼은?"

"결혼?? 글쎄.. 별로 생각 없는데.. 한국에서 기혼여성이 되는 건 사회생활의 시한부 판정을 받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그러는 넌? 넌 뭐가 되고 싶은데? "

"있잖아 겨울아... 난 꿈 그런 거 없다? 그냥 적당한 회사에 취업해서 빨리 결혼하고 싶어. 빨리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집안 살림 잘 꾸리고, 주말엔 남편하고 아이하고 여행 다니고.... 돈 많이 안 벌어도 돼. 난 남들처럼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면서 행복한 가정 꾸리는 게 내 꿈이야. 우리 부모님처럼 사는 거."


처음이었다. 결혼을 꿈이라 말하는 사람을 만난 건. 결혼을 기점으로 싱글 때 누렸던 자유를 포기해야 하고, 출산과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잃게 된다는데... 그런 결혼을 그것도 빨리 하고 싶다고? 아니 도대체 왜??


L과의 대화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엔 난 L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며 야망을 가져보라고 설득해보려 했었지만 그녀는 완강했다. 오히려 그녀의 완강함이 결혼에 대해 꽉 막혀있던 내 생각에 금이 가게 한 계기가 됐다. 그 이후로 신기하게도 나처럼 결혼보다 일을 중시했던 친구들이 도미노처럼 저마다 서둘러 결혼 소식을 전해왔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커리어패스를 밟아나가고 있던 선배 언니가 28살이 되던 해 갑자기 결혼 소식을 전해왔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된 친구 Y도, 합격하기 어렵다는 경찰 임용에 합격해 그렇게 꿈꾸던 경찰공무원이 된 친구 H도 28살이 되던 해에 결혼했다. 다들 커리어 따윈 집어던진 건가? 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공부하고, 대학 시절 내내 스펙 쌓느라 고생하고, 그렇게 어렵게 취업 관문을 통과해서 입사했던 건 뭐였나? 그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빨리도 결혼을 하는걸까... 너무도 행복해보이던 그녀들의 얼굴이 참 낯설게 느껴졌다.


혼란스러웠다. 결혼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행복하다고 했다. 결혼하고 나니 마음이 평안해졌다고. 내 편이 생겨서 든든한지 솔로일 때 느꼈던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다며, 힘든 점보다 좋은 점이 더 크다고 내게 자꾸만 결혼을 권유했다. 아마 그때 쯤이었을 것이다.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한 게.


스물아홉 겨울, 서른을 몇달 앞두고 결혼이란 제도에 대해 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꿈을 이루는 것이 먼저일까? 결혼이 먼저일까? 대부분의 서른 즈음의 여자들처럼 나 또한 무서웠다. 결혼에도 때가 있다는데,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영영 혼자 외롭게 살게 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단 두려움이 제일 컸다. 지금은 결혼하고 싶지 않지만 나이 들어서 혼자 있으면 외로울 것 같았다. 또 회사 일이 힘들어질 때면 결혼을 도피처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냥 나이와 양가 부모님의 성화에 떠밀려 결혼해서, 미래의 남편한테 모든 책임감을 다 맡겨버리고 난 편하게 살고 싶다는 그런 철없는 생각을 나 또한 했었다.


그러다가도 '이렇게 결혼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정신을 차려보려 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하는 결혼 말고, 내 의지로 선택해서 하는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엔 내 스스로가 아직 불안정해보였다. 일로서 조금 자리잡은 상태에서 하고 싶었지 지금처럼 뭘 해야할지도 모르는 방황하고 있는 시기에 결혼하고 싶진 않았다. 남자친구에게 내 부담감의 일부를 떠넘기는 것 같았고, 결혼 한 유부녀를 신입으로 받아줄 회사가 있을까? 싶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았다.


서른 살의 난.. 태풍에 맞선 갈대밭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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