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당신이 내가 찾던 왕자님이 맞나요?

확신과 의심 사이, 고민의 줄타기

by 유연







결혼까지 D-270일



"자기는 왜 나랑 결혼하기로 결심했어?"


이제 슬슬 결혼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건지 고민을 시작하던 1월 어느날. 문득 그에게 묻고 싶어졌다. 대한민국에 있는 수많은 여성들 중에 '나'여야만 했던 이유가. 물론 그가 날 사랑한다는 것도, 사랑하니까 결혼을 결심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연애 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보여줬던 행동이 그 근거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사탕발림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했던 예상과는 달리 그가 오히려 나에게 반문했다. "그럼 넌 왜 나랑 결혼하기로 결심했는데?"


결혼을 결심하기 전까지 우리는 5년을 친구로, 그 후 4년을 연인으로 지냈다. 연애 5년 차에 접어들기 1달 전, S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 남들 다 있는 레스토랑에서 무릎 꿇고 하는 시끌벅적한 프러포즈는 싫고, 그냥 둘이 있을 때 조용하게 받는 프러포즈가 꿈이라 했던 내 말을 기억했다는 S는 함께 놀러 간 휴가지 호텔에서 잠들기 직전에 '이제 우리 결혼할까?'라며 반지를 건넸다. 심장이 간질간질하고 프러포즈 반지를 손에 껴는 것만으로도 곧바로 유부녀가 된 것 같던 기분이 들던 그날 밤, 눈을 감고 앞으로 펼쳐질 결혼생활은 어떨지 상상해봤다. 시간이 흐를 수록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고 믿었던 만큼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결혼생활도 그러할 거라 믿었다.


내가 아무리 '솔로로 살 거야'라고 떠들고 다녔지만 사실 S와 사귀면서 결혼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일 것이다. 혼인 적령기에 가까운 남녀가 4년을 사귀었는데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저 학점 걱정뿐이었던 대화 주제는 취업 걱정으로, 취업 후엔 회사 험담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나중에 결혼하면 어떤 남편이 되고 싶은지, 어떤 결혼생활을 꿈꾸는지,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 등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가 꿈꾸는 미래가 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염려되는 부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안 맞는 부분에 대해선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장점이 단점보다 크게 부각되어 보이던 시기였으니까. 그와 대화하면 할수록 우리의 미래가 조금씩 그려지기 시작했다. 썩 괜찮아 보였다. 상상했던 것만큼 아니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신과 의심 사이. 넌 누구니?


고등학생 시절부터 상상해온 나의 이상형이 있다. 여기서 잠깐, 얼마 전 종영된 JTBC 예능프로그램 <알쓸신잡>에 나왔던 패널들을 잠시 떠올려보자. 김영하 작가의 허우대와 패션센스, 유시민 작가님의 지적인 모습, 정재승 박사님의 자상함과 논리력 그리고 유희열의 수더분한 성격까지. 이 모든 걸 다 갖춘 사람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이자면 책, 영화, 사진, 미술 등 예술을 좋아해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저 완벽한 조합을 갖춘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싶다. 그렇지만 연애 시절(결혼식 전인 지금도 아직 연애 중이지만) 당시 난 사랑이라 쓰고 콩깍지라 불리는 환상 속에 살면서 S가 내 이상형에 부합하는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연애 초기엔 모든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헌신하지 않나? 내가 싫어하는 것도 상대방이 좋아한다면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지. 그 사랑의 힘에 가려졌던 4년 간, 난 진실을 보지 못했다. 아니 보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진실은 어디에...? 난 그를 내가 보고 싶었던 대로 바라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대학 시절 이제 막 유행하기 시작했던 DSLR을 먼저 구매해서 나에게 사진이란 취미를 처음 알려준 사람이었다. 한쪽 눈을 찡긋 감고 다른 쪽 눈으로 피사체에 집중해 찰칵! 하고 찍는 모습이 참 멋져 보여서 따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 또한 사진 찍는 게 취미가 됐다. 함께 출사를 다니기도 했고 서로 찍은 사진을 공유하는 게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미래의 배우자는 '나와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걸 즐겨하는 남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랬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사진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취업 때문에 힘들어서, 회사일이 바빠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전히 꿈꿨다. 그에게 삶의 여유가 좀 생기면 언젠가 다시 사진을 취미로 삼게 될 거라고. 내가 반했던 그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래서 우리가 함께하는 순간들을 아름답게 남겨줄 거라고. 인스타에 올라온 친구들의 남친들이 찍어준 사진들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끝까지 그 미련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얼마 전 커밍아웃 아닌 커밍아웃을 했다. "자기야 사실 난 사진에 별로 취미 없어..." 청천벽력같았던 그의 솔직 발언 이후 결국 난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어쩌면 내가 만들어 놓은 이상형의 틀에 그를 투영시켜 바라보았던 건 아닐까... 그렇지만 내가 꿈꿔왔던 그 모습을 앞으로 영영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속상했다. 아니 조금 많이 속상했다.


사랑의 힘은 참 위대하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만든다. S가 독서와 영화를 좋아하는 남자라 생각했던 내 믿음 또한 착각이었음을 얼마 전 인정했다. 연애 시절, 서점 가는 걸 즐겨하는 듯 보였던 그는 사실 책을 좋아해서라기보단 광화문 교보문고라는 공간을 좋아했던 거였고, 영화 또한 영화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니라 티켓료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평점을 받은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그는 친구로 지낸 5년과 연인으로 지낸 4년, 총 9년 간의 시간 동안 그는 똑같이 행동해왔을 것이다. 그의 행동을 멋대로 해석을 해서 그에게 새로운 프레임을 씌운 건 바로 나였다.


익숙하다 생각했던 그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출처: MBC 드라마 쌈마이웨이)


비슷하다 여겼던 부분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변화가 생겼다. 환상 속에 가둬놓은 그를 현실에 풀어주었다. 그러자 연애할 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점들이 하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나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라 S의 이성적이고 냉철한 모습이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감정은 차치하고 효율성만 따지는 그가 냉혈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또 개그코드가 비슷해서 항상 대화를 하면 재밌었는데, 어느 순간은 눈치 없이 내 감정을 건드리는 장난을 치고도 미안한 줄 모르는 그가 참 얄미웠다. 동갑내기여서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하는 게 좋았는데, 오히려 동갑이기 때문에 포용하려 하기보단 절대 지지 않으려 하는 그의 말 때문에 서운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앞으로 평생을 함께 하게 될 배우자라 생각하니 그간 눈여겨보지 않아 몰랐던 부분을 깊게 들여다보게 되더라. 그러니 자꾸만 연애 시절엔 좋게 보고 넘겨버렸던 부분들까지도 나도 모르게 돋보기를 갖다 대고 있었다. 좁쌀 여드름도 손으로 건들수록 커지고 흉터도 제법 크게 남는데, 하물며 사람의 단점은 오죽할까. 짜내지 않은 고름이 있을까 봐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상처가 덧나듯이,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단점이 또 있을까 싶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그의 부정적인 면들만 계속 보였다. 내 짝이 맞다는 확신을 갖고 싶어 시작한 확인이었는데, 오히려 하면 할수록 그 확신마저 점차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먼저다


(출처: 효리네 민박)


'이 남자가 맞는건지?'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허덕이던 올해 봄쯤 예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친하게 지냈던 동생을 만났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먼저 결혼한 인생 선배였다. 워커홀릭이었던 그녀가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 정말 많이 놀랐었는데, 벌써 신혼 1년 차라니 새삼 시간이 빠르단걸 실감했다. 예전엔 마냥 어린 동생 같아 보였는데 결혼 이후 만난 그녀는 한껏 성숙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현명함과 지혜로움도 함께.


"언니. 우리 부부는 서로 사랑하는 것 빼고 맞는 게 하나도 없어요."


정말 서로 너무 사랑하는데, 취미도 관심사도 성격도 뭐 하나도 맞는 게 없다는 그 부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하니 더 좋단다. 결혼이란 게 참 신기한 게, 하기 전까지는 자유가 박탈된 감옥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무서웠는데, 하고 나니 감옥이 아니라 언제든지 보듬어주는 보금자리 둥지 같다고 했다. 엄마 품처럼 따뜻하고 마음이 안정되는 곳. 그래서 서로 더 이해하게 되고 매일매일 사랑이 더 커지는 것 같아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처음엔 빵 터졌다가 나중엔 무릎을 탁 쳤다. S가 내 이상형에 부합한 남자라 좋았던 게 아니라 S이기 때문에 좋았던 것이었는데... 왜 난 내 이상형이란 프레임에 S를 가둬놓고 평가하려 했을까. 반대로 나 또한 S가 꿈꿔온 완벽한 배우자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만일 그가 나에게 그런 모습을 강요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러고보니 작년에 그에게 보냈던 러브레터가 생각났다. '우리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사랑하자'라고 말한 내 스스로가 참 부끄러워졌다.


모든 면이 다 맞는 커플은 있을 수 없다. 백번 양보해서 성격과 취미까지 모든 것이 다 맞는 사람이 있다고 쳐도, 과연 그런 커플은 무조건 행복할 것이라 확신할 수 있나? 오히려 너무 닮았다고 싫어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와 내가 사랑한다는 사실이지, 서로가 닮아서 혹은 이상형에 부합해서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객이 전도된 고민을 줄곧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S에게 "자기는 날 왜 사랑해?"라고 물었을 때 만일 그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가 3가지 정도 있지."라며 이유를 나열해주는 것 보다 "널 사랑해서 이런 저런 면들도 좋아지게 됐어"라고 말해주는 게 어쩌면 내가 더 바랬던 바는 아니었을까?


대화하고 싶어서 결혼했다는 이효리를 보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출처: JTBC 효리네 민박)


그래서 그의 장점을 생각해보려다 멈췄다. 그보단 그와 함께여서 좋은 이유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게 내가 그와 결혼하고 싶어진 이유가 될 것 같았다. 난 그 누구보다도 S와 대화하는 게 제일 재미있다. 그와 통화하는 퇴근길이 하루 중에 제일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햇수로 5년이 넘은 우리 커플은 아직도 전화를 한번 하면 끊을 생각을 안 한다. 한 번은 동생이 '5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할 말이 그렇게 많냐고' 물었는데 생각해보니 딱히 중요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늘 대화가 끊어지지 않았다. 오늘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생각을 했고, 지금 무엇을 보고 있고, 저녁밥으로 뭘 먹고 싶고... 등등 정말 소소한 이야기들이다. 사귀면서 단 한 번도 지루했던 적이나 적막함이 흘렀던 적 없었다. 그와 함께여서 행복한 가장 큰 이유이다.


또 하나 꼽아보자면 둘이 함께일 때 완벽해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혼자일 때는 항상 고군분투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에 대한 갈증이 심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없는데, 항상 부족한 그 부분을 채우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래서 스스로가 늘 부족하게 느껴져서 성에 차지 않았고 낮아진 자존감에 허덕이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는 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S가 옆에 있단 사실 만으로도 든든하다. 태권V를 옆에 끼고 다니는 기분이랄까? 그는 내가 잘하지 못하는 부분을 잘한다. 내가 감성적이면 그는 이성적이다. 나는 추진력이 있고 그는 꼼꼼함이 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완벽한 한 쌍은 아닐지 몰라도 꽤 괜찮은 한 쌍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함께여서 좋은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씽긋.


결론은 이 세상에 내가 찾아 헤매던 왕자님은 없다. 오히려 왕자님을 찾아헤멜 게 아니고 나도 그에게 공주님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왕자님인줄 알았는데 콩깍지가 벗겨진 후 보니 아니더라...라는 후회도 부질없다. 그 또한 스스로가 만든 프레임으로 바라본 본인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 옆에 서있었다. 내가 만든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면 옆에 있는 그가 보인다. 비록 왕자님의 행색은 아닐지라도 실망하지 말자. 이 세상에서 날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인 건 확실하니까.


세상에 왕자님은 없다.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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