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신부는 그 자체로 아름다워요
여자라면 어린 시절 누구나 공주 인형 놀이를 하며 자랐을 것이다. 바비 인형들은 하나같이 금발머리에 뽀얗고 작은 얼굴, 길쭉한 팔과 늘씬한 다리를 가졌었다. 뭘 입혀도 옷 태가 나는 그런 환상적인 비율의 몸매. 인형놀이의 제1원칙은 내가 곧 그 인형이라고 믿기! 그 말은 즉슨 인형에게 내 영혼을 투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바비 인형에게 감정 이입을 해서 예쁜 드레스를 입은 아리따운 신부가 되어 잘생긴 왕자님에게 여러 번 시집을 갔다. 그땐 나와 인형의 생김새가 전혀 다르게 생겼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머리색도 피부색도 몸매도 전혀 달랐는데도 말이다. 그저 막연히 '나도 나중에 크면 바비 인형들처럼 예뻐질 거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내가 그리는 상상 속 결혼식, 그 버진로드에 서있는 신부의 모습엔 까만 머리의 작고 통통한 나는 없었다. 그 자리엔 늘씬하고 금발머리의 바비 인형이 서있을 뿐이었다.
S와 함께 웨딩홀을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진짜로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 슬슬 실감이 조금씩 났다. 웨딩홀에서 보여주는 샘플 사진들 속 신부들은 꼭 어릴 적 내가 예뻐해 줬던 그 마론 인형들 같았다. 깡 마르고 얼굴이 조그맣게 생겨서 어떤 드레스를 입혀놓아도 빛이 나는 모델 같았던 그녀들. 하지만 이번엔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다. 거울 속 나는 그녀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평소에 외모 관리에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귀찮기도 하고, 잘 모르는데 잘 하지도 못하니까 흥미가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어느 드레스샵이 유명한지, 메이크업은 보통 어떤 식으로 하는지, 스튜디오는 어디가 예쁘게 잘 찍는지 등 아는 정보라곤 전혀 없었다. 눈감고 있다가 사기당하기 십상인 웨딩 시장에서 호갱님이 되지 않기 위해 나 또한 결혼 정보들이 넘쳐나는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가입 목적까진 참 좋았다.
등업을 위해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예비 신부들의 수다방을 먼저 들어갔다. 사진이 첨부된 게시글에 눈길이 먼저 갔는데, 그 글들을 볼 때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자꾸만 작아졌다.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팔다리가 마르고 얼굴은 소멸될 것처럼 작았다. "다이어트는 언제 하나요?"라는 제목에 공감이 가 클릭해서 들어가면 사진 속 여자는 연예인 뺨칠 만큼 예뻤다. 이런 거짓말쟁이들!이라 생각하고 스크롤바를 내렸다.
"피부관리는 어떻게 하셨어요? 전 00랑 XX샵 다니는데 더 할까 봐요"
"팔뚝살을 어떻게 빼야 하나요? 병원 추천 좀 해주세요"
"턱 보톡스랑 승모근 보톡스, 코 필러는 기본 아닌가요?"
수십 개의 댓글을 읽고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사진 속 아리따운 신부가 되기엔 한참 멀어 보이는 내 모습.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필요해 보였다. 다이어트도 해야 하겠고, 피부관리도 받아야 할 것 같고, 작은 얼굴을 위해 사이즈 축소 경락 마사지도 해야 할 것 같고, 팔뚝살을 빼기 위해 피부과 시술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해야 할 숙제를 산더미로 받은 기분이 들었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초조해졌다. 돈도 문제였다. 결혼 준비에 들어가는 돈도 많은데 내 얼굴과 몸을 가꾸기 위한 돈까지 들여야 한다니... 게다가 한 두 푼도 아니니까 더 속상했다. 남들은 '예비신부라고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투자하고 있는데 나는 왜...?'라고 생각하니 급격하게 서러워졌다. 나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일단 살을 먼저 빼야 할 것 같았다. 가장 오래 걸릴 테니까 빨리 시작해야겠다 맘먹었다. 통장잔고를 탈탈 털어서 큰 맘먹고 PT를 끊었다. 타고나길 운동은커녕 움직이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내가 즐겁게 운동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마감이 정해진 숙제를 하고 있다는 기분은 운동에 대한 의욕을 더 떨어트리기 일쑤였다. '건강을 위해 생활운동을 열심히 하자!'와 '결혼식까지 무조건 몇 키로를 빼야 하니 힘들게 운동해야 해! 쉬어선 안돼!'는 달랐다. 어슬렁어슬렁 동네 산책하듯 할 수 없었다. 격렬하게 할수록 힘들었고 하기 싫었다. 물론 운동을 마치면 몸이 개운해져서 좋았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건 고통스러운 한 시간이 드디어 끝났다는 해방감 때문이었다. 10번의 PT를 마친 후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하는 운동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그만뒀다. 물론 살은 빠지지 않았다.
다음으론 피부였다. 예비신부는 피부가 환하고 반짝반짝해야 한다며 관리를 받아야 한다고들 했다. 처음 상담을 받으러 간 선릉에 모 피부관리숍에서 20회에 400만 원을 제안했다. 얼굴만 마사지받는다고 피부톤이 환해지지 않는다며 전신을 다 받아야 한다고 했다. 특별히 예쁘게 생기신(딱 봐도 영업용 멘트) 예비신부니까 50% 깎아서 200만 원에 해주겠다며, 엄청 할인해준 거니까 이 기회 놓치면 후회한다고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그 관리숍 아주머니가 나를 설득하기 위해 계속 반복하는 멘트가 있었는데 하마터면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갈 뻔했다.
결혼식은 평생에 한 번뿐인데 예쁘게 보이고 싶잖아요. 본인을 위해 200만 원도 투자 못해요? 남들은 다들 하는데...
아주머니가 급소를 찔렀다. 그 한 마디 말이 날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위해 200만 원도 못쓰는 치졸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한 순간에 초라한 사람이 된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관리숍 문을 나서면 바로 맞은편에 있는 KFC에 가서 그날 받은 정신적 충격을 징거버거로 풀었다. 와구와구 씹어 먹으며 심란해진 마음을 가라 앉혀보려 했다. 심지어 평소에 멀리하는 콜라까지 시켜서 벌컥벌컥 마셨다. 열 받고, 속상하고, 나 자신이 초라하면서도 또 억울하고... 취업하고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고 얼마 안 되는 월급 중에서 아껴 쓰며 모은 돈으로 소박하게 결혼식을 준비하려 했는데, 내가 밟아온 그 삶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 마지막에 덧붙인 '남들도 다 그렇게 해요'라는 말은 상처받은 나를 향한 확인사살이었다.
상처받은 마음이 두려움을 만들어냈다. '신부 대기실에 앉아있던 친구들은 모두들 다 예뻤는데 나만 안 예쁘면 어떡하지?'란 걱정을 시작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는데 밖에서 '저렇게 뚱뚱하고 얼굴이 칙칙한 신부는 첨 본다 얘~ 쟨 아무것도 안 했나 봐~ 오홍홍"거리며 수군대는 사람들을 상상했다. 혹은 드레스샵에 갔는데 그 어떤 드레스를 가져다주어도 어울리는 게 없어 플래너가 한숨을 푹 쉬는 상상도 했다. 무엇보다도 결혼식 당일에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워서 하객들을 향해 환하게 웃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이 모든 고민은 '결혼식에서 예쁘게 보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함에서 시작되었다. 내 종착역은 결혼인데, 어느 순간 난 결혼이 아닌 결혼식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가 되어 있었다.
모든 하객들의 눈에 아름다워 보이고 싶단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신경 쇠약증에 걸려 결혼식을 시작하기도 전에 쓰러질 것 같았다. 남들이 나를 향해 결혼식을 앞두고 다이어트도 안 하는 게으른 예비신부라고 욕해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과정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즐겁게 하는 거고, 나처럼 과정 자체가 힘든 사람은 그냥 포기하는 게 심리적으로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참석했던 친구들의 결혼식을 떠올려봤다. 신부대기실에 조신하게 앉아있던 그녀들을 보며 "아~ 예쁘다!!!"라고 탄성을 자아냈던 순간만 기억난다. 친구들이 모두 연예인처럼 예쁘게 생겼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였던 걸까? 아니었다. 그녀들의 피부톤이 어땠는지, 통통했는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예뻤던 장면들만 떠오를 뿐이다. 아마 신부라는 사실 자체가 그들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어준 것 같았다. 마법에 홀린 것 마냥.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으니 울상이었던 얼굴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로 만성 위염을 달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 속 쓰림이 덜해졌다. 하루에 한숨을 50번 이상 쉬었는데 10번 정도로 줄어들었고 나머지는 웃음으로 채웠다. 살찌는 것에도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했다. 점심시간에 과식해서 뱃살이 조금 늘어난 것 같게 느껴져도 '그래 봤자 0.5kg 불었겠지... 화장실 다녀오면 줄어드는 것이려니...' 하고 넘겼다. 그러니 오히려 자연스럽게 스스로 자제하는 힘이 생겼다. 청개구리처럼 누군가가 '절대 해서는 안돼!'라고 말하면 더 스트레스를 받고, 오히려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자제하는 사람이 나였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마음을 편해지니 얼굴이 폈고, 얼굴이 환해지니 사람들이 '결혼 앞두니 점점 더 예뻐진다'며 덕담을 건네 왔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결혼식'에 대한 고민을 줄인 대신 '결혼 생활'에 대한 생각을 늘렸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게 될 날들에 대해 고민했다. 돈은 어떻게 모을지, 미니멀리스트가 될지 맥시멀 리스트가 될지, 주말에는 뭘 하고 보낼지, 심지어 가족계획에 대해서도 서로 논의했다. 웨딩 커뮤니티 글을 읽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앞으로 내가 맞닥뜨릴 한국 사회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나에겐 결혼식에 대한 환상보단 결혼 생활에 대한 환상이 더 컸기에 이런 고민은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어 졌다.
각자 서로가 가치를 두는 부분이 다르기에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평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을 꿈꾸며 살아왔을 수도 있고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결혼식을 위한 준비가 스트레스가 아니고 행복일 수 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그렇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판단된다면, 나처럼 "예쁜 신부가 되는 것"에 대한 강박을 조금 내려놓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이것 말고도 신경써야 할 것들이 주위에 즐비하다. 다들 행복하려고 결혼하는 것 아닌가? 예쁜 신부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신부님'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마법처럼 아름답게 보여질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