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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Nov 25. 2022

원서를 읽고 검토하는 일을 합니다

출판번역가 데뷔를 기다리며

이번 주에 작업하던 외서 검토서를 에이전시에 넘겼다. 원래 다음 주 수요일이 마감이었는데 오퍼 날짜가 조정되면서 출판사에서 오늘 오후까지로 마감일을 앞당겼다. 다행히도 미리 짜 놓은 일정대로 하고 있었기에 큰 무리 없이 늦지 않게 제출할 수 있었다. 출판사에서 발췌 번역 분량을 줄여주셔서 마음의 부담이 줄어든 덕분도 있었다.


8월부터 지금까지 5권의 책을 검토했는데, 이번 달에 검토한 두 권의 책은 심리학을 다뤄서 특히 더 흥미로웠다. 심리학은 불안 장애로 심리상담을 받기 전부터도 관심을 갖던 분야였다. 한국 저자가 쓴 책도 많이 읽었고 서점에 가면 심리학 코너는 늘 빼놓지 않고 둘러보곤 했다. 그 덕분인지 심리학 책 검토가 들어오면 괜히 더 반갑다. 내가 모르는 분야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목차와 머리말을 읽고 나면 사라진다. 이해가 쏙쏙 되고 금세 책에 빠져든다. 그러다 보면 이 책에 대한 애정이 어느새 내 안에 듬뿍 쌓인다.


사실 출판번역가를 준비하기 전에는 산업번역 일을 했다. 산업번역은 주로 기업체나 관공서 등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문서를 번역하는 일이다. 전문 지식이나 용어를 잘 모르면 엉터리 번역이 될 수도 있어서 해당 분야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에게 번역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통번역대학원을 막 졸업하고 프리랜서로 일하기 위해 여러 에이전시에 노크를 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금방 일감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의 첫 클라이언트는 외국 암호화폐 거래소였다. 아마도 내 이력서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학력을 눈여겨보았나 보다.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암호화폐의 암자도 모르는 상태였다. 위험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본전을 다 잃을 수도 있는 암호화폐에 투자할리가 만무했다.


아무것도 몰라도 일단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으로 일감을 덜컥 받아버린 내가 문제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최선을 다해 번역해야지. 리서치에만 엄청난 시간을 쏟아부었고 혼자서 용어집도 만들어 정리했다. 암호화폐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지식은 늘었고 번역은 수월해졌다.


다행히도 클라이언트사에서 내 번역을 만족스러워하셨고 나중에는 감사하게도 내게 한국어 담당 매니저로 일해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도 해주셨다. 암호화폐 관련 뉴스를 볼 때 예전에는 암호처럼 느껴졌던 말들이 나도 모르게 해석될 때면 뿌듯하기도 했다. 번역을 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배워가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제는 산업번역 일은 하지 않는다. 기업체 문서보다 책 한 권을 번역하는 일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출판번역가로 데뷔하기 위해 출판 번역 에이전시에서 보내주는 외서 검토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둘 다 병행하면 가장 좋겠지만 아직은 하나만 하기에도 벅차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서 검토서를 잘 해내고 싶다. 샘플 번역도 잘 해내고 싶다. 그래서 역서를 낼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왔을 때 준비된 상태에서 꼭 붙잡고 싶다.


외서 검토 일을 하면 내가 평소에 잘 읽지 않는 분야의 책도 읽게 된다. 그리고 출판사가 이 책의 판권을 살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글을 써야 하는 만큼 정말 꼼꼼히 읽게 된다. 그래서 평소에 잘 몰랐던 지식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책도 읽고 돈도 벌고 똑똑해지는 기분이다. 


심지어 외국에서도 출간되지 않은 책의 초안을 받기도 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책을 남들보다 먼저 읽을 수 있는 특권을 가장 원할 것이다. 나는 그 영광을 누리는 일을 하고 있다. 정말 감사하다. 그래서 저자의 오타마저도 사랑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도 실수를 하는구나 싶어서, 오히려 위로가 된다. 몇 백 페이지의 글을 쓰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기획하고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요약하고 거기에 내 생각을 쓰고... 썼다 고쳤다 지웠다를 수백수천 번 반복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저자로 빙의해서 읽고 있는 책이 내 자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더 잘해주고 싶고 더 잘 이해하고 싶고 더 잘 번역하고 싶다.


이번 주에 내가 검토한 책은 꼭 우리나라에서 역서가 출판되길 바란다. 이 책은 저자의 자식이기도 하지만 내 자식이기도 하니까. 나는 나를 거쳐간 책들을 다 내 자식처럼 생각하려고 한다. 내게 역서 계약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좋은 역자를 만나 훌륭한 역서로 탄생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 서점에서 만나게 되면 '내가 검토한 책이야!'라고 소개할 수 있길. 그래서 이 책 출간에 나도 티스푼 하나 정도는 얹었다고 말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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