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이 세상의 한계를 넘는 방식
어떤 특성이 정규분포의 평균에서 일정 기준 벗어나면 불량품이라 한다. 그리고 관측 가능한 범위에서 지나치게 떨어져 해석하기 어려운 데이터를 이상치라고 불린다. 제품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공장에서는 유용한 판단 기준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차안대가 되어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좁히고 왜곡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의문을 품어본다.
2015년 인천의 한 어린이집에서 아동을 폭행한 충격적 사건이 사회적인 큰 이슈가 되었다. 진술에 의하면, 다른 아이와 율동이 틀렸다는 이유로 또는 수업을 못 따라온다는 이유 등으로, 그 아이를 발길질을 하거나 밀치거나 심지어 뺨을 때렸다는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아동학대를 방지하기 위한 몇 가지 법안이 시행되고 있지만, 지금도 집단생활의 표준과 다르다는 이유로 학대당하는 아동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특히 발달장애아를 둔 부모들의 걱정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2018년에 출시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과 인간과의 갈등을 소재로 하는 게임형 드라마이다. 드라마에서는 정상에서 벗어난 뜻의 ‘Deviant’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인간의 지시에 불응하는 불량품 로봇을 지칭한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인간의 지시에 반감을 품은 불량품 로봇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게임을 하면서, 인간과 불량품 로봇의 대결 내용보다는, 도대체 정상과 비정상이 무엇인가?라는 찜찜한 질문이 내 머릿속에 내내 머물러 있었다.
예술작품은 시대적 세계관을 반영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대상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기존의 관점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새로운 시도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익숙함과 낯섦을 오가며 우리의 인식은 확장되었다. 미술사에서 인상주의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1874년 전시된 모네의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을 본 한 비평가의 조롱 섞인 말이 원인이 되어 널리 퍼졌듯 말이다. 당시 유럽의 예술가들은 프랑스 ‘살롱’이라는 권위 있는 전시회에 참가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색채표현이 혁신적인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상한 작품들이 전통적인 기법과 주제를 벗어났다는 이유로 탈락시켰다. 심사위원들의 기준에서는 묘사가 충실해야 하고 색채가 사실적이어야 하는데, 이들의 작품은 비정상적이었던 것이다.
1907년 발표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입체주의를 탄생시킨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당시 평론가들의 평가도 비난과 조롱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기존의 전통적인 원근감을 무시하였을 뿐 아니라 입체적 형상을 이상하게 분해하고 조립한 작품이었기에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괴상하고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상함은 새로운 정상이 되고, 또 다른 낯섦이 다가올 테다.
과학사에서도 새로운 이론의 등장은 초기에 기존의 익숙한 이론으로부터 엄청난 저항과 도전을 받는다. 과학자도 대상을 관찰하고 상상력과 창의성을 가지고 모형화하는 작업은 예술가와 비슷하지만, 검증을 통해 자연의 원리를 찾는 사람이다. 학창 시절 방문했던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 캠퍼스는 웅장한 현대식 건물이 없는 시골스런 분위기의 아담하고 소박한 학교로 기억된다. 뉴턴의 동상을 보았을 때도 솔직히 당시 미술학도인 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훗날 그가 중세시대를 지배해 온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관을 벗어나 근대과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턴은 대학시절에 빛과 색의 성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유명한 ‘프리즘’ 실험을 시작하였다. 그는 비로소 1704년에 빛에 대한 이론을 ‘광학’이라는 책으로 출판한다. 기존에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색 이론은 물체는 각자 고유의 본질적인 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뉴턴은 다양한 실험을 통하여 빛의 여러 가지 성질인 반사, 굴절, 회절 등의 원리를 밝혀내며, 그가 틀렸음을 증명한다. 즉 색이라는 것은 물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빛의 반사과정에 통해 우리 눈에 도달된 빛들이 머릿속에서 색깔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발견이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도 대상이 가진 고유한 색을 표현한다는 것에 벗어나, 빛에 따라 변화는 모습을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진리라고 믿었던 기존의 전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하고, 이를 증명하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고 힘겨운 일이다. 스승님의 생각은 틀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도, 권위자도 한때는 괴짜였을지 모른다.
세상에 없던 신제품이 출시되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불량품이 있었을 것이다. 간송미술관에는 예술적 조형미와 기술의 창의성을 같이 보여주는 국보 68호 상감운학문매병을 감상할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사진으로만 상감청자를 보았을 때는, 미려하고 역동적인 구름과 학들을 어떻게 도자기 표면에 그렸을까 신기해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이 아니고 도자기 표면을 파서 만든 문양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상감청자가 탄생하기 전에는 도자기 표면에 붓으로 그림과 문양을 그려 넣을 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림에 사용했던 산화철 안료가 공기를 차단하고 재벌구이 하는 과정에서 철로 환원하면서 발색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사실 청자의 푸른 빛깔은 바로 철성분이 유리질 코팅층에 굴절되면서 만들어낸 현상이기 때문에, 도자기 몸체와 그림을 동시에 구현하는 것은 모순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엔지니어들은 붓으로 도자기 표면에 그림을 그린다는 기존의 생각을 버리고, 대신에 도자기 표면에 조각칼을 가지고 그림과 문양을 나타낼 수 있도록 파낸 후, 다른 흙으로 그곳을 메운 뒤 구워내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했다. 깨지기 쉬운 얇은 두께의 세라믹 도자기 표면에 조각칼로 흠집까지 만들어 1,300도의 가마에서 구워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상감청자다.
물론 모든 이상치가 언제나 새로운 사조를 만들고, 새로운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새로운 제품으로 우리 곁에 오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익숙하고 편안한 집을 벗어나 문을 열고 낯선 광야를 향해 걸어갔을 때, 인류의 지식은 확장되었고 세상을 이해하는 우리의 눈도 더욱 밝아졌음을 안다. 정상인이 뇌와 비정상인의 뇌를 구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다만 뇌의 어느 부위가 더욱 활성화되느냐의 차이다. 다만, 우리가 깨어있어야 할 것은 굳어진 뇌 연결망에 의해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거나, 익숙한 길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우연에 의해서만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지 말고, 내 안에 있는 에너지를 추가로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