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안씨가 있으면 참 든든하네요.

BRCQ에서 13

by 지안

Jamie는 (이전 글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여러모로 털털하고 넉살 좋은 친구라 함께 일하게 되면 에너지를 주는 그런 직원이었다. 나는 어느덧 BRCQ에서 일한 지 4개월이 넘어갔고, 꽤나 일을 많이 하는 직원이다 보니, 다른 직원들이 모두 내가 중국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영어를 잘 못하는 중국인 손님이 방문해서 이것저것 중국어로 물어보면(그 손님들은 이상하게도 영어권 국가에 여행을 왔지만, 서빙하는 직원들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중국어로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직원들은 굳이 구석에서 와플을 굽고 있는 나를 불러서 서빙을 시키곤 했다.


중국인 손님들을 맞다 보면 당연히 중국어를 많이 쓰게 되는데, 언어 배우는 것에 관심이 많던 Jamie가 내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들었는지, 어느 날 진지하게 나를 불러내서 물었다.


"지안아, 있잖아."

"응?"

"나 궁금한 게 있어."

"응 뭔데? 물어봐."

"그..가끔 중국인 손님들이 말이야. 그.. 뭐랄까.."

"뭔데?"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나와 다른 직원들 눈치를 조금 보던 그녀는


"그.. 중국인 손님들이, 약간 욕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욕? 무슨 욕?"
"왜, 그, 있잖아.. N Word같은거.."


영어로 욕을 표현할 때는 (특히 그 단어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그 단어의 앞 철자만 따서 '무슨 Word'라고 표현한다. Jamie가 말한 N Word는 흑인을 비하하는 표현인 '니거'를 말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Jamie! 그거 욕하는 것 아니야! 하하하하"

"그럼 무슨 뜻이야?"

"우리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단어가 생각이 안 나면, '그...' 나 '저...' 같은 표현을 쓰잖아. 네가 말한 N Word 하고 비슷한 발음으로 하는 말이 중국어로는 '저..'라는 뜻이야"

"아 정말? 나는 발음만 듣고서는 너랑 손님들이 서로 막 욕하는 건 줄 알았어."

"뭐라고? 하하하하하!"


중국어로 '그...' 또는 '저...'는 '这个(zhe ge, 쩌 거)' 또는 '那个(na ge, 나 거)'라고 하는데 지방에 따라 '那个(na ge, 나 거)'를 '内个(nei ge, 네이 거)'로 발음하는 곳도 있다. 아마 Jamie가 들은 말은 '内个(nei ge, 네이 거)' 였던 모양이다.




여름이 되고 직원이 많이 보충되던 시기에 함께 일하게 된 수많은 (스쳐 지나간) 직원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 하면 나는 단연 Claire 누나를 꼽을 것 같다. Claire 누나는 나이가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직원이었다. 외적으로 뭔가 특이한 면은 없었는데, 인상 깊었던 점은 그녀가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녀는 굉장히 나긋나긋하면서도 친근했고,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면서도 선은 넘지 않는, 뭐랄까.. 어른의 포스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Claire 누나 역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지고 호주로 왔다. 그녀 말로는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호주로 왔다고 한다. 호주로 건너와 이것저것 일을 하다가 프랑스인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호주 생활이 끝난 후, 지금은 그와 함께 프랑스에서 사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굉장히 모순 같은 단어이지만) 성숙한 자유로운 영혼을 나타낸다면 이런 사람일까 싶었다. 나는 Claire 누나와 일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인스타그램 팔로우를 하면서 이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 보다, 글을 정말 잘 썼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쭉쭉 읽히는 글들이 내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었다.


하루는 아침 오픈조로 시작하여 가게 문을 열었고, 11시가 되어 Claire 누나가 출근했다. 그날은 다른 날보다 기온이 약간 낮아서 그런지 꽤나 한가했다. 12시쯤 되자, 매장에서 판매하는 음료수들의 제휴사인 코카콜라에서 직원이 방문했다(그는 매 달 정해진 시간에 음료가 잘 팔리고 있는지, 냉장고에 잘 진열되어 있는지 등을 간단하게 점검하고, 사장님과 면담 후 돌아갔다). 마침 내가 매장 뒤편에서 아이스크림들을 정리하고 있던 터라, Claire 누나가 그 직원을 맞았다. 그런데(당연하게도)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급하게 나를 불렀다.


내 경우에는 벌써 일한 지 4개월이 넘었는 데다가, 매니저님이 곧 일을 그만둔다고 해서 이것저것 업무들을 인수인계받았던 터라, 어렵지 않게 코카콜라 직원을 맞아주고, 냉장고사진을 찍게 하고(사실 그가 매장에 방문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냉장고 사진을 찍어가는 일 밖에 없었다), 사장님은 지금 부재중이니 다음에 따로 연락드리면 된다는 인사말과 함께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서빙 준비를 하는데, Clarie 누나가 말을 걸어왔다.

"일 한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랐네요"

"괜찮아요!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사람인데 그냥 냉장고 사진 찍고 가는 게 전부예요"

"아 정말요? 지안씨랑 함께 일하면 참 든든하네요, 모르는 것도 없고 이것저것 도와주고."

"아, 그런가요? 하하 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것들인데요 뭘."


항상 어른스러워지고 싶은 나에게, 진짜 어른이라고 느낀 사람이 든든하다고 말해주니, 뭔가 기쁘면서도 얼떨떨했다.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지만, 아직까지 마음속에 크게 남아 이렇게 글을 쓴다. 그녀는 금방 일을 그만두었다(사실 4명이 동시에 나갈 때, 나간 직원 중 한 명이다). 조금 더 친해졌다면 좋았을 텐데.


아, 참고로 내가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도 Claire 누나의 글을 읽고 나서 결심한 것이다. 어렸을 땐 글 쓰는 것을 참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공부를 핑계로 일을 핑계로 글 쓰는 것을 놓아버렸다. 그러다가 Claire 누나의 글들을 읽고서는 '나도 이 사람처럼 좋은 글로 내 경험들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에 시작하게 되었다. 비록 초보 글쟁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글로 생각들을 표현해 본 게 얼마 만인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4명이 동시에 나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