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해방은 없다.
삶을 살아가며 얻은 하나의 진실이다. 진정한 해방이란 문제가 말끔히 사라지는 마법 같은 상태가 아니라, 문제를 안고서도 결핍된 '나'로서 살아갈 힘을 얻는 과정임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버티는 것은 다르다. 억압하는 건 거창한 비극이 아니다. 가족의 기대, 일터에서의 책임, 친구라는 이름으로 변주되는 관계들. 그 거대한 사회의 시선이 '당신만 힘든 줄 아느냐'는 무언의 핀잔을 주며 입을 막는다. 모두가 힘든데 투덜거리지 말라는 암묵적인 결론 앞에서 감정을 검열하고 괜찮은 척 해내야 할 것을 채운다. 어쩌면 모두 중력에 침식될 수밖에 없는 회색 정장을 입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현실을 반영하듯 희곡을 쓸 때 가장 공을 들이는 작업은 결핍이 있는 인물에게 '갈등'을 부여하는 일이다. 평온하기만 한 삶은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주인공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 있어야 비로소 드라마가 시작된다. 닫힌 방문의 문을 두드려 만난 주인공 은수에게 어떤 갈등을 주어야 할까 고민했다. 은수를 무너뜨릴 가장 강력한 적은 무엇일까.
문을 열고 나온 은수에게 '중력'을 주기로 했다.
내면을 갉아먹는 '완벽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무거운 중력. 그것이 은수가 넘어야 할 갈등의 핵심이다. 은수의 세계인 희곡 속에서 그의 방은 바다가 된다.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때만 방은 푸르게 일렁인다. 회색 정장을 벗고 비로소 숨 쉴 수 있는 내면의 안식처. 그 어항 같은 방에서 자신의 결핍된 진실을 비추어보며 은수는 생각한다.
‘물고기가 되고 싶어.’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스스로의 결핍된 진실을 외면하면 진짜 자신이 사라질 것 같은 절박함에서 나온 외침이다. 사실 은수에게 부여한 그 지독한 중력은 결국 나로부터 온 것이다. 나 역시 지독한 완벽주의자다. 밤을 새워서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으면 시작조차 두려워하는 사람.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해서 실패할 것 같은 상황이면 수면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스스로 심연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사람. 그 깊은 어항에는 사실 중력이 없는데도 나는 가라앉는다. 결국 짓누르는 건 스스로 만들어낸 중력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고, 누구에게나 가라앉게 하는 중력이 있다. 조금 약해지면 안 되는 걸까? 뭐든 다 잘해야만 하는 걸까? 그저 하루에 한 발을 떼어내 조금이라도 떠올랐다면 그것만으로도 중력을 이겨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원래 나는 집이라는 익숙하고 고요한 공간에 웅크려 있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고요 속에서 앞서가는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한없이 가라앉고 있을 때 수면 위로 끄집어내 준 사람이 있었다.
"카페에 가서 수다도 떨고, 글도 쓰고, 맛있는 거 먹어요."
사실 엉망인 내 모습을 보이기 싫어 주저했다. 완벽하게 해내고 괜찮아진 모습으로 웃으며 나가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내 망설임보다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다정한 손에 이끌려 나갔다. 매일 아침 중력에서 부력으로 가기 위해 그 사람과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쓸모없는 대화를 나누고, 웃고, 각자의 글을 썼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꼭 이를 악물고 고통스러워야 하는 게 아니구나.’
그동안 믿어왔던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비장한 모습과는 다르게 헐겁고 편안한 모습으로도 나아갈 수 있구나. 중력만 있는 줄 알았던 세상에 그렇게 다정한 부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때때로 겁이 많아 시도하기도 전에 안 될 것 같은 상황부터 떠올리는 아이. 나를 닮아 벌써 완벽주의의 기질을 보이는 나의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못 할 수도 있어. 하지만 끝까지 해보려고 시도했잖아.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이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해."
사소한 말 하나가 아이의 얼굴에 웃음을 가져다준다. 아이가 방방 뛰어오른다. 그 가벼운 발구름이 마치 중력을 거슬러 부력으로 떠오르는 물고기 같다.
그 말을 푸른 방 안의 은수에게도 해준다.
"물고기가 되려고 했잖아.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뭐든 진짜 네가 돼보려고 한 거. 그거면 됐어."
우리는 그렇게 중력을 거스르며 적힌다.